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이 백인을 이긴 전쟁, '아두와 전투'

[날씨와 역사 이야기] 모래 폭풍 이용해 독립 지켜낸 '에티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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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성(wxbahn)등록 2013.02.14 15:29
"우리에게는 야케프 칸(Yakefu Qan)의 세월이었지요."

야케프 칸은 '비참한 나날'이라는 뜻이다. 1876년부터 1879년까지 대한발이 전 지구를 휩쓸었다. 1889년부터 1891년 사이에 다시 대가뭄이 들었다. 중국과 인도에서만 2천 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그러나 가장 처참했던 곳은 전체 인구의 3분의1이 굶어죽은 에티오피아와 수단 지방이었다.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이 지역의 가축과 야생 동물 90%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야말로 비참한 나날이었다.

1880년 이후 몇 년 동안을 스크램블(The Scramble) 이라고 부른다. 스크램블은 아프리카 땅을 차지하려는 유럽열강의 쟁탈전을 표현한 단어이다.
식민지 쟁탈전에 늦게 뛰어든 이탈리아는 모양이 흡사 코뿔소의 뿔을 닮았다고 해서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이라고 불리는 동북부 지역을 점찍었다. 아프리카의 뿔에 위치한 나라들은 에리트레아와 지부티,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등 4개국이다.

"기근으로 버려진 땅이므로 우리가 보호하겠다."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이탈리아가 행동에 나섰다. 이탈리아는 가뭄으로 황폐화된 에리트레아를 점령한 후 에티오피아의 나머지 지역은 로마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식민지 쟁탈전으로 얼룩진 아프리카에서 예외적으로 굳게 독립을 지켜 낸 나라였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메넬리크 2세 아프리카의 사자라고 불린 에티오피아 황제 ⓒ R. Pankhurst

"에티오피아는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 조국은 하나님에게만 손을 뻗는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메넬리크 2세는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기근으로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가축도 없었고, 식량과 물 부족은 심각했다. 메넬리크가 자랑하던 기병대의 말들도 가축 전염병으로 다 죽었다. 대부대를 이동시킬 수송수단도 없었고, 보급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포나 소총등도 거의 없었다.

여기에서 메넬리크 황제는 창의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뛰어난 외교적 수단으로 프랑스에게서 무기를 공급받았다. 수많은 부족으로 이루어져 갈등이 있었던 원주민들을 규합했다. 고통과 환난 속에 있는 에티오피아인에게 희망을 주었다. 적은 식량이나마 공평하게 분배했다. 모든 에티오피아인들이 하나가 되어 자발적으로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나서게 만든 것이다. 거기에 지형과 날씨를 철저히 이용했다.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를 곧 생포해 개선하겠다."고 선언한 이탈리아 사령관 바라티에리 장군은 에티오피아로 진군했다. 대포와 최신 소총으로 무장한 약 2만5000명의 이탈리아 군이 국경을 넘었다. 바라티에리 장군은 진군만 하면 에티오피아가 항복하리라 생각했다. 정예 병력의 숫자나, 화력이나, 사기나, 보급에서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비록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지만 조국을 지키겠다는 정신력에서 이탈리아군을 압도했다.

에티오피아는 고원지대라는 지형적 특성이 있다. 고원지대는 평균고도가 2400∼3700m에 이른다. 예상치도 못했던 고지대의 호흡곤란이 이탈리아군을 괴롭혔다. 거기에 '악마에 의해 조합된 약'이라고 불리는 고원지대 특유의 모래먼지는 숨쉬기조차 어렵게 했다. 가뭄으로 물을 구하기조차 어려웠다. 원주민들에게 습격 받아 보급품 공급도 어려웠다. 지형과 날씨가 이탈리아 군의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이탈리아군을 앞에서 이끌던 원주민 출신 별동대가 첫 전투에서 일격을 당하자 바라티에리 장군은 전략을 수정했다. 진군하기보다는 견고한 방어진을 펴고 에티오피아 군이 공격해오면 섬멸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군은 속지 않았다. 대치상태가 길어지자 보급의 어려움을 겪던 이탈리아는 전략을 수정했다. 에티오피아 군이 진치고 있는 아두와를 선제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아두와 전투 아두와 전투를 기념한 테피스트리 작품 ⓒ Joshua Sherurcij


1896년 2월 29일 밤, 이탈리아는 4개 여단으로 나누어 네 길로 은밀하게 전진했다. 우선 아두와 주변 고지를 장악한 다음 우세한 화력으로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정보망은 이탈리아의 움직임을 메넬리크 2세에게 전했다. 에티오피아의 고원과 산악지형은 이탈리아군에게 사지(死地)에 다름 아니었다. 진격해가던 이탈리아군은 험준한 지형과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 군은 우왕좌왕하는 이탈리아군을 기습 공격했다. 분산된 이탈리아 병력을 집중 공격했다.
아침 9시경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는 자신의 근위대 2만5000명을 전쟁터에 투입해 승부를 걸었다. 10시가 넘어서자 이탈리아군 2개 여단이 전멸했다. 이탈리아 사령관은 후퇴를 명령했다.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는 5000여 명 사망, 부상자 1400여 명, 포로 2500여 명에 이르는 참패를 당했다.

아두와 전투는 아프리카 나라가 유럽의 침략군과 싸워서 물리친 유일한 전투였다. 날씨와 지형을 이용하여 대승을 거둔 메넬리크2세는 국제사회에서 '아프리카의 사자'라 불렸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는 자랑스럽게도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유지했던 단 하나뿐인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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