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충남 서천군 서천터미널.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멀리서 '다마스' 한 대가 다가온다. 앞좌석 문이 열리고 다부진 청년 하나가 다가와 인사를 하며 명함을 건넸다. 초록바탕에 검은 글씨, 그곳엔 '유방'이라 큼직하게 적혀있었다.
▲ 서민의 희망, 국민의 젖줄 유방 유방씨가 자체 제작한 명함, 그의 독특함이 엿보인다. ⓒ 김종훈
'유방, 이름이 정말 유방이라고?' 갑자기 떠오른 질문 거리가 머릿속을 맴돌 때, 그는 다시 한 번 또박 또박 말했다.
"국민의 젖줄, 서민의 희망 유방입니다."
최초 인터뷰 방향을 잡을 때, 서울에서 잘나가던 대학생이 남들 부러워하는 취업 자리 거절하고 고향에 내려간 이야기로 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한민국 0.01%의 이름을 가진 사내를 마주하니, '유방'이라는 이름이 계속 맴돌았다. 그것과 관련된 에피소드로 유쾌하게 꾸리면 괜찮을 것 같았다. 괜한 생각이었다. 함께 있어보니 그가 왜 '국민의 젖줄'로 불리는지 금세 알았다. 분명한 건, 단순히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민의 젖줄' 유방, 서천에서 뭘 하나?
서천,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 마을이다. 읍내라 불리는 곳도 보통의 어른 걸음이면 끝에서 끝까지 1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스물일곱 청년 유방씨는 올 초부터 이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서천 땅의 유일한 서점, '교학사'가 그의 일터다.
그곳에서 유방씨가 하는 일은 책 배달원. 마침 일을 하는 도중에 마중을 나온 터라, 서점으로 바로 향했다. 수북이 쌓인 책과 참고서들. 거두절미하고 왜 서점 배달원이냐고 물었다. 유방씨는 슬쩍 한 번 웃더니, "여기가 바로 서천 정치의 1번지"라는 엉뚱한 답을 했다.
'정치 1번지?' 그랬다.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서점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옆 집 종민이가 다음 달에 장가간다"는 소식부터 "그래도 박근혜를 믿어야지"라는 말까지. 자연스레 지역 여론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그가 왜 서점을 직장으로 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심이 드러났다. 무거운 책 꾸러미를 옮기다가도 엉덩이만 붙이면 주변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잡고 읽어 내려갔다. 그 모습은 마치 훌륭한 뷔페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미식가 같았다.
▲ 다마스 타고 온 남자 그의 애마(?) 다마스와 함께 서천을 다녔다 ⓒ 김종훈
오후 5시, 갑자기 유방씨의 행동이 분주해졌다. 일주일에 두 번, 양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동하며 말했다. "처음엔 일손이 부족해서 몇 번 갔던 거예요. 그런데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고향땅에 무엇이 부족하고 필요한지를. 어떤 점이 정말로 바뀌어야 하는지를." 유방씨는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양계장으로 향하며 도로에서 만나는 차들을 헤아려 보라고 했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지만 금세 알 수 있었다. 짧지 않은 거리인데도 열손가락으로 셀 수 있었다. 그만큼 한산했다. 유방씨는 이 모습이 지금 우리네 시골의 일상이라고만 했다.
하지만 양계장은 분주했다. 만여 마리의 닭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까지. 그런데도 유방씨는 매우 익숙한 손놀림으로 양손에 닭다리를 채고 빠르게 닭을 옮겼다. 특히 이날 바람이 만만치 않았는데 그의 등판엔 어느새 선명하게 땀이 배어 있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일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줬다.
정신없이 일한 뒤, 푸짐한 야채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제야 잠시 숨을 고르나 싶었는데 유방씨는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유를 물으니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5분 뒤, 다마스 뒤에서 걸어 나온 그는 말쑥하게 새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매주 금요일, 서천의 한 공부방에서 야학 선생님까지 하고 있었다.
▲ 야학 선생님으로 매주 금요일, 서천늘푸름배움터에 가면 유방씨를 만날 수 있다 ⓒ 김종훈
서천늘푸름배움터, 그곳엔 나이 지긋한 어머님들이 앉아 계셨다. 유방씨는 어느새 강단에 서서 알제리 유학시절 마스터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기자가 수첩에 적은 한 마디가 있다. 요즘 말로 '쩐다'라는 속어였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체력에 놀랐다. 혈기왕성한 이십대라지만 아침부터 쉼 없이 나르고 옮기고 이동하고. 솔직히 하루종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다. 그런데 유방씨는 이 모든 것을 거뜬히 해냈다. '국민의 젖줄'이 허언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했다. 물론 어머니들 역시 서울에서 돌아온 아들 손자뻘 선생님의 강의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부지런히 펜을 움직였다. 2시간 동안 진행 된 수업이 끝나자 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많이 힘드셨죠? 여유 찾으려고 내려온 건데. 이렇게 바쁠 줄 몰랐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더라고요. 일할 사람이 없으니까. 저부터 뛰어야 했어요."
