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통증을 참을만한가?”

게리와 레베카 그리고 세계에서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펀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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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수(motif1)등록 2013.06.11 15:58

만 10년 전, 노바스코샤의 게리집에서의 게리와 그의 애견 그리고 나 ⓒ 이안수


2003년 6월이었습니다. 저는 130일간의 미국, 캐나다 여행일정에서 막 캐나다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미국 메인 주에서 배에 올라 대서양을 항해해서 닿은 곳은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의 서남쪽 끝, 야머스(Yarmouth)였습니다.

노바스코샤의 서남쪽 작은 항구도시 야머스의 어촌풍경 ⓒ 이안수


사선 방향의 긴 노바스코샤 주의 반도는 해안을 따라 듬성듬성 작은 도시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버스도 그 해안을 따라 하루에 두 차례 오갈뿐이었습니다. 숲속에 크고 작은 호수가 흩뿌려진 내륙과 반대편 해안을 오가는 일은 저처럼 독립여행자에게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습니다.

노바스코샤에 막 발을 디딘 나는 대중교통도 뜨막한 시골마을들을 이 배낭하나로 도대체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에 대해 난감했다. ⓒ 이안수


야머스에서 출발한 버스에 승차한 저는 무작정 루넨버그(Lunenburg)에서 내렸습니다. 독일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18~19세기의 건물들의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습니다.

게리를 처음 만난 루넨버그의 올드시티 항구 ⓒ 이안수


손녀를 위해 반경 80km내의 청소년에게 파티를 연 게리

저는 이 도시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분을 만났습니다. 히치하이크로 만나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고 이 분의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게리(Gerry, 본명 Gerald Moir)씨였습니다.

게리는 틈틈이 나를 유적지로 안내했다. ⓒ 이안수


지리적으로 노바스코샤의 내륙 중심에 위치한 작은 마을 뉴로스(New Ross)에 살고 있는 게리와 함께 지내는 일주일 동안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동네의 구석구석을 보여주고 평생 함께 살아온 이웃들을 차례로 소개해주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게리는 동네사람들이 길가에서 뭔가를 팔고 있으면 꼭 차를 세워 사주곤 했습니다. ⓒ 이안수


활달한 성격의 게리는 의대에 진학하기위한 전단계로 생물학을 전공했습니다. 의사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치밀한 성격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접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비행기 4대로 고객을 뉴욕으로 나르거나 낚시꾼들을 숲속 호수로 데려다 주는 운송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노바스코샤의 불안정한 기상조건은 그 사업의 발전을 막았습니다. 다시 고기잡이배 3척을 구입해 조업에 나섰지만 이미 황폐해진 연근해(沿近海) 어장은 그를 부자로 만들어주지 못했습니다.

1838년 세워진 울프빌(Wolfvill)의 유서 깊은 아카디아 대학(Acadia University). 게리는 이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 이안수


결국 그는 그의 손만 지나가면 무엇이든 바로잡히는 뛰어난 재능을 살려 건축물을 증개축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대학생 때 사랑에 빠져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출산을 하는 대신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입양해 키웠습니다. 3명의 아들은 잘 자라서 각자의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렇지만 딸은 어쩐지 빗나가기만 했습니다. 결국 미혼모가 된뒤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게리가 대학 3학년 때 결혼식을 올린 아카디아대학내의 교회. 게리는 자신이 결혼식을 오린 그 교회의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파경을 얘기했다. ⓒ 이안수


그 딸을 바르게 훈육하지 못했다는 자괴심이 그의 멍에가 되었습니다. 그를 더욱 안타깝게 한 것은 그 딸의 딸이었습니다. 손녀는 알코올 중독자 엄마와 살면서 학교도 가려고하지 않았습니다.   

게리는 그 손녀라도 엄마로부터 격리해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따분하고 심심한 할아버지 집으로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게리는 하나의 묘안을 생각했습니다. 

뉴로스의 고등학교교장선생님께 사정을 말하고 손녀를 데려오는데 성공하면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별한 보살핌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리고 반경 40km 내의 마을들에 방(榜)을 붙였습니다.  

