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뚜얼 슬렝 학살박물관 -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 킬링필드 그 아픈 비극의 현장에 가다.

검토 완료

박정연(planet4u)등록 2013.03.07 15:25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역사를 보여주는 뚜얼 슬렝 대학살박물관(Toul Sleng Genocide Museum)은 이미 잘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면 관련 내용만 수십여 페이지에 이를 만큼 많은 관련 기사와 사진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비슷 비슷한 글을 재탕하는 것 같아 조금은 망설여졌다. 하지만 정작 뚜엘 슬렝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가 부족하고 웹사이트에 나온 정보도 제각각이라 왜곡된 정보를 바로 잡는 차원에서 정리를 한번 해보기로 했다.

우선 뚜얼 슬렝은 '독이 있는 나무 언덕'이란 뜻이다. '안전감옥'을 의미한 크메르어 '산테발'의 첫 영문 이니셜 'S'와 당시 수용소장의 무선통신 암호번호 21을 붙인 'S21'이 지금은 학살박물관으로 바뀐 뚜얼 슬렝 수용소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 한때는 노로돔 시하누크 전 국왕의 선조 이름을 딴 '차오 뽄 히어얏' 불리던 평범한 고등학교 건물이었고, 17,000명이나 되는 무고한 양민들이 모진 고문을 당했고, 그중 살아남은 자는 불과 7명이라는 사실은 인터넷을 뒤져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대략적인 정보들이다.

그럼 이제부터 뚜얼 슬렝에 대해 몇 가지 잘못 알려진 진실과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 우선 17,000여명의 수감자중 오직 7명만 살아남았다고 하는 부분이다. 처음 듣는 이들은 고작 7명만 살아남았다는 말에 크메르루즈의 잔혹상에 화들짝 놀란다. 하지만, 실제로는 백 여명 이상의 죄수들이 살아서 수용소를 빠져 나간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최후에 남았던 이들 중엔 어른들 뿐 만 아니라 아이들도 5명이나 있었다. 부모와 함께 끌려와 수감되었던 아이들이다. 이중 한 살이 채 되지 않은 아기는 그 후 얼마 못 가 숨졌다고 한다. '마카라' 라고 불리는 또 다른 아이는 너무 어려 이름을 알 수가 없어 베트남 군인들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마카라는 크메르어로 '1월'이라는 뜻으로 베트남군인들이 자신들이 승리한 1월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주었다.

사실, 일곱 생존자를 의미하는 '7'이란 숫자가 서양에서는 행운의 숫자로 인식되고 있고, 마침 베트남군이 크메르루즈를 물리치고 프놈펜을 함락한 날이 1797년 1월 7일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80년대 구 동독의 한 방송팀이 'Die Angkar'(1981)라는 다큐를 통해 만들어낸 과장된 정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럴듯한 허구가 때로는 진실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그 후부터 이 생지옥에서 오직 7명이 살아 남은 것으로 사람들 사이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다른 관련 다큐나 책에서도 덩달아 이 내용을 인용되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박물관내에는 7명의 생존자들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흑백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안내책자에도 버젓이 그렇게 설명되어 있다. 실제로는 수 십 여명에서 최소 100여명 이상이 이곳에서 살아 나간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어찌 되었던 이렇게 해서 공식(?)적으로는 7명의 생존자들이 살아남은 것으로 되었다. 이를 근거로 생존자를 살펴보면 그중에 지금까지 살아 남은 자는 3명 정도다. '춤 메이(Chum Mey)'라는 불리는 80대 노인은 뚜얼 슬렝 박물관에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책을 팔아 살아가고 있다.

1년이 채 않은 어린 아들과 아내가 크메르루즈군의 총에 맞고 죽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지만, 살기 위해 무작정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그의 소설 같은 이야기는 지금도 가슴을 저미게 만든다.

