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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 표트르 대제와 예카트리나 대제, 문인 푸쉬킨과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음악가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무소르크스키. 러시아 인물치고 뻬쩨르부르그를 거쳐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 뻬쩨르부르그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1703년 만들어졌다.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약 200년간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이제 300년을 조금 넘긴 도시에 굴곡이 많다.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이전하고, 이름은 페트로그라드(뻬뜨로그라드, 1914-1924)가 되었다 레닌그라드(1924-1991)가 되었다 1991년 다시 싼크뜨-뻬쩨르부르그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1990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런데 부인, 러시아어로는 '뻬쩨르부르그'이고 영어로는 '세인트 피터스버그'라고 부르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라고 부르는 겁니까?"
쌤도 이상했나 보다. 열심히 찾아본다.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독일어 발음이라고 합니다. 도시를 만든 표트르 대제가 독일을 좋아해 이름까지 독일식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도시 이름이 페트로그라드로 바뀐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애국적인 열기가 높아지며 러시아식 이름인 페트로그라드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2013년 5월의 봄, 모스크바에서 뻬쩨르부르그까지 기차를 타고 8시간만에 도착한 길을 1837년 5월의 봄, 15살의 한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마차를 타고 와야 했다. 모스크바와 뻬쩨르부르그를 잇는 열차는 10년 뒤에야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그 소년은 도스또예프스끼였다. 육군 공병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그는 많은 시간을 뻬쩨르부르그에서 보낸다. 그가 말년까지 살며 위대한 작품,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의 형제>를 쓴 곳도 바로 뻬쩨르부르그였다. 1881년 1월 그는 폐동맥 파열로 숨을 거둔다. 그가 마지막 살던 집은 지금 그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 바실리예프스키 섬 차르 표트르 대제가 처음 도시를 조성하기 시작한 곳이다. ⓒ 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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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뻬쩨르부르그에서 죽었다. 그는 도시의 작가였다. 가려진 도시의 시야처럼 그의 시야는 협소했지만 심도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병적일 정도로. 나는 <죄와 벌>을 읽으며 압도되었다. 이런 책은 없었다. 샘은 "작가가 사람 죽인 적 있는거 아니냐"고, "사람 한 번 죽여보지 않고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냐"며 몸소리쳤다. 차마 하권을 집을 수가 없다 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흔적은 뻬쩨르부르그에 많이 남아 있다. 죄와 벌의 배경이 되었던 라스꼴리니꼬프(주인공)가 살던 집, 센나야 광장, 다리,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가 살았던 집(지금은 도스또예프스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이 있다.
"부인 도스또예프스끼 박물관에 가고 싶습니다."
"내일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오늘 가고 싶습니다."
나는 쌤을 졸랐다. 그날(5월 9일)은 러시아 승전기념일이었다. 네프스끼 대로를 따라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도스또예프스끼역이 나오고 그의 이름을 딴 호텔이 보였다. 광장에 동상이 하나 서있다. 도스또예프스끼였다. 동상 앞에는 꽃이 놓여 있다. 박물관은 바로 근처다. 문이 닫혀 있다. 문을 밀어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벨을 눌렀다. 숙소가 그러하듯 부저와 함께 문이 덜컥 열릴 것을 기대했으나 사람 목소리만 들려왔다.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내일 오세요."
그래 다음날 다시 갔다. 이정도의 끈기는 있는 남자다.
▲ 도스또예프스끼 박물관 승전 기념일이라 문이 닫혀있다. ⓒ 윤진
▲ 도스또예프스끼 동상 그의 동상 앞에는 헌화가 끊이지 않는다. ⓒ 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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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밝히지만 나는 도끼빠(도스또예프스끼 팔로워)이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볼 수 없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집을 굳이 찾아가고, 센나야 광장을 몇 번 걷고, 박물관도 두 번이나 찾아갔다. 다녀와서는 E.H.카가 쓴 <도프또예프스끼 평전>을 다시 읽고 있다. 감회가 남다르다. 그가 쓴 집에 대한 묘사는 조금 더 시각적으로 잡히는 듯하다.
도스또예프스끼가 태어난 집은 그의 아우나 누이동생과 마찬가지로 병원 부속의 아파트로서, 현관, 식당, 응접실, 부엌으로 이뤄졌다. 현관의 창이 없는 구석 쪽을 판자로 막아서 큰 아이 두 명의 침실로 쓰고 식당은 놀이터 겸 공부방으로 썼다.
<죄와 벌>은 장면은 보다 선명하다.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질 무렵, S골목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죄와 벌의 첫 대목. 청년은 '라스꼴리니꼬프'다. 그의 작은 방, 그가 걸었을 거리, K다리의 풍경이 그려진다. 내가 뻬쩨르부르그를 다녀온 보람을 가장 크게 느끼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으리란 기대.
박물관은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볼만한 곳이다. 이곳은 작가가 죽기 전 <까라마조프의 형제>를 마지막 작품으로 쓴 곳이기도 하다. 뜻 깊다. 지금 그곳은 모든 것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다. 집에서 그의 광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더이상 살아있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둡고 오래된 가구와 벽지에서 음습함이 느껴진다.
박물관을 돌아본 쌤이 말한다.
"남편, 도스또예프스끼 서재 멋지지 않습니까? 내가 우리집 서재를 그렇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서재는 까맣게 되었다. 이게 다 도스또예프스끼 때문이다.
▲ 도스또예프스끼의 서재 서재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이다. ⓒ 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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