무료 파티 초대

16세에서 120세에 해당하는 모든 청소년들을 파티에 초대합니다. 함께 모여서 이야기와 놀이를 즐기면서 함께 휴식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을 가지고자합니다. 모든 음식과 음료는 무제한 무료로 제공됩니다.  

일시 | 0월 0일
장소 | 뉴로스 레베카의 정원  

리베카의 할아버지 제럴드 모어


그 파티에 노바스코샤 중부지방의 청소년들 200여명이 게리의 집에 운집했습니다. 바로 그 파티에 맞추어 손녀 레베카(Rebecca)를 데려왔고 그날 밤 파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약속했습니다. 레베카가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이곳에서 학교에 다닌다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기마다 이런 파티를 열어주겠다는…….  

레베카는 할아버지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늦은 오후, 제가 처음 게리집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집 주위에 빈병들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키 큰 처녀가 아직 잠이 묻어있는 표정으로 게리와 나를 맞았습니다.

게리가 말했습니다.  

"그제가 바로 레베카의 학기가 끝나는 날이었고 어제 레베카와 레베카의 친구들을 위한 파티의 날이었어. 100여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모였었지. 레베카는 아침에 잠들었다가 지금 일어난 거야."  

뒤죽박죽인 집과 정원의 모습이 할아버지와 손녀간의 약속이행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뉴로스에 있던 게리의 집. 이 넓은 잔디밭 정원에서 200명씩의 파티를 했다. ⓒ 이안수


전날 밤 파티의 잔해인 병들을 수거하고 있는 게리 ⓒ 이안수


게리는 종종 손녀에 대한 든든한 신뢰를 말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반인데 방학을 맞아 켄트빌(Kentville)의 한 스포츠용품점에서 일하고 있어. 사장에게 들은 얘긴데 레베카가 판매 성적이 아주 좋다더군. 손님들의 특성을 파악해 그에 맞는 제안을 하는데 손님들의 반응이 아주 좋다는 거야."  

게리는 집에서 40km나 되는 켄트빌의 가게로 나를 데려가 레베카가 근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레베카의 변화와 적응을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켄트빌의 스포츠용품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던 고등학생의 레베카 ⓒ 이안수


저는 뉴펀들랜드와 래브라도를 도는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점점 더 오지로 들어가는 모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지극한 사랑을 아끼지 않는 게리의 나라이었으므로…….

나는 게리의 집에서 내집처럼 편안했다. 나는 그곳에서 글을 쓰고 다음 여행 계획을 세우곤 했다. 내가 뉴펀들랜드와 래브라도 나아갈 여행 계획을 세울 때는 옆에서 조언을 하다가도 내가 글을 쓰기시작하면 졸린다며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습니다. 내게 방해가 되지 않고자 하는 세심함이었다. ⓒ 이안수


게리는 내가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내 무릎위에 올라와 있는 고양이를 보고 놀라워했다. 이 고양이는 성격이 까칠해서 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는 이 두 동물이 나를 따르는 것을 보고 내 천성을 짐작했다고 메일로 얘기했다. 동물은 천부적으로 선과 악을 분멸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 이안수


레베카의 혼전 임신과 출산  

한국에 돌아오고도 게리와의 우정은 계속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친구 안수,  

난 지난주 뉴로스에 갔었다네. 너와 로스농장(Ross Farm)을 함께 방문했던 그 추억은 우리의 행복한 우정을 다시 생각나게 했어. ('Ross Farm'은 뉴로스 가까이에 있는 개척민 시절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큰 농장으로 민속촌 같은 곳입니다. 당시 게리는 저를 이곳에 데려가 마차로 구석구석 안내하며 노바스코샤의 초창기 개척시대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우정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우리를 친구로 이끈 것은 일종의 영적인 힘이었던 거야. 아주 짧은 시간에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하고 신뢰하는 친구중의 한사람이 된 거야. 너와 네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내가 망설일 일이란 하나도 없어.

