▲ 그림1. 일본 애니메이션 ‘내일의 죠(허리케인 죠)’의 한 장면 . ⓒ 김선태
DATE : 2012월 12월 7일 아침
밤새 술을 마셔서 뱀에 물린 듯 몸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어젯밤에 <내일의 죠>라는 권투 만화를 보면서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차가운 막걸 리가 내 머리에 차가운 훅을 날렸다. 난 펀치드링크상태(권투에서 주먹 한방에 비틀거리는 상태를 뜻한다.) 에 빠진 권투 선수처럼 멍해졌다. 사각의 방에서 넉다운 된 나를 탈출 시킨 건, 홍어처럼 삭은 내 체취였다. 그 채취에 쫓겨 내가 할 일은 수첩에 기록된 계획대로 '대안 공간 눈'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난 눈에 불을 켜고 <대안공간>이 있는 행궁동까지 걸어갔다. 펀치드링크 상태에서 희망의 나비를 향해 강한 훅을 날리던 '내일의 죠'처럼, 먼저 내 앞을 앞서 날라가며, 따라오라는 나비를 잡으러 갔다. 우리는 누구나 무모한 도전을 하면서 산다. 일본 전공투 세대나 386세대나 현재의 88만원 세대나, 작금의 인간은 누구나 무모하다. 무모하게 열심히 살거나, 무모하고 대책 없이 산다. 하지만, 그 무모함이란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기적적인 것이다.
그렇게 무모할 지도 모를 행사가 시작되었다. [공간틈새]라는 프로젝트의 결과보고전이었다. [공간틈새]프로젝트란 행궁동의 물류배송업 근로이웃을 대상으로 근로이웃의 틈새시간을 적극 활용한 문화행사다. 2012년 8월을 시작으로 11월까지 4개월간의 기억이 술회될 것이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그림2. [공간틈새] 프로젝트의 결과보고전 축하공연 . ⓒ 김선태
하지만, 예술가들이 즐비한 자리에서 습작생의 존재는 처량했다. 대신 최 화백께서 내 초상을 그려주셨는데 너무 감사했다. 초상을 그리려면 움직이지 말아야 했는데, 시선을 고정시킬 수 없어서 자주 움직였다. 추위를 녹위기 위해서 세워둔 히터만 바라봤다.
▲ 그림3. 최경락 화백이 그려주신 나의 초상화 . ⓒ 김선태
난 축제를 뒤로하고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나니아연대기에서 어린아이가 문을 열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던 장면이 떠올랐다. 뭔가 달리 보였다. 들어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고 했던가. 고드름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눈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얼었던 눈밭이 히터에 충혈되었던 내 눈에 녹아버린 것 같았다. 초상 속에 내 검은 눈동자도 익은 노른자처럼 생기가 없었다.
DATE : 2012년 12월 19일 아침
노이로민을 먹고 엄마 손을 붙잡고 투표소를 찾아가 투표를 했다. 엄마한테 말했다. "우리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
▲ 그림4,5 투표 인증사진과 대안공간의 할인이벤트 광고물 사진 . ⓒ 김선태
그리고 난 다시 대안공간을 찾았다. 지난 번 다 보지 못한 전시실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투표인증사진을 가져오면 20% 할인을 해준다는 말에 솔깃하기도 했다. 내게 눈길을 끌었던 것은 물류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일상을 기록한 전시관이었다. 프로젝터가 작은 방의 벽면을 희뿌연 안개 같은 삶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작은 공간은 관람객 앞에서 증강현실기가 되어 꿈틀거린다. 그리고 사각의 벽면은 노동자의 일기장이 되었다. 난 그 벽면을 그대로 베껴서 여기에 옮긴다. 읽어보자.
1. 먹고, 그러고 자면 한 2시쯤 일어나고 볼일 보고 많이 자면 한 5~6시간, 애들은 둘인데 다 커서, 딸내미는 디자인학과 대견스럽지. 그런 게 보여…….이래보면 관심가지는 사람 엄청 많어. 일가면 깜깜―한데서 불켜 놓고 작업해야 하니까, 낮에는 와서 자삐야 하니까 저런 거 보면은 아마 심리적으로도 많이-좋을거야. 그거를 집에선 막 집사람이 바람피운다. 이지랄―하하하! 먼 신년계획을 세워. 아직도 한 달이나 남았는데 너 잠 안 잤지? 너 또 그래가지고 밤에 일하다가 졸리고 잘못하면 다칠까봐.
