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애 낳고 오후에 깨 털던 세상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2살 시절이었다. 공무원생활을 하다가 1년간의 단기 군복무인 방위병생활을 하기위해 고향인
장흥군 안양면으로 돌아와 단기병으로 근무를 할 때였다.
나는 안양면 중대본부에서 단기병 생활을 하였고,
그는 안양면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와 나는 비슷한 년배였고 내 초등학교 동창생과 친구였던 그는 어쩌다 친구가 고향에
내려오는 날이면 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안규자 현 장흥군청 주민복지과 과장)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내 고향인 안양면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여 공무원생활 대부분을 안양면에서
보냈다.
안양면에서 호적계를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그는 내가 단기병생활을 마치고 도시생활을
할 때 각종 면사무소 서류들을 나의 부탁으로 보내주곤 했다.
그 시절 안양면에서는 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안양면 모든 호적을 모두 외우고 있어 이름만 대면 어느 마을 몇 번지를 훤하게 끼고 있었기에 안양면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부탁을 하였다.
▲ 안규자장흥군청주민복지과장 34년의 공직생활동안 글을 모아 수필집을 집필하였다. ⓒ 마동욱
그런 그가 벌써 35년을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고 같은 직장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부부가 모두 사무관으로 승진을 하여 장흥군청에서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3남매를 낳고 길러 큰 아들을 장가 보내기위해 어제 3월7일 장흥군민회관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치렀다.
아들 결혼식 피로연에서 그는 35년의 공직생활동안 틈틈이 쓴 글을 모은 수필집"내가 건너온, 오전에 애 낳고 오후에 깨 털던 세상"을 손님들께 선물을 하였다.
그는 공직생활동안 수필과 비평, 글의 세계, 대한문학, 자유문학, 에세이 포레, 좋은 생각등에 수필을 발표 하였고, 2010년도에 <수필과 비평>에서 수필가로 등단을 하였다.
그의 수필집 "오전에 애 낳고 오후에 깨 털던 세상"은 그가 35년의 공직생활동안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와 세 아이의 엄마로 직장생활을 하며 아이들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애절한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공직생활을 하며 자신이 근무를 하였던 유치면사무소에서 면민의 마음을 읽고 댐으로 사라진 유치면의 마을과 유치면 출신의 선각자(풍암 문위세선생)들의 이야기를 소상하게 쓴 글은 유치면을 오랫동안 사진으로 담아왔던 내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다.
그가 유치면장으로 재임할 때 쓴
"돌아올 수 없는 고향
푸른 소나무가 장흥 댐 물에 투영된 제 얼굴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잠겨있는 누군가가 말을 건네는 성 싶다. 청산은 변함없이 오늘도 나를 찾아왔지만 정든 집과 전답을 물속에 남겨 둔 채 떠나 버린 옛 주인은 돌아올 줄 모른다고 말하는 듯하다. 눈을 들어 안개에 젖은 쓸쓸한 호반을 바라본다. 그들의 목소리를 남겨두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다섯 마리의 용이 하나의 구슬을 향해 둘러싸인 듯한 늑룡 1구는 마을 이름조차 늑룡(勒龍)이다. 16세기말 문위세(文緯世)공이 이 마을에 터를 잡은 후 400년 동안 남평 문씨가 성촌(成村)했던 마을이다. 정월 대 보름이면 수령이 400년 된 노거수인 당산나무에 나와 그해 마을에서 가장 사주팔자가 좋은 사람이 제관이 되어 동제를 지냈다. 6.25한국전쟁 전에 좌우익의 심각한 대립으로 동네사람 103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던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사립문밖에 낯선 인기척이라도 있으면 덜컥 문을 열어주지 않고 봉창 문으로 살그머니 내다 본 후에야 손님을 안으로 들이는 습성이 어느 결에 생겨나기도 했다." 중략
장흥댐 건설로 수몰이 되어 물속에 잠긴 유치면 마을 마을을 유치면지와 자료를 찾아보며 글로 엮은 안규자면장의 섬세한 마음씨에 감사를 하게 된다. 고향은 이미 물속으로 사라져 없어졌지만 유구하게 흘러온 역사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 아들 결혼식 피로연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가족 아들 결혼식 피로연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아들과 새 며느리 장흥군의회 의사과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남편 김장렬과장과 아들이 되었던 막내딸 ⓒ 마동욱
수필집 책 머리에 다음과 같은 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였습니다.
