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도의원 정경섭. 거짓말하는 삶이 정치라면 나는 정치인 아닙니다.

2013 겨울농민인문학 농민과 마을 2강. 정정섭 전라남도 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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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형(botarinim)등록 2013.03.14 10:33

정정섭 전라남도 의회 의원과 함께 정정섭 의원은 구례군 농민회 회장으로서 농민 운동과 도시 노동자, 학생, 지역 종교인이 연대하는 다양한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전라남도 의회 의원이 된 이후 늘 정치적 한계에 힘들어 하며 조금이라도 농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의정 활동을 하고 있다. ⓒ 김재형


농민인문학 강좌에 대한 기록을 다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 겨울은 정말 추웠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한 책임감과 인식이 생긴 이후로 나는 집에 거의 난방을 하지 않고 산다. 버틸 때까지 버티지만 체력이 늘 딸린다. 거기다 지난 겨울에는 왜 그렇게 발목을 잡히는 일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어느 한 곳 봐주는 곳이 없었다.
서류를 몇 번이나 다시 만드는 일이 반복되고, 매번 심한 감정적 상처를 입는다.
전남문화예술재단에 신청한 공모 제안은 심사의 연속이었다.
바싹 바싹 가슴타는 일이 줄곧 이어졌다.
도저히 기록할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거기다 농민인문학 강좌를 마칠 시점에는 여러 날을 앓아 누워야 했고, 그 이후에도 여러 날을 지친 상태로 보냈다.
농촌에서 생각을 하며 살았던 댓가였다.
우리 시대의 운동을 설명할 때 '죽거나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하는데, 내 처지가 늘 그렇다. 그런 처지에 놓이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게 된다.

어떤 동일한 일이나 생각의 양면이 있다.
어떤 사람은 동일한 일을 하는데도 밝고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동일한 일을 하는데도 어둡고 실패한다. 명암이 나뉘지만 잘잘못은 아니다 왜냐면 동일한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정섭 전라남도 도의원과 나의 처지는 동일한 가치의 양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정정섭 전라남도 의회 의원은 구례군 농민회 회장 출신이다.
그는 구례의 농민운동 역사에서 살아있는 전설이다.
이번 강의는 그가 일구어낸 전설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시간이었다.

정정섭 의원은 고등학생이었던 1980년 광주 현장에 있었다.
광주 항쟁의 현장에서 학교 선생님이 햇불을 들고 참여한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518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전남대를 갔고, 그곳에서 사회를 보는 눈을 키웠다.
진실을 알게 되면서 미국의 실체를 알았고, 군대의 폭력성도 이해했고,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농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진실을 알게 되었고, 자본의 위험성을 느꼈으며 농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정정섭 의원은 결혼을 해서 구례 산동면 현천마을에 처음 들어갔을 때 부부가 등산 배낭 하나 들고 들어갔다.
빈몸으로 들어간 사람에게 마을의 어른들은 칼, 도마, 쌀, 간장까지 다 들고 와서 도와주었다. 정정섭 의원이 마을의 힘을 느낀 중요한 순간이다.

그는 이 은혜에 보답하듯이 그 이후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산다.
우리 가족이 죽곡에 처음 왔을 때 우린 정말 가진 게 없었다.
우리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 깊숙한 터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곳은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았기에 주위에서 쉽게 땅을 구하거나 채취하며 살 수 있었다.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전기도 없이 사는 우리 삶을 마을 어머님들은 짠한 마음으로 품어주셨다. 처음 마을 어머님들에게 받은 은혜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한때 내가 유토피아에 산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산동에서 정정섭의 중요한 첫 싸움은 지리산 온천 개발 과정에서 시작된다.
온천개발사는 지역주민들을 미국 군대가 인디언을 쫓아내듯이 밀어냈고, 하수 처리장을 건설하지 않고 개장을 했다.
이 문제를 비판했던 정정섭 의원은 온천회사에 장악된 지역 유지들로부터 지역의 발전을 가로막는 불순 세력이라는 모함을 받아야 했다.
농민 운동을 하면서도 한번도 제대로된 호응을 받지 못했고, 애써서 얻은 성과라도 내가 했다고 말하는 순간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걸 경험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지금도 그가 얻은 성과를 내가 한 것이라는 말을 좀처럼 안한다.
이런 곤혹스러움은 나도 여러번 경험한다.
대부분 내가 했다는 말을 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되는 상황이 되어 몇마디하고 나면 오랜 시간 시달려야 한다. 무슨 일이든 하고 나면 잊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절감한 정정섭 의원은 구례읍내에 서점을 낸다.
매주 금요일마다 '금주하고 공부하자'는 구호를 걸고 금요 공부 모임을 2년 반을 했고, 지리산 청년회를 조직하여 지리산의 역사와 구례의 역사를 공부했다.
우리 농민인문학 강좌에 대해 그때의 문제 의식이 이어지는 현장이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이 부분은 내가 그래도 조금 더 나은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공부하는 농민 운동을 내가 풀어야 할 과제로 생각하고 있고, 어쨌든 10년 넘게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전라남도 의회 의원이 되는 과정도 하늘의 도움이라고 해야 한다.
돈과 조직없이 오직 지역을 위해 일해왔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한 도전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정치인이 되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건 아니다.
어떤 투쟁을 하더라도 결국 표결로 결정하게 되면 답이 없다.
책임을 물어도 어쩔 수 없다.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전라도의 토종벌 폐사는 심각한 문제여서 도정 발언을 했지만, 토종벌 문제를 이해하는 의원이 없었다.
정치인의 정치적 토대가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지 않고, 국회의원에게 줄서는데 있다는 걸 여러번 느끼게 된다.
농민운동을 해도 안되고, 농민 대표로서 정치인이 되어 의회에 가도 다수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한국 농업은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
정정섭 의원은 농민 운동가로서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했고, 정치를 하면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거기서도 안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정치를 해보지 않고 안된다는 걸 알았다.
한국 농업과 농촌, 농민은 누구도 답이 없다.

질문 시간이 끝나갈 즈음 한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정치인들 다 거짓말쟁이지 누가 바른 소리 하냐'
그 말을 듣고 정정섭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 뜻이라면 나는 정치인아닙니다. 나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못한다고 답이 없다고 한계가 있다고 인정하면 같이 힘을 모아 찾아갈 수 있지만,
다 할 수 있다고, 하면 돼지 않겠냐고 한계를 돌파하자고 말하면 결국 혼자 하게 되고 거짓말 할 수 밖에 없다.

전라남도 의회에는 농민운동가 출신의 훌륭한 의원이 있지만 그의 현실은 '쫓겨나거나 죽거나'의 두가지 중의 하나인 오랫동안 이어온 농민의 삶의 연속이다.
이제 나이 50이 된 정정섭 의원이 유일하게 희망의 근거로 생각하는 것은 20대 총각이 빈몸으로 왔을 때 그를 품어줬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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