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 무대는 동굴의 그림자를 비추는데, 그들은 활동하고 있지만 비현실적인 그러나 그런사실을 전혀 모르는 존재들이다. -장 보드리야르
그림자는 실재가 아니다. 질감을 갖지 않는 환영이다. 물성이 없는 그림자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가상과 실재의 중간에 자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가시적인 의미에서 보이기 때문이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이라는 실제 공간에 아무런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 Parallel world / 이창원 Parallel world / 이창원 ⓒ 신상호
작가는 이 그림자가 갖는 이중적 성격에 착안한다.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테이블 위에는 신문기사 혹은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들이 놓여 있다. 각 사진에는 사진 작가가 초점을 맞춘 피사체가 오려져있다.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거울이다.
▲ Parallel world / 이창원 Parallel world / 이창원 ⓒ 신상호
오려진 피사체의 특징을 보자.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볼 수 있는 양동이를 진 엄마와 아이, 뉴타운 철회를 촉구하는 주민, 전쟁터를 순찰하는 군인. 그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뉴타운 철회를 촉구하거나, 전쟁터를 순찰한다고 해서 그들이 속한 세상에 균열을 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림자가 된다. 그들의 형상을 채우고 있는 거울은 손전등의 빛을 받아, 전시장 벽면에 그림자를 만든다. 인간이라는 실체적인 존재도, 대부분의 경우, 그림자처럼 물성이 제거된 존재가 되는 냉엄한 현실을 작가는 냉철하게 드러낸다.
▲ Parallel world / 이창원 Parallel world / 이창원 ⓒ 신상호
작가의 가위는 유명 정치 지도자에게도 날을 들이댄다. 버락 오바마, 김정일 등 유명 정치지도자들의 손을 노린다. 그들은 피사체 전체가 오려지지 않았다. 손만 오려져있다. 여기에서 손을 둘러싼 은유를 확장해보자. 손은 실행적 의미를 갖는다. 현실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존재의 실재를 증명하는 효율적인 도구다.
그렇다면 정치 지도자들의 손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다. 정치인들은 현실에 손을 대지 않는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 주민들의 삶에도, 뉴타운이 들어서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삶에도, 정치인들은 손을 대지 않는다.
정치인들의 손의 부재, 몸뚱아리 전체가 오려져버린 그림자 같은 존재는 이 지점에서 인과성을 찾을 수 있다. 정치인들은 원인일 수 있으며, 결과일 수 있다. 상상은 자유다. 서문에 썼던 보드리야르의 말을 되새겨본다. "그들은 활동하고 있지만 비현실적인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존재들이다."
#2 현대적인 아는 방식에 따르면, 어떤 것이 실재가 되려면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수전 손택
사물을 인식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보고, 듣는 것이다. 사람은 보고 듣는 과정을 통해, 사물 혹은 객체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미지화하거나, 서사 구조로 바꿔 기억 회로 속에 넣는다.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존재는 인식 주체에 의해 왜곡, 과장, 축소된다.
박지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박지성이 수행한 시합 중 가장 인상 깊은 활약만을 머릿속에 담는다. 슈팅 능력이 떨어지거나, 돌파 능력이 떨어진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박지성 스페셜 영상을 통해 상쇄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박지성의 팬들의 뇌리에는 무결점 선수라는 인식이 자리하게 된다.
▲ 함바집 / 성기완+이수경 함바집 / 성기완+이수경 ⓒ 신상호
함바집은 이런 일반적인 인식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작품은 작가의 머리 속에서 편집된 이미지의 재현이다. 작가는 함바집에 대해 보고 들었던 기억을 전시회장으로 옮겨왔다. 전시회 초입부터 함바집의 소리가 들린다.
스테인리스 그릇과 수저들이 부딪히는 소리, 노동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주문하는 소리, 후라이팬 위에 있는 부침개가 자글자글 익어가는 소리. 이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10제곱미터 남짓한 사각형의 공간이 비닐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컨테이너 가건물 같다. 비닐의 한 구석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면, 둥그런 의자 3개만이 놓여있다.
▲ 함바집 / 성기완+이수경 함바집 / 성기완+이수경 ⓒ 신상호
이렇게 해서 작가는 관객을 기만한다. 함바집에 대한 작가 자신의 개별적인 기억을 관객에게 주입시키는 것이다. 함바집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다수의 관객들은 갤러리의 함바집을 통해, 함바집의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그리고 작품은 관객의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재가 된다.
함바집을 갤러리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겠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면, 성공이다. 하지만 공사장에서 함바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일꾼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게 뭐가 함바집이란 말이여." 작품이 한계를 드러내는 지점은 함바집이 인생의 배경인 사람들을 만날 때이다.
그렇다고 충실한 재현을 위해, 식당 아주머니를 앉혀놓고 밥을 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개별 주체가 현실의 함바집을 인식하는 다양한 방식 혹은 가능성들이, 작품 함바집을 통해,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보고, 함바집을 잘 체험했다고 단정짓는 사람들은 자신이 스테레오 타입의 인간형이 아닐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함바집에는 이런 분위기도 있을 수 있겠구나. 혹은 함바집의 이미지를 이렇게 구성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말이 좀 더 흥미롭다.
작품 설명을 보면, "작가에 따르면 함바집은 일시적이고 불안하고 가벼운 가건물 같은 우리 생활의 단면과 덧없이 모였다 흩어지는 인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소리들이다."라고 쓰여있다. 작가는 '덧없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함바집의 특징으로 봤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코끼리의 코가 코끼리의 전부는 아닌 것처럼, 작가가 인식한 함바집도 함바집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