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여 불굴의 항해사가 되자

다산, 마키아벨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카스트로와 차베스에게서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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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digitalmr)등록 2013.04.19 14:06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즐겨하고 다방면의 학문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박학호고(博學好古: 널리 배우고 옛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지칭)로 널리 알려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가 외증조부였던 외가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실학(實學)사상까지 섭렵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선 이후에도 높은 학문과 재능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정조 사후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에 의해 다산은 비록 처형은 면하였지만, 길고 긴 18년간의 유배에 처해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 처절한 유배기간이야말로 다산의 위대한 학문적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니, 그는 불운에 굴복하지 않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이 기간 중 500여 편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다.

다산이 얼마나 학문과 저술에 열심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그는 한 곳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서 글을 쓰다 보니 나중에는 엉덩이가 곪아서 앉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벽에 선반을 설치하고 일어서서 글을 썼는데, 나중에는 오른쪽 팔꿈치에 옹이가 박혀서 오랫동안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다산은 자식들에게 편지(家戒)를 보내어 항상 경계심을 일깨우곤 하였다.

"절대로 자포자기 하지 말고, 성의를 다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책을 읽고 베끼며, 글을 짓는 일에 혹시라도 방과(放過)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폐족(廢族)으로서 글을 배우지 않고 예의가 없다면 어찌 하겠느냐? 모름지기 범인(凡人)들보다 백배의 공력을 더 하여야 겨우 사람 축에 들게 될 것이다."

󰡔군주론󰡕을 썼던 이탈리아의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 ~ 1527). 그는 피렌체의 파산한 법률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두 개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나는 풍요롭지 않은 경제적 어려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풍요로운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열망이었다.

마키아벨리는 29세의 나이로 공직에 진출하여 피렌체 공화정의 행정과 외교 방면에서 15년 동안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1512년, 마키아벨리 스스로 '1512년, 모든 것이 완전히 박살난 해'라고 했듯이, 파면과 반역 혐의로 인한 체포, 그리고 지독한 날개꺾기 고문(Strappado)을 겪는 등 모든 것을 잃고 절망의 끝까지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좌절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고전에서 찾았다.

"저녁이 오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 서재로 들어간다네. 서재로 들어가기 전에 흙과 먼지가 묻어 있는 일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지. 그분들은 나를 정중히 맞아 주시고, 나는 혼자서만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지혜의 음식을 그 어르신들과 나누지. 매일 옛 시대의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 네 시간 동안 나는 아무런 피곤을 느끼지 못한다네. 내 삶에 주어진 모든 시련과 고통도 다 잊어버리지. 나의 가난도 두렵지 않아. 내게 닥쳐올 죽음조차도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 ~ 1519)의 삶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처절한 노력을 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정식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피렌체의 한 공방에서 도제로 일했다. 10년의 육체노동을 거쳐 독립하였지만 그는 아직 뜨내기 화가일 뿐이었다. 그는 시스티나 성당 신축 장식을 위한 영광스러운 로마행에서 제외되었고, 수도원의 괘종시계나 장식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미래는 대단히 암울했고, 재정적으로도 매우 궁핍한 처지였다. 그는 물감을 살 여유도 없었고, 곡식과 와인도 외상으로 사야했으며, 장작도 스스로 사서 때야 했다.  

그는 여기서 새로운 삶의 지평선이 될 밀라노 행을 결정한다. 그는 그곳에서 좌절하지 않고 절치부심하였으며, 비로소 기회를 갖기 시작하였다. 저명한'암굴의 성모마리아'나 밀라노 대성당 탑의 설계도와 모형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는 공방을 가지게 되었고, 여러 예술 작품을 좋은 조건에 제작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다양한 고전을 수집·탐독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마흔 살이 넘어서 라틴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이 당시 그는 모든 일을 수첩에 기록하곤 하였는데, 그것이 수십 권의'다 빈치의 작업 노트'이다. 그의 관심사였던 회화, 건축, 기계학, 해부학을 망라하는 상당한 분량의 이 기록들은 후세에 깊은 영감과 깨달음을 준 놀라운 아이디어와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걸작 '최후의 만찬'이나 '모나리자'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거대한 작업의 일부분일 뿐이다.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고전을 통한 통찰과 풍부한 상상력, 자유로운 정신을 위한 불굴의 노력이야 말로 우리가 되새겨야할 위대한 유산이 아닐까 생각한다. 

"새털침대에 눕는다고 해서, 양털이불을 덮는다고 해서 명예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명예도 이루지 못하고 자기 삶을 소비해 버린 사람은
이 지구상에 자신의 자취를 전혀 남기지 못한다.
공중에 피어오르는 연기보다도, 물 위에 떠도는 거품보다도,"
   -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베껴 쓴 단테의 「신곡」 '지옥편'중에서

얼마 전 외국 언론을 인용하여 국내의 한 칼럼에 실려 소개된 차베스의 전 대통령의 독서 습관 또한 우리에게 잔잔한 교훈을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카스트로와 차베스는 밤늦도록 독서에 몰입하는 공통된 습관이 있고, 오랫동안 매일 한 번 이상 통화를 해왔다고 한다. 어떤 때는 새벽 3시에 통화하면서 각자 읽고 있는 책이 서로 같은 것임을 확인하는 날도 드물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잠도 자지 않고, 전화로 한 시간 이상이나 그 책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는 것이다.
차베스는 어렸을 적부터 독서광으로 유명했다. 그는 독서를 통해 조국의 아픈 역사를 깨달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 절대 빈곤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문맹퇴치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공부하고 노력하는 지도자의 전형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번의 총선 패배와 두 번의 대선 패배를 하고 난 후 우리 민주당과 소속 의원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벼랑 끝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불운만을 탓하고 있지는 않은가? '폐족으로서 다른 이보다 백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다산의 가르침이나 '아무런 명예도 이루지 못하고 자기 삶을 소비해 버려, 지구상에 자취를 전혀 남기지 못한 사람'이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지적이 뼈아프다.

시련이 닥쳐올수록, 미래가 암울할수록 더욱 더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고전으로 돌아가 역사를 돌이켜보고, 지난 잘못을 반추하며 현실을 분석하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철저한 계획과 행동 강령을 수립해야 한다.

민주당이여 물 위에 떠도는 거품이 될 것인가, 거대한 격랑을 헤쳐 나가는 불굴의 항해사가 될 것인가!
덧붙이는 글 김영환 기자는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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