너는 친구로서 큰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고 레베카 또한 너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네가 다시 캐나다로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단다. 너뿐만 아니라 네 가족도 항상 환영이라는 것 알고 있지. 단순히 환영이 아니라 네가 다시 방문한다는 것은 내게 전율처럼 짜릿한 일이 될 거야. 캐나다에 네가 기댈 수 있는 한 친구가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줘.

레베카와 나는 너와 네 가족에게 사랑을 보낸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다시 우리를 방문해주길 바래. 

언제나 영원한 네 친구
제럴드
 
레베카가 혼전 임신을 하고 출산을 했다는 것도 우회적으로 얘기했습니다.

로스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동네사람들이었고 게리의 친구들이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가 로스팜의 구석구석을 마차로 안내했다. ⓒ 이안수


내 동생에게,  

난 캐나다의 다른 도시로 옮겼다. 앨버타주의 에드먼턴(Edmonton)이라는 곳으로 노바스코샤에는 이렇게 큰 도시가 없어. 사실 이 도시는 노바스코샤 주 전 인구의 두 배쯤 되는 도시이지. 내 아들도 방문할 겸 왔지만 몇 개월 이곳에서 일을 해 볼까싶다. 이곳은 유류산업이 발달해서 캐나다의 어떤 지역보다도 돈이 벌리는 도시이거든. 몇 개월 일한 뒤에 난 노바스코샤로 되돌아 갈 거야. 평화롭고 조용한 그곳으로…….  

레베카는 딸을 얻었어. 안젤리카라는 이름을 지었단다. 나와 에드먼턴에 함께 왔다가 이곳에서 자동차로 4시간쯤 걸리는 곳에 있는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갔어.   

나는 이곳에 침실이 3개인 타운하우스를 임차했어. 그러니 너와 네 가족이 이곳에 온다고 해도 머물 공간이 충분하단다.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을 거야. 그립다. 자연의 성품을 닮은 네가……. 내가 혈육 같은 형제를 얻었으니 축복받은 거지. 또한 네 가족도 내 가족으로 여긴다. 사랑과 온정으로 너와 네 가족을 생각하고 있다.   

안녕.

제럴드로 부터
 
저는 레베카의 혼전임신과 출산, 그리고 고향 노바스코사도, 할아버지 게리가 있는 에드먼턴도 아닌 곳에 살고 있다는 안젤리카의 아빠가 궁금하고 불안했습니다.

게리, 황혼에 숙녀를 만나다  

제가 모티프원을 건축하고 또한 춘천에서 여러 목공작업을 하는 중에 게리와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헤이리로 이사 온 직후 연락을 했습니다. 다행히 바로 답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의 소중한 형제, 안수에게.   

나는 네 메일을 받고 하도 기뻐서 거의 울 번했단다. 나는 너에 대해 정말 큰 걱정을 했었거든. 여러 번 편지를 보냈었고, 답장이 없어서 네게 어떤 잘못된 일이라도 일어난 것은 아닌지 두려웠단다. 오늘 네 메일은 내게 천국으로부터 온 선물이었단다. 나는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안젤리카는 이제 2살이 되었다. 나는 에드먼턴에서 2년간의 생활을 끝내고 이번 크리스마스에 임박해서 노바스코샤로 되돌아 왔고 뉴로스에 새로운 집을 임대했단다. 내가 에드먼턴에 있을 때, 뉴로스의 뒷길에 접한 17 에이커의 산림을 구입했고, 그 숲에서 장차 큰 나무들을 솎아 벌목한 다음 제재소에 팔 예정이다. 하지만 이곳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아직 그 땅에 접근 조차 할 수 없단다. 그렇지만 곧 길이 열릴 테고 그 숲에서 나는 한동안 머물 예정이란다.   

바로 어제 나는 운전 중에 'Ross Farm'를 지나치면서 학교의 어린이들을 태우고 있는 말과 마차를 보았지. 그때 바로 네 생각이 났었단다.   

