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세대 공존, 이면을 붙든 자본의 향기

연극 ‘에이미Amy’s View’‘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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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명준(simong100)등록 2013.02.23 14:51
에이미의 남자친구인 도미닉과 에이미의 엄마 에스메는 이상하게도 첫 만남부터 친숙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미 서로에 대한 정보가 있는 뉘앙스다. 첫 만남부터 도미닉을 평가하는 전형의 세대. 이는 곧 에이미에 대한 평가와 직결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숙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엄마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에이미는 양 쪽에 모두 약자다. 험한 세상이 아니라 험한 세대 간의 다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전형이겠지만. 모녀라는 관계를 기초해 새로운 가족 구성에 대한 엄마의 개입은 전형적일 수밖에 없다.

에이미의 임신은 그 균형의 균열이요, 도미닉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꿈 속의 빛'이다. 도미닉이 되고자하는 영화감독이 빛을 순간적으로 기록하듯.

연극은 세대 갈등이 표면화되기 가장 용이한 영역을 배치한다. TV, 영화와 같은 미디어 대 연극, 그것은 세대 간의 문화적 이니셔티브에 대한 논점으로 플레이된다. 엄마의 변화, 딸의 변화, 과거와 현재를 3막의 구성을 관통하며 보여지는 가운데 엄마는 딸이 되어가고 딸은 엄마가 되어간다. 작가가 에이미와 도미닉의 아이들을 극중에 배치하지 않은 이유는 자명하다. 이 희곡을 가족신파극으로 비춰지게 하는 건 비양심적이다라고 생각한 듯 하다. 솔직하다. 비교적.

마지막에서나 도미닉은 전형(몰락한 자본)과 화해하고, 품위와 전형이 갖는 허영적 애티튜드 마저 공존의 영역으로 품으려는 시도를 우리는 안도하며 솔직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왜냐면, 그 전형의 영역은 유산이기 때문이다. 유산은 물려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라는 자조아닐까?

'엄만 과거지만 도미닉은 미래에요!'라고 외친 에이미의 대사는 전형적 세대(자본의)에 갇힌 연약한 새의 몸부림이자 선언이다.

이 연극이 훌륭한 이유는 솔직함이다.
데이빗 대언의 이 희곡은 솔직하기에 특별한 플롯은 없어도 묵직한 일상의 재해석을 싣고 있다. 특히,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들 중 하나는 '돈'인데, 이 솔직한 연극은 '돈', 그러니까 '부의 세대 간 이동'이라는 프레임 위에 올려져 있는 셈이다. 엄마 에스메의 부는 보험회사 '로이드'의 불완전상품으로 몰락해가고, 사위인 도미닉은 영화평론과 영화감독으로 승승장구하며 미디어시대를 상징하는 '부자'로 등극하게 된다. 소위 '자본'과 '세대'는 교묘히 관계하고 있고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시니컬한 작가의 입장이다. 자본은 인간을 덮는다. 인간관계도. 마지막 사위가 제안하는 도움을 뿌리치지 못하는 노년의 불안감은 점잖게 표현되지만, 공존은 언제나 불안하다. 완전하거나 안정적인 공존은 이상일 것이다.

상견례를 앞둔 예비커플이라면 딸이 예약하고 엄마와 남친을 청해 함께 관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급적 1층에서 볼 것.

영국의 문제적 작가 데이비드 해어가 쓰고 최용훈이 연출한 <에이미>는2월 15일부터 3월 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 명동예술극장은 옛 국립극장으로 연극전문극장으로 2009년 6월 재개관하였으며, 복고와 모더니티가 함께 느껴지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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