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stoker) - 핏줄을 쏴버리겠다

검토 완료

이승희(terriya)등록 2013.03.07 11:51

영화 <스토커> 스틸컷 ⓒ 박찬욱, <스토커>


금년 2월 28일 전세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스토커(stlker)는 감독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며, 2011년 후반기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복수3부작>이라는 타이틀?로 이루어진 전작들로 유명세를 얻었으며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아 한국인들의 자부심을 흔들어놓았다. 한 사회에서 꼬리가 꼬리를 물듯이 나타나는 폭력(그것은 복수로 드러난다)을 뛰어난 각본과 미장센으로 소화시켰던 그가 한국을 떠나 세계의 영화판인 할리우드에서 소통하고픈 영화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중인가.

수년 동안 한국의 장르영화는 가난한 서민들이 권력에 맞서는 장치로 감동적인 영화를 만드는데 대부분의 전력을 소비했다. 때로는 사랑으로, 직업적 성공으로, 그리고 최하층일 경우에는 범죄(도박, 절도, 조폭질 등)로 서민의 인생을 묘사한 대중영화들은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모두가 떠올릴 수 있다. 꼬질꼬질한 골목길과 다 무너져가는 임대아파트의, 왠지 저소득층밖에 없을것 같은 일련의 이미지들은 대중감독들 누구도 거의 피해갈 수 없이 우리에게 밀착된 일명 충무로 느낌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감독을 한다고 하면 부모들은 대부분 반대할 것 같이 느껴지고, 왠지 무척 가난할 것 같다. (현실도 그렇다) 럭셔리와 최신장비들로 드글거릴것 같은 할리우드와 정 반대인 것이다. 이렇게 영화라는 매체와 한 사회에 살고있는 다수의 삶은 분리될 수 없다.

영화는 시작부터 아버지는 이미 땅에 묻혀있고, 한국나이로는 스무살, 즉 성인을 상징하는 18세 주인공 인디아가 장례식장에 앉아있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돌연히 등장한 삼촌 찰리(매트굿역)는 그녀의 성질을 자꾸 긁어놓기 시작하고, 마치 세트장같은 스토커가문의 집을 둘이 누비며 감각적인 장면을 연출하려 노력하는데 영화의 전반부가 지나간다. 중반부부터 다소 급작스럽게 나타나는 호러연출과 함께 인디아의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 급기야 삼촌과의 근친(?)의 조짐까지 나타나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부자들이 사는 집>

스토커가문의 저택 ⓒ 박찬욱, <스토커>




할리우드의 '주인공'상들이 비참하게 가난한 경우는 거의 없다. 베트멘, 스파이더맨부터 그 유명한 제임스본드를 포함한 액션 히어로들은 교욱을 잘 받았으며 부모가 경제적으로 정상 이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틴영화, 공포영화, 멜로물 등의 장르영화에서 우리는 위 사진처럼 지붕이 좀 뾰족하고 하얗긴 한데 무슨 양식인지 종잡없을 수 없게 생긴 집들을 수없이 많이 보았을 것이다. 녹음이 우거진 정원과 깨끗한 공기, 한두명의 가정부들. 교양있는 가문출신의 미국 상류층이 자식들을 키우는 교외 저택이 본 영화의 주무대다. 별로 교양이 없어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도시에서 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출산을 위하여 교외로 나간다. 값비싼 집세와 불결한 환경, 특히 이민자 집단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대도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같은 경우 아버지는 도시로 출퇴근을 하고, 주부와 아이는 교외에서 일상을 보낸다.

<스토커>에서 역시 권태에 젖은 '스태포드와이프'를 연상시키는 어머니(니콜키드먼역)와 인디아는 안락한 환경에서 가정부를 부리며 살고 있다. 죽은 아버지는 건축가라는데 인상적인 건축은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이 점은 아버지의 부재를 다시한번 강조한다. 그런데 이 비싼 집에서 주인공 인디아는 미국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범죄 프로파일링' 냄새가 나는 전형적인 살인마의 초년기 특성을 보이고 있다. 가난과 폭력에 노출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디아는 감정과 관계에 서툴고, 내성적이며, 어머니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동물사냥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진귀하게 생긴 새들을 박제시키는것이 취미이다. 그러나 그녀는 유복한 가문의 유일한 상속인으로, 가장 축복받은 현대인 중 한명으로 그려진다. 인디아는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행복하지 않으며 오히려 음침한 말이나 하고 다니고, 학교에서는 왕따이며, 딱히 꿈도 없어보인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도 어찌할 수 없던 이 소녀의 무심함은 삼촌 찰리의 등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살인과 시작된다.

<가문과 가족, family and royal blood> 

모여앉은 스토커 가문의 세 사람 ⓒ 박찬욱, <스토커>



미국은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가족관을 고수하는 문화를 갖고있다. 하지만 '아메리칸드림'을 사랑하는 할리우드의 네러티브는 플롯에 엮인 자녀문제에는 과민반응으로 보일정도로 난리를 치는데 비해, 부모내력은 삭제가 된다. 정신적인 자립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그러나 가문은 다르다. 가문은 계급사회부터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예술의 네러티브에서 그것이 갖는 상징성은 대단하다. 서구사회에서 가문은 그들의 성(last name)과 직결된다. 결혼 후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관습도 이 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가족을 사회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로 해석할 수 있다면, 가문은 사회의 권력이 가장 작은 단위로 쪼개진 것이 되어버린다.

