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리메이슨의 세계, 그리고 나의 세계

생각하는 삶 속에 우매한 민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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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민(eurocom)등록 2013.01.16 17:12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우매한 대중들을 다스리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5%의 생각하는 사람들(엘리트)이 15%의 생각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애매형 인간들과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80%의 세뇌된 대중들을 지배하는 사회가 정당한가?

1차 대전 전후 패배의식에 절어 있는 나락한 대중들에게 한 병사 출신의 독재자에게, 연합군이 독일본토를 거쳐 베를린에 입성할 때까지도 충성을 바친 나치들에게는 정녕 선전선동(프로파간다)의 전문가 요세프 괴벨스의 헝거게임적 베틀만이 살아 있는 것인가?

열렬한 크리스찬에게 적그리스도의 이념적, 인간 엘리트적 사도라 일컬어지는, 프리메이슨들이 조종한다는 세상(일테면 영화 '메트릭스'나 '데블스에드버킷', '아일랜드'나 '마이너리티 리포트' 혹은 '헝거 게임:판엠의 불꽃'과 같은 시스템화 된 세계)에 사는 가난하고 아무런 의지력 없는 피지배계급으로서의 인간이 바로 나라면, 내 삶은 과연 보편타당한 권리를 가질 만큼 정당한가?

그렇다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의 규명을 위하여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에게 그가 그토록 갈구했던 영원한 지식이 주어졌는가? 종교의 구원과 영과 혼에 대한 접근법에는 의견을 달리하지만, 그 어떤 외부적인 충격이나 메피스토펠레스의 악령도 아닌 그레트헨의 사랑만이 지적허영의 인식 욕구에 빠진 나약한 학자인 파우스트를 구원하여 괴테 시대의 절대적인 가치인 성령의 말씀 안으로 인도했다.

피를 뿌리거나 인육을 연상시키는 행위 등의 차마 표현하기도 마뜩찮은 광기 어린 퍼포먼스를 통해 생각을 도피시킨 우매한 민중들(스타주의 신봉자들)에게 사탄의 왕국을 선사한다는, 레이디가가와 같은 뉴 월드 레코더들의 충실한(?) 신봉자들의 가상한 노력 덕에 세상의 대중들은 언제나 존재를 잊고 방황하지만, 그런다고 세상이 그리스도들이 부정하는 프리메이슨들의 조종대로 움직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매한 대중들은 프리메이슨의 주장대로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역모기지의 모노폴리 게임의 패배자로, 항상 또 다른 프리메이슨인 거대 금융공룡, 즉 금융 싸이코패스들의 지배를 받으며 집 장만이 삶의 모든 것이라는 환상을 깨야 한다는 생존의 진리가 확고한 사회적 통념으로 자리하기에는,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의 유한한 삶이 너무나 가엽지 않은가?

오로지 그것(집 장만 같은 세속적인 것)만이 종족 보존의 본능과 더불어 서민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지만, 사실 수십 년을 고생해서 마련한 집(부동산)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은행의 담보물에 불과한 상품'이므로 내 인생 또한 '존재하는 나'라는 실체는 없고 삶이 마감되는 그날까지 담보로 잡힌 저당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너무나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면 탈출구는 정녕 없는가?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스도인들의 주장대로 소수의 엘리트(프리메이슨, 일루미나트 같은)가 세계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경역을 지배하고, 우매한 대중들을 음악이나 스포츠 같은 스타시스템의 광기와 드라마 같은 더머주의(Dumberism)를 자극하며 환상과 몽환을 탐닉하는 그들만의 리그를 무지몽매의 시선으로 바라만 볼 것인가?

우리 같은 동종의 피지배자들은 그들의 프로파간다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저 맹목적으로 따라만 가는 집단으로 전락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다가올 세계에 대한 진단은 '이퀼리브리엄'이나 ''레지던트이블' 같은 '블레이드 러너'류의 암울한 미래가 대부분인 것은 맞지만,  'ET'나 '아바타'가 주는 교훈과 '해리포터'나 '나니아연대기' 같은 판타지가 주는 환상과 희망도 엄연히 이 사회에는 존재하니까?

할리우드나 일본의 거장 미야자키하야오의 즐거운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위안을 받을 줄 알고 가벼운 포크 음악에서도 삶의 피로를 용해시킬 줄 아는 나름 깨어 있는 소시민이라면, 록펠러나 미국을 조종하는 프리메이슨이든 음울한 거대 금융 사이코패스 집단이 세계를 좌지우지하며 표현하지 못한 음모를 꾸민다 해도 까짓 무슨 상관이겠는가?

'부의 원천은 노동이지만 부의 증진은 역시 생산성의 향상이 가져 온다'는 진리를 설파하여 근현대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보이지 않는 손'의 시장경제민주화를 촉발했다면, 인간의 모든 고난을 겪고 성자가 된 마호메트나 나이 마흔 이전에는 생의 간난에 온갖 몸살을 앓고 난 후 깨달음의 철학을 동학에 담은 수운 최재우의 경우는, 우매한 민중이 살아가야 할 지표가 되는 고인물이 된다.

정부의 역할이 지금까지 열거한 프리메이슨적인 정치엘리트들의 음모게임에 상관없이 국가를 대리하는 행정의 파수꾼으로써 존재의지를 갖는다거나, 비록 우매하고 보잘 것 없지만 세계 단일 정부를 꿈꾸며 치밀한 음모를 일삼는다는, 전 세계 소수의 프리메이슨들에게 예속되기를 원하지 않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독립된 옴파로스라면 그것이 작은 정부든, 아니면 더 커진 정부든 나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사회나 열거한 5%의 사회엘리트와 15%의 방관하는 주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떻게든 생존하려는 85%의 비주류 피지배자들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법칙이 고착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겠지만 현대 들어 걷잡을 수조차 없는 정보통신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그 정도가 더하고 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각계각층에 숨어 있다는 프리메이슨들의 음모가 세계 단일정부를 형성하여 대중을 지배하든, 약 15% 이상을 점한다는 금융 싸이코패스들이 모노폴리 게임으로 시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든, 약 37억 년 후쯤으로 예상되는 태양계가 소멸하여 블랙홀에 무덤을 만들기까지 지구는 존재할 것이고, 역사는 그것이 정석의 역사든 음모의 역사든 전도되지 않은 가치를 지닌 채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아Q정전'으로 현대중국을 희화화한 중국현대문학의 거장 루쉰이 85%의 우매한 민중의 각성을 촉구했다면, '쉬지 않고 글을 써야 마음의 빗장을 열고 자신의 올바른 존재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한 '허삼관매혈기'의 중국 3세대 작가 위화의 고백에는 비주류인 피지배자들이 인지하고 가야할 잠언이 숨어 있다. 하여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며 기대하는 소시민의 잠언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다.

"나는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록 작은 둘레의 원 안의 비주류지만 피지배자가 아닌, 정당한 '나'라는 존재로 떳떳하게 세상을 경영해 나갈 수 있는 당위성을 얻는다."

덧붙이는 글 *오랫만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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