에드먼턴에 있는 동안 나는 조신한 한 일본 숙녀를 만났다. 그녀는 캐나다에서 태어난 일본계 이민 2세란다. 사실 그녀는 현재 일본을 방문 중이지. 그녀의 아들이 일본에서는 아주 유명한 하키선수이고 얼마 전에는 한국으로 원정경기도 갔었다고 한다(캐나다에서 아이스하키는 국기國技이며 가장 있기 있는 스포츠입니다). 내 연인의 이름은 와키코이고 그녀는 멋지고 친절한 사람이다. 나는 항상 일본인들은 대단히 잔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녀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한 숙녀야. 그녀와는 이번 여름에 결혼을 할 것 같아. 아마 너와 너의 처는 여기로 와야 할 거야. 그리고 우리의 이 결혼식의 일원이 되어주어야 해. 나의 특별한 형제로서 네가 함께한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낄 거야.   

도대체 네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거야? 내 기억으로는 네가 새로운 집을 지었다고 했지? 그럼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거야? 네 처와 딸은 잘 있고? 아마 아이들이 더 있다고 했었지?  

네 편지는 나를 감동케 했고 나는 이 순간 영광스럽고 최고로 행복하단다. 우리 북미에서는 이럴 때 이런 말을 쓰지. 'Made my day(운수대통한 날)'이라고. fp베카에게 너로부터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전하면 정말 기뻐 흥분할 거야.   

진실한 그리고 변함없는 너의 캐나다 형제,
제럴드로 부터.

게리는 대학재학중에 한 결혼이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게리의 말을 들어보면 젊은 혈기가 우선했던 그 시절에 아마 부부로 함께 사는 것의 의무들에 대해 크게 고민 없이 결혼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혼이 끝나고도 게리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사업에 바빴고 결혼이라는 테두리에 다시 구속되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구속되어도 좋을 배필을 다시 만나지 못했겠지요. 그런데 에드먼턴에 있는 동안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났다는 겁니다. 단지 몇 개월 돈을 벌고 한적한 노바스코샤로 돌아가겠다던 게리가 2년을 그곳에서 살았던 이유가 짐작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후반기를 함께할 믿음직한 동행을 만났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뉴로스에 제법 큰 땅을 산 것으로 보아 에드먼턴에서의 사업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게리는 다시 에드먼턴으로 돌아갔을 거라 추측했습니다. 만약 와키코가 노바스코샤로 오지 않았다면...

마약에 중독된 레베카, 딸을 입양기관에 뺏기고...

 
다시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게리의 전화도, 이메일도 허사였습니다. 그 실종을 다시 찾아준 것은 레베카였습니다.  

내 형제 안수에게,  

내 컴퓨터가 망가지고, 그곳에 저장되어있던 모든 정보를 잃고 나서 나는 어떡해든 네 이메일 주소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네. 나는 그제 레베카에게 그 사실을 말했고, 그녀는 페이스북에서 자네를 찾아볼 것을 권했네.   

마침내 자네를 찾았고 이렇게 행복할 수 있네. 자네의 우정은 정말 내게 소중해. 자네는 내 영혼에 지워질 수 없는 감명을 남겼고, 나는 자네가 방문했던 행복한 기억으로 즐거울 수 있다네.   

이 편지는 자네의 메일이 유효한지를 확인하기위한 테스트메일이네.   

자네의 답변을 기다리네.  

캐나다의 자네 형제
게리로부터

레베카가 페이스북을 통해 저를 찾아낸 것입니다. 게리와는 끊겼던 길이 복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간에 있었던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레베카의 이야기도 함께…….

안수에게 

나는 종종 자네를 생각했네. 그리고 다시는 자네 소식을 듣지 못할까 그리고 보지 못할까 걱정했다네. 나는 자네의 행방을 되찾을 수 있는 여러 묘안을 생각해보았지만 모두가 허사였어. 내가 좀 더 일찍 페이스북을 생각했었어야하는데 말이야. 하지만 난 컴퓨터의 여러 기능에 익숙하진 않거든.  