"내 인생의 초 가을에
전형적인 시골에서 태어나 여고를 졸업하기까지 지독하게도 숫자에 흥미가 없었던 저는
여중고 시절 국어시간이 가장 좋았습니다. 공무원이 되고 결혼을 하면서 제 인생은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도움에도 불구하고 육아와 직장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고자 했던 강박관념은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던 아쉬움으로 남아, 몇 줄의 글로써 저의 괴로웠던 심정을 토로하게 만들었습니다.
20일도 채 못 된 출산휴가를 마친 시점에서 핏덩이 아들을 시댁에 떼어놓고 돌아서며 뿌렸던 눈물이며, 주말이면 농사일까지 거들어야 했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몇 자 글자놀음을 하게 되어 수필가로 등단을 하고 책까지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공직에 잇다 보니 화장기 없는 얼굴로 외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꼭 외출해야 할 때면 마스크를 쓰거나 모자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인생의 초가을에 수필의 속성이 늘 그렇듯이 아무런 꾸밈없이 속옷차림으로 거리에 나선 심정입니다. 주말을 보내고 헤어질 때쯤이면 엄마 목을 더욱 세차게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으려 때를 썼던 아들애가 어느덧 장성하여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습니다. 하늘에서 좁쌀 하나를 떨어뜨릴 때 땅에 꼿아 둔 바늘위로 떨어질 인연에 비유되는 것이 인간사 혼인이라고들 하는데 그 인연이 되어준 며늘아이가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됨으로써 더욱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그동안 발표했던 글들을 함께 묶어 부끄러운 제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2013년 이른 봄 날 안규자 "
▲ 수필집 워킹맘으로 살아온 삶의 궤적을 뒤돌아보며 쓴 수필집 ⓒ 마동욱
그가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며 두 아이를 낳고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였다. 그땐 산하제한으로 둘 낳기 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세 번째 아이가 생겼으니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 얼마나 조마조마 했을까,
그는 그 때의 심정을 세 번째 아이가 임신되어 세상에 나와 자라는 동안의 이야기를 아이의 마음과 말로 엮었다.
"아들이 된 딸
저는 아기입니다. 눈도 코도 없는 엄마 뱃속의 아기입니다. 낮에는 엄마가 진종일 서서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저도 쉴 참이 없습니다. 엄마를 만난 지 4개월쯤이 되자 제 자리가 갑자기 좁아졌습니다. 저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선가요, 아니면 엄마의 미용을 위해선가요, 엄마가 복대(腹帶)를 하였나 봅니다.
5개월쯤 되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퇴근하여 돌아온 엄마가 복대를 툭 풀어 제쳤습니다. 그러자 숨쉬기가 한결 수월하여졌습니다. 그때 오빠 언니가 엄마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낮 동안 헤어져 있다 만나는 기쁨이 그리도 큰지, 엄마 치마를 잡고 빙빙돕니다. 엄마는 나를 손으로 감싸며 오빠 언니에게 조심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엄마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엄마가 아가를 가졌는데 절대 남한테 소문을 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저도 인간으로 잉태된 순간 축복을 받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을 진대 숨기다니요, 그리고 밤에 아빠와 엄마가 나눈 대화내용이 귀에 거슬립니다. 사무실에서 임신 사실을 알면 난처할 일인데 계속 배가 불러오고 있어 걱정이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저는 조용히 엄마 아빠 만날 날을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도 엄연한 생명체인데 가만히만 있으려니 답답하였습니다. 오히려 발길질을 안 하면 엄마가 걱정하실까 가끔은 제가 잘 자라고 있다는 표시를 냈습니다.