그는 기계수리 기술자였기에 수용소에서 운좋게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죄수들의 진술서 작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타자기를 고쳐준 것이 결정적으로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수용소 박물관 실내에는 수천여점의 수용자들 사진 외에도 크메르루즈의 잔혹상이 그려진 유화그림 수십 여점도 전시되어 있다. 이들 그림을 그린 사람은 '완 낫'이라는 화가다. 7명의 생존자중 또 다른 한명이었다. 지난 2011년 월 사망하지 전까지 크메르루즈를 소재로 한 그림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젊은 시절 수용소로 끌려 들어오기 전까지 만해도 프놈펜에서 차로 6시간 떨어진 바탕방 지역 시내귺장에서 영화간판을 그리던 화가였다. 그는 당간부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로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용소에 함께 수감되었던 아내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부 멩씨 역시 생존해있으며, 그 역시 화가출신이다. 하지만 나머지 4명이 어떻게 살아남았지, 실제로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실제 죄수들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가 있다.

현재 유엔특별법정(ECCC)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크메르루즈 지도자, 브라더 넘버 투(2인자)를 불린 누온 체아와, 키우삼판 전 대통령, 이엥사리 전 외무부장관과 그 부인이자 보사부 장관이었던 이엥 티릿이다. 히지만, 이들 4인방은 어느 누구도 뚜얼 슬렝의 존재에 대해서 단호히 부인을 했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정권하에서는 교화소가 있었을 뿐 교도소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발뺌을 하고 있다.

그들의 진술은 너무나도 명백한 거짓말이다. 알려진 바로는 뚜얼 슬렝 수용소에서 일했던 간수들과 직원들의 수가 무려 1,7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인원이 모두 고등학교를 개조한 수용소에서 죄수들과 함께 지내기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간수들과 경비원들을 위한 별도의 주거공간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뚜얼 슬렝은 죄수를 수감하기 위한 교도소 공간일 뿐이며, 실제 근무인원은 300여명 안팎이었다. 나머지 1400여명의 고용인들은 실제로는 그 주변으로 최소 2백여 미터 반경내 건물들에 살았으며, 일부 건물들은 죄수를 심문하기 위한 별도의 부속건물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다시 건물들을 둘러싸고 또 다른 2중 벽과 철저망이 둘러싸고 있었다. 심지어는 간수들과 직원, 죄수들의 식량 자급을 위해 채소를 기르는 텃밭도 그 안에 존재했었다. 크메르루즈 최정예병력인 703중대 부대병력도 이 안에 상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규모보다 훨씬 큰 감옥이 있었던 셈이다.

더욱이, 70년대에는 프놈펜시내 크기가 지금의 절반정도에도 미치지 못했고, 도시소개령을 통해 대부분의 도시민들을 농촌 협동농장으로 모두 내친 상태에서 불과 2만명 안팎의 필수요원들만 수도 프놈펜에 살았던 시기를 감안한다면,  프놈펜 무니봉대로(Monivong Blvd)에서 인접해있던 뚜얼 슬렝의 존재를 크메르 루즈 지도부가 몰랐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거짓말일 수 밖에 없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또 다른 진실 한 가지는 뚜얼 슬렝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오해가 있다. 인터넷이나 자료를 보면 대부분 무고한 양민이나 크메르루즈에 저항했던 양심수들이 대부분일 것으로 나와 있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크메르루즈에 속했던 인물들이나 문제를 일으킨 군인들도 상당수였다. 1975년 경에는 론놀정권에서 일했던 공무원이나 군인들이 수감되었다. 하지만, 해를 넘기면서 베트남과 인접한 동부지역(스와이 리엥, 쁘레이 웽, 캄퐁참 등)에 있는 크메르루즈군들도 베트남과 협력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상당수 수감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경우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후님(Hu Nim)이다. 크메르루즈 권력서열 4위로 공보부 장관을 지내는 등 권력의 핵심중에 한명이었던 그도 내부의 갈등과 오해 속에 폴폿 지도부로부터 반란죄를 뒤집어 쓰고 뚜얼 슬렝 수용소에서 고문 끝에 죽었다.