자네와 연락이 끊어진 뒤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네. 일부는 좋은 일이고 또 일부는 나쁜 일이지.  

나는 노바스코샤에서 5000km쯤 떨어진 에드먼턴에서 2년 동안 일했지. 그때 안젤리카의 아버지는 마약을 거래하고 있었고 아마 레베카도 그 때문에 마약에 빠진 것 같아. 손자는 마약에 중독되었고 수사기관에서 손자의 집으로 들이닥쳐서 안젤리카를 데려간 거야. 내가 이 사실을 알고 레베카를 돕기 위해 즉시 노바스코샤로 돌아왔지. 슬프게도 여러 차례의 법정 심리 끝에 정부기관에서는 안젤리카를 입양기관에 맡기도록 결정한 거야. 그리고 안젤리카가 성인이 되어 친모를 다시 찾기 전까지 우리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어. 레베카와 나는 이 일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지. 나는 안젤리카의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 그러나 법정이 나는 점점 고령이 되어가고 있음으로 안젤리카를 돌볼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어. 그래서 수천달러의 변호사비용만 날리고 무위로 돌아갔어.

나는 지난여름 여러 명의 종업원을 두고 레베카와 함께 체스터(Chester)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었어.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나는 다시 건축 일을 시작했네. 나는 뉴로스의 옛집을 지나칠 때마다 너를 생각하고 너와 함께했던 그 멋진 시간을 추억한단다. 나는 네가 이곳에 와서 한 1년쯤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네 가족과 함께. 

내 노트북에 네게 보낼 사진이 한 장 있군. 그것은 직원과 함께 찍은 사진이네. 그리고 레베카 사진도 한 장 보낼게. 

내 여자친구 와키코는 지금 일본에 있고 일본에 큰 비극이 일어났을 때도 줄곧 일본에 있었어. 유명한 하키선수인 그녀의 아들은 계약이 끝나므로 이제 다른 팀을 찾아보고 있어. 한국팀하고도 접촉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 그는 에드먼턴에서 자랐고 일본 스카우트가 그의 경기를 보고 그를 영입한 거였어. 그의 계약조건에 따라 와키코는 매년 플레이오프 경기에 초대됐지. 그래서 지금 그녀는 일본에 간 거야. 일본의 지진해일의 비극을 보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구나.

또한 시리아사태도 걱정이 되네. 혹시 중국과 러시아가 끼어들어서 큰 전쟁으로 비화될까 두려워서 미국이 관여 안했으면 좋겠구먼.  

너와 네 아내 그리고 딸들에게 나의 사랑과 기원을 보낸다. 넌 참 특별한 사람이야.   

레베카 또한 그녀의 사랑을 보내고 네 가정의 행복을 기원한다네. 그녀로부터 방금 전화가 왔어. 네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하니 그녀 또한 들뜬 마음이라는 거야.  

네게 형제의 사랑을 보낸다.

게리와 레베카로 부터

나는 무엇보다도 레베카가 자신의 엄마 인생을 답습한 것에 대해 안타까웠습니다. 그 상황을 애끊는 아픔으로 수습해야할 게리의 입장이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제가 뉴로스를 떠나기전 게리는 노바스코샤의 가장 유니크한 곳을 보여주겠다며 북부해안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은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가장 큰 곳으로 밀물과 썰물의 수위 차가 16m나 된다는 펀디 만( Bay of Fundy)이었습니다.  

항구에 매어진 배는 하루에 해발 16m를 오르내립니다.

16m 높이의 조수간만의 차를 만들어 내는 펀디만(Baie de Fundy)의 핸츠포트(Hantsport) ⓒ 이안수


썰물이 나가서 육지가 된 넓은 갯벌을 함께 걸었습니다. 몇 시간 뒤면 다시 바다 속이 될 곳이었습니다.

썰물 때면 넓은 자갈밭 바닥을 드러냈다. ⓒ 이안수


게리의 긴 사연을 읽고 레베카의 삶이 바로 그 펀디만의 조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레베카보다 레베카와 게리의 슬픔에 동화된 제 마음을 먼저 위로할 말을 찾아야했습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통증이다. 레베카는 단지 인생의 간조와 만조의 차이가 남들보다 큰 것뿐이야."