2. 대학을 공부하러 한국에 왔어요. 한국에서 기계학을 하고 싶었는데, 한국에 온 후로 그런 생각바꿨어요. 경기학? 경제학! 중국사람이니까, 한국어로 공부하면 더 힘들어요. 고시원 살아요. 이런저런 사연없는 사람있나요.
3. 그래―클 나잖아. 아니 산재처리가 문제가 아니라. 아, 요새 왜 황 작가님은 안 나타난데? 보고싶은데. 인간적으로 보고 싶은데 강남 스타일 한번 틀어봐. 좋잖아-강남스타일. 마법의 성 틀어. 그럼, 톡톡은 뭐여?
4. 설계했어요. 현재로선 토목, 건축 쪽이 다 경기가…….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아요. 있는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하기 때문에 서민들이 힘들죠. 근데 그걸 부정할 수는 없어요. 거기서 이제 경제가 움직이는 거니까―사회가 움직이는 거니까―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장단점이 그런 거 같아요. 얼마 안됐어요. 계속 할 생각은 없는거고. 쉽게 말해서 단순 노동이예요, 트레일러고, 뭐, 2~3대 트레일러 그 안 에다가 박스를 실으는 거예요. 힘들면서 돈을 버니까, 되돌아보게도 되고 이게 그래요. 지금끼지 그런 생각은 없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쉽게 벌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이런 거 고맙지. 사람들이라도 순수해서 괜히 미안하고 수줍어. 영화나 음악만이 예술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일이라면 노동이든 뭐가 됐든 예술이지.
5. 주말엔 광교산에 갔다 왔어요. 엊그저께. 놀러 다니는 건 아니고 공적인 일을 하러. 잊어버린 역사를 찾기 위해서, 우리민족은 역사를 잊어버린 슬픈 민족이에요. 역사를 알고 살아야 되는데, 우리 역사를 모르면 마치 고아를 만드는 거죠. 우리가 과거의 역사에 뒤처지면 미래에도 뒤처지는 거예요. 역사라는 것은 문화와 사상이기 때문에 역사를 잊어버리면 민족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들의 대화는 내 가슴 속의 뿌리를 제대로 건드렸다. 내 역사를 말해서 미안하지만……. 2011년 1월 1일. 나는 바보같게도, 물류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왼손이 컨베이어벨트에 말려들어가는 사고를 겪었다. 피부이식을 받고 왼손에 흐릿한 흉터를 남겼다. 산재신청을 받는 과정에서 실랑이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마음에 상처가 생긴 적이 있다. 비실비실 마른 몸의 내가 전투적인 일을 하기에는 벅찼던 모양이었던가. 그 산재로 인해서 더 이상 물류일은 하지 않았다. 동시에, 난 그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본 일기장이 날 감동시켰다. 노동하는 삶을, 생산적인 삶을 사는 그들을 존경한다. 게다가 스스로의 삶을 예술이라니, 산 속에서 역사를 발견하다니. 이 표현 또한 날 감동시켰다.
▲ 죄없는 쥐 . ⓒ 김선태
관람을 끝으로 테이크 아웃커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죽어 있는 쥐를 발견했다. 너무나 처량해서 죽은 쥐를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다. 겸허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쥐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이 쥐와 '그 쥐'를 연관시킨 내 치기를 조롱하고 싶었다. 반성한다. 넌 단지 우리의 반대편 얼굴이었어. 그리고 사진을 찍어서 미안해. 쥐가 죽은 거리. 그 곳에 붙여 있는 선거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 그림 7,8 (위) 대선 포스터, (아래) 영화 <내일의 죠>의 포스터 . ⓒ 김선태
그리고 두 개의 포스터가 뇌리 속에서 겹쳤다. 대선 포스터와 <내일의 죠>의 포스터. 선거 결과는 오늘 결정 날 것이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에게 건투를 빈다.
그리고, 정의로운 후보들의 권투를 빈다. 그리고 우리랑 싸우자. 누가 이기든 링 위에 올라와라! 우리는 아직 하얗게~ 하얗게~ 열정을 태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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