가족의 조건이 동거와 애정, 그리고 핏줄이라면 가문은 핏줄 하나로 장땡인데 이 핏줄이 또 부유해서 몇페이지의 상속장은 쓸 수 있어야 한다. 아무나 가문을 가질 수는 없다. 그리고 핏줄이 아니라면 소속될 수도 없다. 스토커 가문 역시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있다. 영화는 동시대에 살고 있는 이 로열패밀리가 실제로는 외부현실과 얼마나 단절되어있는지 보여준다. 먼 친척인 고모가 찾아와 찰리에 대해 경고한 후 살해되기 직전에 방문한 모텔의 불결함이나 인디아가 다니는 공립학교의 격식없는 풍경도 스토가가와는 대조되며, 그녀가 집을 뛰쳐 나와 '윕'과 만난 싸구려 조인트도 영화 전반의 풍경과 대조된다. 그리고 영화는 90분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그 단절된 스토커가의 주택을 분주히 뛰어다니며 진행된다.

그러나 인디아가 스토커가의 구린 면을 처음 파해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집의 지하실이다. 환한 인테리어로 치장된 부엌의 쪽문을 열자마자 등장하는 어두컴컴한 복도는 살육의 세계로 그녀를 처음 인도한다. 지하창고의 냉장고에는 스토커가의 가정부였던 할머니의 시체가 들어있다. 살인이 계속될 수록 영화는 외부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지며 인디아는 점점 외부로 번지는 그 폭력을 절감하게 되지만,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그 집의 아버지 서재에서 모든 일의 단서인 삼촌의 편지들을 발견하게 된다.

<핏줄과 개인의 사이에서>

영화 앤딩 크레딧과 예고편에서 무척 강조 된 노래이다.

난 내 색깔을 찾았어 나는 딸이자 아들이 되었어...(중략) 
집으로 돌아가는 것 따위 없어 
난 나만의 것으로만 이뤄지지 않았어 우리는 행동할 준비가 됐었지 
하지만 새장이 없다면 자유도 없는거야 
네가 무엇이 되었다 생각하든 걱정마렴 그게 네 본래모습이든

인디아는 스토커가이다. 그녀가 느꼈던 아버지와의 애정어린 유대감, 피아노와 독서 등의 고상한 취미로 발현되는 그녀의 배경은 인디아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살인본능은 그녀가 사회를 접하는 방식이 핏줄과 결코 무관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급기야 인디아는 살인을 처음 목격하자 마자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며 울고 만다. 무언가 잘못되었지만 일말의 단서조차 찾지 못한 채 늘 초조한 불안에 들떠있던 사춘기의 열병이 극을 치닫는 순간이며, 그것은 자신의 핏줄을 인식하는 것이 곧 자신을 직면함을 깨닫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살해직후 쾌감을 느끼는 인디아 ⓒ 박찬욱, <스토커>


그러나 인디아는 찰리와도, 자신의 부모와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핏줄을 엽총으로 쏴버린 것이다. 동생에 대한 사랑과 정의라는 것 사이에서 오랜시간 방관하던 아버지, 사소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구여성의 굴레에 갖힌 어머니,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 사소한 이유로 저지르는 살인을 자랑하는 삼촌과 인디아는 다른 색을 띄고 있다. 그 색깔은 바로 독립일 것이다. 그녀는 의지할 곳이나 돌아갈 곳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녀의 독립성에는 도덕적 가치조차 끼어들 수 없는데, 그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살인욕과 성욕보다 더욱 강하게 그녀를 움직이는 원천인 본능말이다.

인간이 자아를 가지고 가치 판단을 할때야 비로소 그것은 인간적이 된다. 개인을 대신할 수 있는 개인은 없기 때문이다. 핏줄도 그것을 해줄수는 없다. 영화는 박정부의 취임식이 이루어진 주에 개봉이 되었다. 박찬욱이 할리우드 진출용으로 이 주제를 선택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개봉날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평범한 개인이 본인의 판단력으로 핏줄과 인연을 달리 하는 것은 현 사회에서 아무도 듣고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상 사회적으로 용납도 거의 되지 않는다. 우리의 가족문화는 강력한 것이다. 하다못해 공인이라면 그것에 대한 논란이 가히 환상적일 것이다. 더욱이 여자가 본인의 성을 버리다니. 남자가 저질러도 모자를 짓이다.

2011년 네임벨류 높은 국내 장르영화 감독 여럿이 '큰물'로 나갔다. 김지운, 봉준호, 박찬욱 감독은 대륙으로 갔고, 홍상수 감독은 프랑스 대배우와 작업을 했다. 인상적인 일이다. 한꺼번에 이루어진 대이동으로 잠시 잠잠했던 2년이었다. 우리가 이 진출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해외의 반응에 급급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토종 감독들이 국내에서는 낼 수 없던 목소리를 분명히 영화 어느 구석에 포함하고 있을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대중문화로써 커다란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가명으로 쓰고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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