언덕 중턱에 위치한 그의 집은 푸른 대나무 숲을 뒤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집안은 썰렁하고 어두웠다.
아버지와 둘이서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 후로 고향집엔 아버지 혼자서 지내셨고요. 여동생이랑 저는 학교 때문에 계속 서울에 있었던지라."
유방씨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25년 동안 지역 연구를 하셨어요. 부지런히도 서천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셨죠.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서 모든 걸 다 하셨잖아요. 마음에 걸렸어요. 어머니의 빈자리를 전혀 채워드리지 못해서. 집에 점점 먼지는 쌓여 가고... 그러다 지난 연말 집에 내려와 결심했죠. 이제는 아버지와 함께 아침을 먹어야겠다. 완전히 내려 온 거죠."
그는 이 지점에서 한마디 더 보탰다. "실은 제가 채식주의자라서..." 유방씨의 귀향, 지천에 널려있는 싱싱한 채소도 한 몫 했던 거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채식을 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유 없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그 후로 치료 차원에서 채식으로 식단을 바꿨고 다행이 지금은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 아버지와 함께 <서천역사바로보기>, 그는 아버지와 함께 마을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 김종훈
다음 날, 주말인데도 이른 아침부터 하루가 시작됐다. 격주마다 특별한 일이 계획돼 있었다. 국사선생님이자 학자인 아버지와 함께 지역 주민들이 모여 역사현장을 돌며 '서천역사바로보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부분을 정말로 많이 고민했어요. 고향에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지역 주민들이 마을을 더 아끼고 좋아할까.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이, 사람들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자긍심을 심어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러다 보면 차츰 '살기 좋은 마을'이란 소문도 날테고. 언젠가 저처럼 고향을 떠났던 주민들도 돌아오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는 <서천역사바로보기> 모임에 대해 한 마디 더 보탰다. "아버지와 함께한다는 것이 참 의미 깊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모임을 통해 지역과 주민이 하나 된다는 거죠. 모임의 주체가 서천 주민이고, 아버지와 저는 각각 강사와 도우미로 역할하는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지역이 지역 일꾼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열정적인 유방씨도 고향에 내려오니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아무리 찾아도 주변에 또래 친구가 부족했다. "무슨 일을 하려해도 함께 일할 청년들이 필요한데, 보다시피 없어요." 그럴 것이 서천엔 그 흔한 대학 하나 없었다. 청년들이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자체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유방씨가 고향에 내려온 근본적인 이유도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밝혔다. "지역에서 필요한 인재는 이제 지역에서 만들어야죠. 서천이 저를 키워냈으니 이제부터 제가 서천에 필요한 인재들을 모으고 만들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스물일곱 청년 유방씨, 고향에 내려온 지 이제 두 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것을 해냈고 서천을 위해 더 많은 것을 계획하고 있다. 특히 '마을공동체'에 초점을 맞춰 배움터와 독서 모임, 서천역사바로알기 등 지역 주민과 함께 만들어 가는 모임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 했다. 이를 통해 서천에서 필요한 지역 일꾼은 서천에서 직접 키운다는 포부까지 밝혔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보탰다.
"애석하지만 지금 서천에서 일하고 있는 제 또래는 저밖에 없다고 보시면 돼요. 하지만 이렇게 걷다보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겠어요. 서천에도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도 생길 테고, 거기에 따른 일자리도 만들어 질 거고 그러다 보면 청년들이 모이겠죠. 굳이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향하는 길, 다시 한 번 그가 건넨 명함을 살폈다. 그곳엔 '서민의 희망, 국민의 젖줄 유방'이 있었다. 그의 엉뚱함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픽'하고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의미, 다시 서천을 찾게 됐을 때 그로 인해 이곳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게 될까 하는 희망 섞인 미소였다. '국민의 젖줄' 유방씨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 알제리에서 그의 유학 경력은 독특하다. 알제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냈다. 덕분에 영어와 프랑스어 능통하다. ⓒ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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