그가 고문 끝에 마지막 쓴 진술서에는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동물이다." 라는 말로 마감하고 있다. 폴폿 정권 하에 부총리까지 지낸 원 웽(Vorn Vet)이란 인물도 이곳에서 반역죄를 몰려 78년 10월 경 고문 끝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용소에 잡혀온 죄수들은 수감직후 증명사진을 찍히고 옷과 소지품을 빼앗기고 알몸 검사를 받은 후 곧바로 고문을 통해 진술을 받았다. 수감자들이 태어나서 살아온 이야기부터 적어내야 했다. 그런 후 심문자들은 당의 지시에 따라 각본에 의해 짜여진 진술서 내용을 수감자들에게 강요했다.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경우 이들은 곧 바로 고문실로 끌려가야만 했다. 그 곳에선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모든 고문방법이 그대로 자행됐다. 손발톱을 빼버리는 방식은 기본이고,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물에 처박거나, 전기고문도 서슴치 않고 저질러졌다. 그들에게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온갖 고문을 통해 억지로라도 짜 맞춰진 진술서를 받아내고 손도장을 받았다.

'앙카'라고 불리던 최고 지도부의 명령에 따라 진술이 없는 자체 살해는 금지되었지만, 교도소내 강간도 자주 발생했다.

강요에 의해 녹음된 억지 진술과 자필로 쓴 진술서는 타자기를 통해 모두 공식문서화되었으며, 앙카의 최종 승인이 떨어지면 죄인으로 판정받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약 15킬로 외곽에 떨어진, 크메르어로는 '벙 쩡 아엑', 우리말로는 '까마귀 발 연못'으로 번역되는 '킬링필드'로 눈을 가려진 채 트럭에 실려 보내졌다. 죄수들의 동요와 탈출을 막기 위해 환경이 좀 더 나은 수용소로 이감된다는 감언이설로 죄수들을 속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바로 당일, 또는 그 다음날 새벽 고작 대략 20대 초반의 뗑이라는 불리는 젊은 도살자와 10대 후반의 나이로 구성된 그의 10여명의 부하들에 의해 그들은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뚜엘 슬렝에는 전혀 의외의 인물도 수감되어 있었다. 현 캄보디아 부총리이자 외무부장관인 허 남홍(Hor Namhong)의 딸이다. 당시 허 남홍은 론놀정권 당시 쿠바대사를 지낼 만큼 우익정권에서 온갖 특혜와 권력을 가졌던 자라 새로 들어선 폴 폿 정권에서는 숙청대상 1순위였다. (참고로, 대부분의 해외주재 대사들은 정부의 소환명령에 따라 귀국즉시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크메르루즈 지도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파리에서 함께 공부한 킬링필드 주범중인 한명인 이엥사리와 친구였기에 운 좋게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 자신은 부인하지만, 크메르 루즈 정권하에서도 다른 수용소의 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시하누크국왕의 처형이었던 나넷과 동서인 메떼위도 그가 책임자로 있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크메르루즈 내에서의 갈등과 파벌 싸움속에 교도소 소장이었던 그 자신도 딸의 생명을 구해내지는 못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그의 딸이 어떤 경로로 수용소에 잡혀 있었는지, 알려 진 바는 없다. 하지만,  허 남홍 장관의 부인이 실종된 딸을 찾던 중 뚜얼 슬렝에서 딸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는 일화는 사실로 밝혀졌다.

허남홍이 과거 크메르루즈 출신이라는 정치적 공세와 비난에 대해서도 항상 자신도 희생자였다는 점을 강변한다. 과거 수용소 소장으로서 저지른 죄에 대한 면죄부를 받기 위해 크메르루즈 정권하에의 그의 과거 전력을 딸의 죽음과 연관시킨다. "내가 당시 진짜 권력을 가진 자였다면 내 딸을 뚜얼 슬렝에서 죽게 그냥 내버려 두었겠는가?" 그의 어두웠던 과거에 대한 야권의 비난에 대해 그가 항상 내놓는 공식 답변이다.

