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에 쓰인 시

성미산탈핵평화도보여행(3)

검토 완료

김명기(nickace)등록 2013.04.27 20:05
25일, 울진에서 영덕으로 넘어와 점심을 먹었다. 해인이의 말처럼 "드디어 울진을 벗어났다!" 마당에선 2, 3명의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미역을 손질하고 있었고 길에는 말리려 내놓은 미역들이 길을 따라 햇볕을 받고 있었다.

울진부터 영덕까지 수백 미터 마다 하나씩 볼 수 있었던 '묘 관리', '이장(移葬)'의 광고문구 사이로 현수막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주민 무시한 한수원 우리는 분노한다(석동청년대책위원회)>, <한수원은 주민분열을 중지하라(영덕군발전위원회)>. 작년 영덕군수는 영덕에 신(新)원전 4호기를 추가로 짓기로 결의했다. 그 과정에서 충분한 주민 의견 수렴이 이루어지지 않았나보다. 성미산에 홍익중고등학교를 짓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처럼. 지역개발이니 경제니 일자리니 하는 것들로 주민들을 찬성과 반대로 찢어 놓았나보다. 여느 (부조리한) 개발공사처럼. 한 장의 현수막에 15 글자 내외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치 시(詩)같다. 현재 중등이 <말과 글> 시간에 읽는.

그런데 조금 더 걷자니 조금 당황스런 글귀들이 나타난다. <영덕군수 및 관계자 일가족은 핵발전소 담벼락 밑에서 살아라>는 현수막을 지나자마자 <노물리 수용 없는 원전건설 결사반대한다(영덕군발전위원회)>를 마주한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 건가. 지금 '노물리' 주민들을 포함한 '영덕군발전위원회' 사람들은 노물리를 '수용'하여 원전을 건설하라는 것인가. 고향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닌 얼른 가져가라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태도. 그리고 이어 나타난 <한수원은 주민생존권 보장하라>와 <한수원 사택・연수원을 영덕천지핵발전소 옆 노물리에 지어라>라는 말.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는 영덕군수를 비난, 저주하는 말과 내 고향을 앗아가거나 원전과 관련된 사업들을 달라는 목소리의 공존. 이것은 모순인가? 아니다.

이건 생존권의 문제다. 사방에서 보이는 묘 관리, 이장 광고에서 연상되듯 영덕을 포함한 농어촌에는 50대 이상의 어르신들만 산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일 하기가 힘드니까 어르신들이 기회비용으로 택한 것이 원자력발전소.(사이다)"이다. "사북에서 탄광 폐쇄하면서 카지노 만든 것(사이다)"처럼 지역 어르신들에게 원전은 환경을 파괴하고 방사능 누출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에너지가 아니라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 상권을 활성화할 수 있는 '복권'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요구 혹은 욕구를 들어주지 않을 바에는 반대할 것이라는. 실제 우리가 점심을 먹은 일경식당의 사장님은 원전반대 현수막에 대해 묻자 "처음에 10개의 요구를 했는데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막상 사업이 들어가자 그 중 2, 3개만 들어준다는 거야. 그래서 주민들이 모여 반대하기 시작했지. 반대하는 이유는 우리의 요구를 다 들어달라는 거지."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에서 관광객은 좋은 풍광을 보며 감탄하지만 그곳이 삶의 터전인 지역 주민들에게 풍광은 일상이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민규동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내 생애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등장인물 중 하나가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지만 다른 이의 삶에선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서울에 사는 우리와 영덕 주민들 사이의 간극은 의외로 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의 도보여행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걷는가. 여행 첫날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그냥 밀양에 가서 10박11일 동안 일을 돕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아니, 그러니까 전환(transition)이다.

덧, 25일 발표된 뉴스에 따르면 노물리, 성리, 매정리 세 개 마을이 주민투표 결과 100% 희망하여 원전건설이 통과되었다. 영덕부군수를 중심으로 한 태스크포스팀(TFT)가 꾸려질 예정이고 노물리에 (주민들의 요구대로) 사택과 연수원 등이 다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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