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The Berlin File> 개인들의 이길 수 없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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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treetalks)등록 2013.02.05 13:56
해외 주재 북한 대사관의 직원들은 밀무역을 통해 외화 벌이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보도들을 보면 말단 직원들의 손을 거쳐 잡다한 공산품까지도 거래가 되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영화 <베를린>은 그보단 역사가 좀더 오래 됐을 것 같은 무기 밀매 현장에서 베를린의 북한 비밀요원 표종성(하정우)과 아랍 테러조직, 러시아 밀매업자가 급습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웅'으로 불리던 북한의 비밀요원이 누명을 쓰고 쫓기는 전개를 가진 영화에서 이데올로기 대치라는 고래 싸움에 희생되는 개인을 언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진다. 어떤 영화가 이런 방향성만을 가졌을 때 깊이가 떨어지는 것은 지금의 현실에 맞는 더 넓은 세계관을 확보하지 못한 채 촌스럽도록 강박적인 메시지만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이나 정치 세력 다툼에 개인이 희생되는 일은 북한이나 리비아같은 아랍권 전체주의 국가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고, 개인의 고민에도 각기 다른 그림자가 있다. 제이슨 본 시리즈가 훌륭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눈을 조금 더 돌려보면 자본주의, 즉 천민자본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확고한 하나의 신념이 돼 사람들의 삶을 휩쓸고 있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베를린>이 좋은 점은 이런 주제를 핵심으로 택하기를 피한다는 것이다. 베를린의 인물들은 국가가, 이상이, 조직이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현실을 아주 빨리 받아들인다. 체제 하에서 쌓아온 부를 기반으로 망명을 시도하는 북한 대사 리학수(이경영)와, 상황이 반전됐다고 여겨질 때 국가 대신 아내를 선택하는 데 망설임이 없는 표종성이 그렇다. 이런 면에서 누구보다 부각되는 인물은 표종성의 아내 련정희(전지현)다. 련정희는 자신의 소속이 어느 쪽이어도 관계 없다. 망명을 하든, 평양에 돌아가든, 좀 더 안전하고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고래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결국 살아남는 것은 패를 이룬 기득권 쪽이다. 좁은 층위에서 말하자면 '집안 좋은 사람은 못이기는 법'이다. 평양의 소위 '진골' 집안 아들일 동명수(류승범)는 이념이나 정치 체제를 넘어서 각박한 사회라면 병처럼 품고 있을 존재이며, 이데올로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앞에 둔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그런 상대와 공존하며, 혹은 피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련정희인 셈이다.

<부당거래>에서도 등장했던 '개인의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주제는 마찬가지로 영화에 등장하는 비밀요원들 사이의 음모나 복수만큼 튀지는 않지만 여전히 명징하다. 물론 영화가 인물들의 패배를 공히 선언하는 것은 아니고, 현실이 그렇듯 나은 결말로의 여지도 열어놓는다.

<부당거래>에서는 진실이 중요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조금 중요하다는 게 다른 점. 액션 장면들은 제이슨 본 시리즈가 떠오를 정도로 잘나왔지만 또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되는 <황해>에 비하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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