뚜얼 슬렝에 수감된 사람들 중엔 외국인들도 상당 수 있었다. 1975년 프놈펜을 함락한 후 프랑스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대부분의 서양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트럭을 통해 태국국경으로 보내졌지만, 버티고 남아있던 자들은 크메르루즈 입장에선 매우 위험한 인물들이었다. 잡힌 사람들 중엔 선교사들도 일부 있었지만, 캄보디아 여성과 결혼에서 떠나지 못한 외국인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전한다.

뚜얼 슬렝에 수감되었던 것으로 공식자료상에 남은 외국인은 대략 79명 정도다. 그중 서양인은 대부분 프놈펜 함락 후 2년 후인 1978년경  캄보디아 영해에서 해상경찰에 붙잡힌 사람들이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서양인은 영국인 John D. Dewhirst 로 당시 나이 26살이었다.

교사출신으로 캐나다와 뉴질랜드 출신 동료 2명과 보트를 이용 말레이시아를 출발 태국 근해로 가던 중 캄보디아 근해에서 배가 좌초되는 바람에  1978년 8월 13일 크메르루즈군 순찰보트에 의해 체포되었다. 캐나다 출신의 동료 Stuart Glass는  체포당시 저항하다 총에 맞아 죽었으며, 살아남은 동료 뉴질랜드 출신 동료 Kerry Hamill과 함께 뚜엘슬렝에 수감되었다.

그는 교도소 고문전문가들로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미국 CIA 첩보원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정보제공댓가로 뇌물을 받아왔으며 자신도 불과 12살부터 첩보원으로 활동했다는 기가 막힌 진술서를 강요받았다.

결국 얼토당토한 미국 스파이로 몰려 참수형을 받았다고 전한다.(일부에선 증거인멸을 위해 불에 태워 죽였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두잇(본명: 까잉 껙 이우)은 그를 기억하며, 그 영국인 청년이 매우 겸손한 친구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또 다른 희생자인 29살 미국인 Michael S. Deeds는 그의 친구 Christopher E. DeLane과 함께 크메르 정권 붕괴 불과 한 달 여 전인 1978년 11월 24일  싱가폴에서 하와이로 항해중 배가 좌초되어 체포된 후 뚜얼 슬렝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친동생 Karl Deeds가 캄보디아를 방문 자신의 형 유골과 유품을 찾기를 희망했으나, 2012년 9월 3일 죽은 형의 동료이자 뚜얼 슬렝에 함께 수감되였던 DeLane의 사진만 발견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79명의 외국인들이 뚜얼 슬렝에서 희생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수용소에서 사진사로 일했던 '님 인'에 따르면 쿠바인과 스위스 출신도 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남은 기록은 없다. 전쟁이 끝난 후 수 천여 장의 수감자 사진이 발견되었지만,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또 다른 수천장의 사진이 남아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수용소가 캄보디아 전역에 대략 167개 정도 더 있었다는 사실이다.

악명 높았던 이 뚜얼슬렝 수용소의 총책임자였던 두잇은 유엔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에서 종신형을 언도받고 현재 구속 수감중이다. 그 외에도 크메르루즈 지도부에 대한 재판 역시 진행중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나이 80순을 넘겼다. 넘버 투로 불리던 권력 2인자 누온체아와 키우삼판도 지병으로 병원입원치료를 수시로 받는 중이다. 이엥사리 외무부장관의 부인이자 전 보사부장관인 동시에 폴폿의 처제이기도 했던 이엥 티릿은 치매로 법정진술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나마 재판에서 제외, 석방되었다.

이제 남은 3인에 대한 재판이 현재 진행중이나, 재판에 소요되는 재정문제와 본 재판에 불만이 많은 현 훈센정부의 정치적 입장과 맞물려 해를 넘겨 몇 년 째 계속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3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역사의 단죄가 이뤄지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크다. 아무쪼록 .하루 속히 재판이 속개되어 억울하게 죽은 이들 원혼들에게 다소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뚜얼 슬렝 수용소에서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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