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허리에 태극기가 꽂혀있다. 삼일절 낮의 길 가 모습이다. 국경일 아침이면 능소화나무가 타고 올라가는 지주목에 태극기를 달던 남편도 올해는 무엇에 마음이 빼앗겼는지 국기 게양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가로등에 꽂혀있는 태극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삼일절을 실감했다.
바삐 사느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시대가 변한 걸까, 국경일의 의미가 흐릿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연휴 동안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말하곤 했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 삼일절은 없었다. 삼일절은 달력 속에만 살아있는 듯 했다.
달력 속의 삼일절
연휴 마지막 날에 남편과 함께 근처 산길을 걸었다. 오솔길엔 마른 낙엽이 쌓여 푹신푹신했고 양지바른 무덤가엔 한낮의 햇살이 따스했다. 까만 오석으로 만든 비석도 햇빛을 받아 빛났다.
▲ 옛 장터에 있던 삼일운동기념비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용흥궁공원으로 옮겼습니다. ⓒ 이승숙
비석의 앞에는 십자가 표시가 있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로 시작되는 성구(聖句)가 적혀 있다. 비석의 뒤에도 빼곡하게 글이 새겨져 있다. 서기 1907년, 광무 11년 7월에 일제의 탄압과 일진회의 극심한 횡포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광성나루에서 처형을 당한 두 형제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비문이었다.
의병이라는 문구를 보니 의분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삼일운동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연휴의 마지막 날에 별 생각 없이 나섰던 산책이 갑자기 목적을 띤 걸음으로 변했다.
강화도의 독립만세운동
1919년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에 퍼져나갔다. 강화의 3.1만세운동은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한 달여에 걸쳐 강화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3월 18일에 일어난 강화 장터에서의 만세 시위에는 약 일만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니 서울 경기 일원에서 최대 규모였고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만세시위였다. 작은 섬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에는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3.1만세운동 소식은 서울로 유학을 간 학생들에 의해 신속하게 강화에 전달이 되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에 다녔던 황도문을 비롯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남몰래 강화에 들여왔고 감리교회의 조직망을 통해 강화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강화읍의 장날인 3월 18일에 만세 함성이 터져 올랐으니 일경(日警)은 아연실색을 했을 것이다.
▲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초대교회(구 길직교회) 앞에 있는 삼일만세운동비입니다. ⓒ 이승숙
구한말 진위대 군인이었던 유봉진은 3월 8일 강화군 길상면 길직교회에서 목사 이진형과 황도문, 황유부와 모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결사대는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사람들을 규합하여 강화읍 장날인 18일에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를 한다.
3월 18일, 결사대의 만세 소리를 따라 일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매일신보는 3월 21일자 신문에서 이 날의 시위소식을 이렇게 전한다. "강화도에서는 18일 오후 2시 시장에서 교인(천도교와 기독교)들을 중심으로 많은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 군청에 달려가고 경찰서를 음습하였으나 폭행한 일은 없었다. (중략) 오후 8시 30분 일시 해산하였으나 다시 시장에 집합하여 오후 11시 겨우 해산했다."
19일에는 길상면 온수리에서 천도교도 수백 명이 교당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렸고 이어서 불은면과 하점면, 교동도 등 강화 전 지역으로 만세운동이 빠르게 확산이 되었다. 매일신문 4월 5일자에는 "밤 8시만 되면 사람들이 산에 올라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다."고 횃불시위 소식을 보도한다.
강화도에서 이렇게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서울과 가까워서 만세운동 소식이 빨리 전해진데다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해 일본과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을 맺은 곳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컸던 점도 크게 작용을 했다. 또 감리교회의 신도들을 통한 조직망이 잘 발달되어 있었고 섬이라서 일본군의 출동도 늦었다. 실제로 강화의 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은 거사 다음 날에야 강화 섬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니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난 하루 동안 강화에서는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으리라.
▲ 강화군 길상면의 길직교회(현 초대교회)는 이진형목사, 황도문, 유봉진 등이 강화 3.1만세운동을 논의했던 곳입니다. ⓒ 이승숙
강화도의 애국지사 중에는 김해가 본관인 분들이 여럿 계신다. 남편은 자신과 종씨인 그 분들의 행적에 뿌듯해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그것은 시조부님에 대한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었다.
시조부님은 마을의 젊은이들을 위해 야학(夜學)을 열었을 정도로 깨인 분이셨다. 1919년, 삼일 만세운동의 불길이 경상도의 의성 땅에도 번졌을 때 시조부님은 분연히 일어서서 앞장을 서셨다.
독립운동은 가문의 영광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던 사람들은 모두 주재소로 끌려갔다. 시조부님 역시 잡혀가서 구속이 되셨다. 집안의 장손이 갇혔으니 그냥 두고 볼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집안 어른들은 유력자에게 뒷돈을 대고 힘을 써서 시조부님을 빼내왔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전과(前科)가 있으면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은 빨리 손을 써서 시조부님을 구했다. 만세운동을 한 전력이 남아서 불온한 성향을 지닌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면 제대로 된 사회활동을 할 수가 없을 터이니 전과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리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가문과 본인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시절이 바뀌고 보니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우리나라가 바로 서고 독립유공자들을 추대할 때 시조부님은 그 자리에 설 수가 없었다. 만세운동을 하다가 실형을 받은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며칠이라도 주재소에 갇혀있었다면 기록에 남아 있었을 터인데 손을 써서 빨리 구출했으니 기록이 남아있을 까닭이 없었다.
▲ 마니산 밑에 있는 화도초등학교 앞에도 애국지사를 기리는 비가 있습니다. ⓒ 이승숙
시아버님은 그것이 내내 안타까우신 듯 했다. 집안에 일이 있어 식구들이 모이면 자주 시조부님의 행적을 말씀해주시며 아버님의 기억에만 남아있는 시조부님을 되살리시곤 했다.
후손에게는 만세운동을 한 조상이 영광스럽겠지만 일제 시대에 그 분들은 불이익을 받으면서 힘겹게 살아야 했을 것이다. 사회활동을 하는데도 장애가 되어서 주류 사회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비주류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뜻이 있어도 펼치기가 어려웠으리라.
자신의 뜻을 펼치며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제 삶을 영위해나가야 하는데 타의에 의해 억압을 당하고, 그래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다면 그 분노는 가슴에 쌓일 것이다. 그 분노가 생명을 갉아먹어 마침내 그 분들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또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일출의 장엄함이 아침 내내 계속되진 않으며 일몰의 아름다움이 한밤중까지 이어지지도 않는다. 비가 영원히 내리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라고 한 시인은 말했다. 영원할 것처럼 엄혹했던 일제 탄압의 세월도 지나갔다.
삼일만세운동의 기운이 퍼져나갔던 그 때처럼 봄기운이 번져나가고 있다. 겨우내 얼어있던 우리 집 안마당의 얼음덩이들도 어느 결에 다 녹았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처럼 어려운 때를 견디고 이겨내면 좋은 날이 온다는 것을 자연이 말해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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