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짐 나눠 지기

몸이 가벼워지는 선물을 받는 ‘이삿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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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sharpeyes)등록 2013.03.15 18:08

이삿날 대충 선 것 같지만 질서가 있었다. 계단이나 경사진 곳, 트럭 근처에는 힘 쓸 사람들이 섰다. ⓒ 들꽃


"등짐 진 달팽이가 길을 가다가 집을 버리고 길을 가는 민달팽이를 만났다. 너는 발가벗고 집을 나와 어디를 가느냐고 놀려대고, 그런 너는 그 무거운 집을 왜 짊어지고 다니느냐고 서로 깔깔거리며 더듬이질을 한다."

짐이 얼마나 무거우면 사람들이 달팽이더러 등짐을 졌다고 했을까. 달팽이가 민달팽이에게 '짐 없이는 불안해서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어. 하지만 도착하면 너와 나눌게'라고 연약함을 드러내며 도움을 요청했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가벼운 몸을 한 민달팽이는 먼저 너의 짐을 좀 나눠 들어주겠다고 말했더라면?

우연히 만난 '달팽이'라는 시에 눈길이 머무는 걸 보니, 이번 이사가 제법 나를 성장하게 했나 보다. 사실 이사만큼 나와 짐의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도 없다. 간편하게 산다고 자부했는데, 싸도 싸도 줄어들지 않는 짐을 보면서, 옷가지를 살피다가 당장 입지는 않지만 언젠가 입을 테니 버리기는 아깝다며 다시 넣어놓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은 마트에 가서 짐을 싸기 위한 상자를 더 얻어오는 나를 보면서 내 짐의 부피와 무게, 현실 자각을 비로소 한다. 짐을 오래 쌀수록 내 짐이 많구나, 짐이 무거울수록 마음도 무겁구나 와 닿는 건 이사를 할 때다.

이런 면에서 이사를 자주 하는 건 축복일지도 모른다. 구석구석에 박혀 있던 짐을 정리하고 몸을 가볍게 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볼록볼록한 군살을 빼는 다이어트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책장에 쌓아놓은 문서를 하나하나 살피며 들고 갈 것인가를 구분하다 보면 어느새 반이 줄어 있고, 너와 네가 각자 가지고 있는 책은 한 권으로 같이 보기로 하고 다른 한 권을 적당한 곳에 기증하면 더 가벼워지고,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아도 깨끗한 옷도 내놓으면 제 주인을 찾아간다. 처음엔 아까운 마음에 선뜻 내놓게 되지 않더라도 한 번 해보면, 다음은 쉽다. 내게 외면당하던 물건들이 제 짝을 찾아가는 건 신기하고 재미가 꽤 쏠쏠하다.

스스로 이사할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살기로 매번 다짐하지만, 이번에 확 줄이지 못한 내 짐을 미안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맡기는 법을 훈련하기도 한다. 내 일인데 네게 부담주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다음에 네 일에 내가 함께 할 것을 생각하며, 또 우리 사이에 너나의 경계가 희미해지기를 바라며 "이삿날 와 달라"고 초대한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가겠다"는 답을 듣고는, 내가 새로워지는 이사가 곧 모두 새로워지는 사건인 것을 깨닫는다.

트럭에서 새 집에 짐을 내리고, 다시 옛 집으로 짐을 빼러 돌아가는 길. 트럭에 올라타고 재미있어 하는 친구들 ⓒ 들꽃


이사는 익숙한 것과 결별해, 내 배치를 새롭게 한다. 순간 삶이 재구성된다. 버스 정류장과 1분 거리에 살면서 몸에 붙어버린 늑장 버릇이 이사 가면서 고쳐지기도 하고, 가구 배치를 새롭게 하면서 동선을 다시 구성하기도 한다. 비혼공동체집은 구성원들이 바뀌면서, 새롭게 관계를 맺는다. 아침저녁 얼굴을 마주 대하는 만남은, 그렇지 않은 마주침과 정말 다르다. 서로를 이해하는 정도도, 알게 되는 깊이도 말이다. 이미 익숙해진 관계에서 떠남은, 나를 직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듯, 상대방을 통해 미처 몰랐던 나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알게 되는 게 변화의 시작이다. "우리 아직 안 살아봤는데" 하는 아쉬움과 "우리 다음에도 같이 살면 좋겠다"는 소리가 이사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비혼공동체집 이사 때는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전율과 기대가 있다.

우리도 새 마음으로 이사를 했다. 시간을 비우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삼삼오오 모였는데 모이고 보니 서른 명이다. 이사하는 당사자가 누구인지 얼핏 보면 분간이 되지 않았다. 팔 걷고 하얀 장갑 낀 모습들이 다들 주인이다. 하긴, 이사 하루 전에 이사 갈 집을 청소하자고 빗자루며 걸레, 세제 등을 들고 모인 사람들 대부분도 자기가 거처를 옮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이번에는 이사할 집이 깨끗해 도배와 장판은 새로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무도 진두지휘하지 않아도 척척이다. 어떤 이는 조립용 가구를 분해하고, 어떤 이는 물건을 옮길 순서를 정해준다. 나머지는 일렬로 서서 손에 손으로 짐을 전달한다. 대충 선 것 같지만 거기에도 질서가 있었다. 계단이나 경사진 곳, 트럭 근처에는 힘 쓸 사람들이 섰다. 재활용과 관련한 일을 하는 친구는 이사한 뒤에 남은 쓰레기와 가구들을 마무리했다.

즐거운 식사 시간 수고한 사람들 모두 모여 함께 밥을 먹었다. 이사를 함께하지 못한 사람은 짜장밥을 한솥 해놓고 갔다. ⓒ 들꽃


어떤 이는 안 보이는 곳에서 식사를 준비했다. 떡볶이를 만들고 라면을 끓이고, 집에서 밥을 해서 나르기도 했다. 부족한 수저와 그릇을 들고 나오느라 집집을 몇 번이나 오간 친구, 일하러 가야 해서 이사를 돕지 못해 미안하다며 30인분 짜장을 만들어놓고 간 친구들을 생각한다. 내 짐 나눠 지는 친구, 내 밥 나눠 먹는 친구들이 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이 기사는 <아름다운마을신문> 34호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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