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많이 추우셨어요?

평생 리어커 배달 아버지, 초라해서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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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ecocinema)등록 2013.05.27 13:59
"세월의 풍파 속에 길들여진 나의 인~생!, 화나도 참는다. 슬퍼도 참는다. 인생은 그런 거야!" 가끔 술 마시면 혼자 읊조리는 노래다. 나는 생각할 것이 많을 때, 또는 익숙한 아픔이거나 익숙해질 아픔이 있을 때 어김없이 걷는다. 작년 이맘때, 종로구 누하동에 있던 사무실에서 중랑구 묵동까지 3시간에 걸쳐 걸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았기에 말이다.

그 때, 나는 햇수로 15년 동안 활동했었던, 시민단체 상근 활동을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민단체 상근 활동가의 심리적 정년인 마흔 다섯이 다가오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했던 가족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싶었었다. 이런 고민은 한 해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홀로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부터 더욱 깊어졌다.

걸음은 어느 덧 종로통과 동대문을 거쳐 예전에 살았던 청량리 시장에 이르렀다. 이곳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어릴적 이곳을 지날 때면 마른 날에도 땅을 쳐다보며 걸어야 했다. 각종 쓰레기에서 나오는 물들이 많아 자칫 한눈을 팔다보면 바짓가랑이가 젖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젖으면 마른 후에도 고약한 냄새가 난다.

예전 생각에 절로 미소가 든다. 그러다 저 멀리 자신의 몸보다 큰 배낭을 메고, 술 한 잔 걸치신 듯 어기적 걷는 초로의 늙은이가 보인다. 남루한 옷에는 여기저기 땟국물이 묻어난다. 너무나 초라하다. 그 모습이 왠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중첩된다.

고향 양평에서 9살부터 머슴 살았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던 해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러곤 공사장 막노동, 공장, 노점상 등 여섯 식구 배를 채우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살았다. 개중에 1톤짜리 드럼통에 담긴 젓갈을 리어카로 배달하는 일이 가장 벌이가 좋았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이 네 명의 자식을 키우려면 아버지는 새벽에 나가서 해가 져야 들어와야 했다.

리어카 배달을 할 때, 아버지는 일명 '갈비신발'이라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는 플라스틱 신발을 신으셨다. 당시 늘 젖어 있는 시장바닥에서는 물에 들어와도 금방 빠져나가는 갈비신발을 신어야 했다. 그 탓에 아버지는 평생 무좀으로 고생하셨다. 무좀은 손으로도 번져, 밤바다 고통스럽게 손발을 비비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고단한 몸을 달래는 데는 소주만한 것이 없었다. 내 아버지 별명이 '두꺼비'인 탓은 그 두꺼비가 그려진 술을 너무도 좋아했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에게는 늘 담배, 술, 땀 냄새와 함께 리어카 배달하면서 흐르는 조개젓, 새우젓 냄새가 났다. 난 그 냄새가 싫었다. 나와 작은형을 새벽녘에 깨워 새우젓 드럼통을 밀게 할 때는 더더욱 싫었다. 술만 드시면 주사를 벌이는 모습도...

환갑이 넘어 힘에 부치면서도 리어카일은 놓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뿐이겄기 때문이다. 그러다 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위의 2/3를 제거하는 수술 이후, 아버지는 조그마한 물건도 움직일 힘도 없게 돼 30년을 끌어온 리어카를 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는 곧잘 아버지가 끌어주는 리어카에 올라타고 세상 왕자가 된 듯 했던, 그 리어카였다.

리어카를 팔고 난 후, 아버지는 하릴없이 집 앞 공터에 걸터앉아 담배를 땡기셨다. 외출 나갔다 들어올라치면 멍하게 하늘만 쳐다보는 아버지가 보였다. 청량리 시장 인근에서 만난 초로의 늙은이에게서 힘없이 하늘만 쳐다보는 초라한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비도 오지 않은 밤, 발 밑으로 물이 떨어져 걷을 수가 없었다.

작년 설에 형제들과 아버지가 잠드신 양평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일정이 꼬여 가지 못했다. 가장 섭섭해 한 것은 홀로되신 어머니다. 그 이후 어머니는 자꾸만 아버지가 꿈에 보인다고 했다. 만날 때마다 이러저런 이유로 싸웠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려면 어제 꿈을 눈에 보이시는 듯 이야기 한다.

그러다 내 꿈에도 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화장실에 쓰려져 있었다. 난 쓰러진 아버지를 누운 채로 내 몸에 실어서 화장실 문턱을 넘으려 했다. 너무나 힘든 나머지 어금니를 꽉 물었더니 이빨이 뿌려지면서 잠에서 깼다. 그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작은형도 아버지를 꿈에서 봤다고 한다.

며칠 후 아버지를 뵈러 갔다. 작은형이 운전하는 차에 어머니는 뒷좌석에서 앉아 보따리를 꼭 쥐고 계셨다. 아버지가 잠든 양평 잣나무 밑에는 녹지 않은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칠순이 넘은 어머니는 눈길을 헤쳐와 아버지 잣나무에 이르러서야 보따리를 푼다. 두꺼운 겨울용 잠바와 내복들이다.

그리곤 함께 가져온 커다란 초롱에 그것들을 넣고 불을 붙인다. 뭐하는 거냐는 아들에 소리에 아무 대구 없이 어머니는 "하나 할아버지, 그렇게 추웠어요?" 하시며 소리죽여 흐느끼신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어머니는 "만 원만 더 주고 좋은 옷으로 살 걸"하시면 아버지에게 미안함 심정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작은형과 나는 침묵했지만, 어머니의 그 소리가 가슴을 바로 때려버린다.

그 날 밤 꿈에 아버지가 보였다. 설날 색동옷 마냥 화려한 옷을 입고, 황비홍이 썼던 작은 썬글라스를 끼셨다. 평생 냄새나는 옷을 입다 어린애마냥 때깔 옷에 멋쟁이 썬글라스까지...비록 내 꿈이지만 아버지는 호강하시는 듯하다.

평생 초라했던 아버지가 왜 이리 보고 싶을까......
덧붙이는 글 나의 아버지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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