레베카, 네 할아버지를 배워라

게리를 만난 지 만 10년째 되는 날(6월 5일), 다시 게리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형제에게, 

네가 잘지네고 행복한 모습을 보니 정말 좋구나. 네 사진들을 보니 우리가 노바스코샤 특히 뉴로스에서 함께 지낸 시간들이 생각나 감상적인 마음이 되는구나.  

레베카와 나는 아나폴리스밸리(Annapolis Valley)에 있는 윈저(Windsor)라는 곳에 살고 있어. 뉴로스에서는 30분, 핼리팩스(Halifax)에서도 30분 거리에 있지. 나는 여전히 건축 도급일을 하고 있어. 레베카의 페이스북에서 보아서 알겠지만 말이야.  

오늘 우리집 이웃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한 숙녀를 만났어. 그녀의 이름은 은경. 한국에서 온 분이야. 멋진 사람이지. 예쁘기도 하고. 하하하... 

가족은 어때? 네 건강은 좋아 보이네. 난 너와 네 가족 모두가 우리를 방문해주었으면 좋겠어. 함께 본다면 정말 행복할거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친구들 중에서 넌 정말 특별해.  

몸조심하고. 

캐나다의 네 형제
게리로부터
 
이번에는 와키코의 얘기는 빠져있었습니다. 10년 전 게리를 처음 만났을 때의 평화롭고 자신감에 넘치던 게리에게 약간은 가을 기운이 느껴지긴 하지만 뉴로스에서의 평화로움은 되찾은듯해서 다행입니다.   

저는 레베카가 드문드문 올린 페이스북에서의 사진들에서 게리가 제게 말하기를 아낀 부분들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레베카가 어디로 입양되었는지를 알 수 없는 안젤리카에 대한 그리움들 그리고 게리의 사진 두어 장이 있었습니다. 지붕위에서 페인트칠을 하는 모습의 사진에는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그리고 레베카가 중장비를 조작하는 사진이 있고 몰타르를 바르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레스토랑의 경영에서 실패한 후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자신이 가장 잘하는 건축기술을 전수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리가 직접 롤러를 잡은 모습이며 레베카가 오버올을 입은 채 시멘트 반죽을 바르는 사진에 저의 신경을 스치는 통증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펀디만은 여전히 세계의 모든 강물의 양에 상응하는 엄청난 해수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들고 나겠지만 게리의 온유한 심성은 인생의 치명적인 통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수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안개 속을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안개 너머에 무엇이 준비되어있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리가 안개 낀 펀디만의 썰물로 바닥을 드러낸 자갈밭을 걷고 있다. 낯선 나를 형제로 대하고 내게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곳을 보여주겠다면 데리고간 펀디만의 물빠진 해안이다. 몇시간 뒤에는 세계의 모든 강물의 양에 상응하는 엄청난 해수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이 자갈밭을 덮을 것이다. ⓒ 이안수


인생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통렬한 슬픔과 통증 그리고 여러 모순조차도 사랑할만한 것임을 아는 자일 것입니다.  

내 친구 게리와 레베카의 기복(起伏)과 평온을 통해서 나도 인생의 비밀에 한 치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캐나다의 내형제, 게리! 그리고 레베카! 네 할아버지가 네게 어떤 심정일지 난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할아버지의 그 마음이 네게 용기일수 있겠지. 나도 네게 네 할아버지의 그 마음이란다. 사람들은 미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죽음을 근심하듯 삶을 근심해라. 잘사는 삶은 내 일신과 내 혈육만 잘 근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상대편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태도와 관점일 것이다. 이것은 네 할아버지가 지난 10년간에 걸쳐 내게 실천했던 것을 네게 말로 한 것뿐이야. 부디 네 할아버지처럼 새로운 날들을 맞아라. 안젤리카는 꼭 네게 돌아올 거야."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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