드디어 제가 세상과 만나는 날입니다. 할머니께선 몸이 편찮으신지 외할머니와 함께 병원에 갔습니다. 세상 만나기가 참으로 힘이 드나 봅니다. 엄마는 절규하듯 외마디 소리를 지르다가 스르르 잠이 드시곤 합니다. 새벽녘이 다가오자 진통과 잠 사이를 반복하신 엄마를 어디론가 데려갔습니다. 엄마가 이를 악물며 비명소리를 지르자 드디어 저는 세상과 만났습니다." 중략
아들이 된 딸은 돌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사를 불렀는데 사진사가 아들 옷을 가져와서 왕자복을 입혀 돌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사진사에게 딸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사진사도 분명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 안규자 장흥군청 주민복지과장으로 재임하고 안규자씨는 수필집을 출간 했다. ⓒ 마동욱
수필집의 평설을 장흥출신 소설가 한승원선생께서 써 주셨습니다.
수필집 뒷면에 조금 옮겨 놓은 평설일부입니다.
"안규자의 문장은 다소곳한 고운 한복차림이기보다는, 구색을 제대로 갖춘 반듯한 양복 정장 차림이다. 그렇지만 근엄하지 않고 사근사근하고 상냥하다. 마음 올곧은 여인이 자기의 운신을 수줍어하고 어색하는 듯싶지만 다정다감하고 애옥하고 정확하다. 앞을 내다볼 때는 지금의 자리를 확인한 다음 뒤를 돌아보고 그리고 다시 앞을 내다보는 정직한 예리함을 가지고 있다. <억불산은 말한다.>는 잔잔하고 차분하고 조리 있다. 안규자는 억불산과 한학자이신 할아버지로부터 음덕을 받아 바른 입지를 세우고 살아오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스스로 말하기를, "정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한다. 올곧게 공직생활을 이어오면서도 안규자는 부지런히 책 읽고 사유하고 글을 써서 수줍게 발표하고, 지역주민들과 더불어 살아오기를 늘 게으리지 않게 실천궁행하였다. 자기의 삶의 의미를, 세상의 모든 워킹 맘들과, 자기의 사위와 새로 얻게 될 며느리와 함께 공유하고 싶어 한다. 평생 삶의 궤적이자 화려한 일탈일 수 있는, 이 책의 출판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붓을 놓는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내가 짚어낸 것 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덕목을 발견하고 놀라고 기뻐할 것이다. 한승원(소설가,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34 년 전 안양면사무소에 느꼈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언제 보아도 예전의 모습과 달라진 게 없는 그는 그 시절 누구도 그에게 함부러 다가가지 못했다. 그는 그만큼 공직생활에 성실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나이였지만 모두가 그를 어리게 보지를 않았다.
방위병으로 근무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비슷한 년 배 이지만, 그는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누나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마도 한학자인신 할아버지 밑에서 올곧게 자랐기에 항상 흐트러짐이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이번에 세상에 내 놓은 수필집 "오전에 애 낳고 오후에 깨 털던 세상"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수필집이다. 공직생활동안 그가 틈틈이 글을 쓴다는 것을 조금은 알았지만 이렇게 많은 글을 썼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글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가족 모두를 글속에서 불러내었다. 또한 가족을 떠나 함께 근무하였던 직원들의 이야기와 공직생활의 애로사항과 공무원으로 주민들과 늘 함께 하는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정리하였다.
또한 결혼을 앞둔 큰 아들과 며느리에게 어머니가 살아온 삶의 지침을 고스란히 전하려는 노력이 글속에 자주 나타나고 있다. 세상의 많은 여성들이 직장과 가정을 위해 헌신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직장과 가정을 지키며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장흥군청 주민복지과 과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안규자씨의 수필집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