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씨의 고향 '파평산'에 오르다

파평윤씨의 성지 '파평산'을 찾아서

검토 완료

윤도균(ydk3953)등록 2013.08.04 18:27

파평윤씨의 성지라 일컫는 "용연"을 종친들과 먼저 한 바퀴 돌아보며 파평윤씨 유래에 대해 알아본다. ⓒ 윤도균


내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마산리 '파평산' 기슭인데 6.25전쟁으로 7살 때 고향을 떠나 지금은 인천에 살며 건강을 위한 취미 생활로 시간만 나면 등산을 즐기는 자칭 산악인 인데도 정작 내'성씨(파평윤가)의 고향인 파평산엘 올라 보지 못하고 선등 하신 많은 산악인들의 산행기만 읽다 보니 의외로 많은 분들이 파평산 정상에 주둔한 군부대가 길을 막아 우회로를 찾다 죽도록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가 맘에 걸린다. 

그러다 보니 겁 많은 사람이라 파평산 산행을 도전도 해보지 않고 지레 겁을 먹고 부담을 느끼던 중 며칠 전 문중 조카와 종친회 업무를 보고 이야기 중에 조카가 휴가 중이란 소리를 듣고 특별한 계획 없으면 함께 '파평산'에 한번 오르자고 제안하니 조카도 흔쾌히 동의해 내친김에 손아래 동생과 우리 집안 대부뻘 되는 어른께 연락해 함께 파평산엘 오르기 약속하고,

2013년 8월 1일. 목요일 오전 8시 수도권 전철 '구일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안산에 사는 조카의 승용차편으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휴가철임에도 불구 뻥 뚫린 자유 로를 한 시간 남짓 달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 노리 385-1번지에 소재한 "파평윤씨의 성지 용연"에 도착 '용연'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곳곳에 파평윤씨 각파 문중에서 무질서하게 세워 놓은 비가 눈에 거슬린다. 차라리 일정한 장소를 물색해 한 곳에 비석 동산을 조성 했으면 하는 건의를 후손의 한 사람 입장에서 드리고 싶다.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많은 성씨에서 선조와 관련하여 특정 동, 식물을 먹지 않고 기피하는 성씨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파평윤씨는 잉어"를 먹지 않는데 그 이유는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893~973)과 윤관장군"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그로인해 고희가 된 나도 지금까지 잉어는 먹지 않는다.

이 용연에 그 옛날 어느날 옥함이 떠 오른것을 빨래하러 왔던 할머니께서 옥함을 건저 뚜껑을 여니 그곳에 옥동자가 있었고 그 옥동자가 파평윤씨의 시조가 되셨다는 설화가 있다. 그래서 파평윤씨는 이곳을 성지로 알고 전국 파평윤씨들이 이곳을 찾는것을 기쁨으로 안다. ⓒ 윤도균


이날 우리 일행이 산행을 한 파평산 산행 지도이다. ⓒ 윤도균


"전설에 따르면 '용연'에는 용인이 살았는데 연못이 불결해지면 뇌성이 진동하고 폭풍우가 쳤다고 전해지는 전설과 시조(始祖)에 관한 전설로 신라 진 성왕 7년 (서기 983년) 음력 8월 15일 용연 주위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요란한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용연에 한 개의 옥함이 떠올랐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고을 태수에게 고해 태수가 연못에 와보니, 용연 연못에 떠오른 옥함이 연못 가운데로 밀려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질녘 연못가에 빨래하러 왔던 한 노파가 옥함이 다시 떠오른 것을 보고 건져 내어 열어보니 그 옥함 속에 오색의 우모(羽毛)에 쌓인 어린 사내 아기가 있었는데, 찬연한 서기를 발하면서 옥함에서 나온 사내 아기는 융준용안(隆準龍顔)으로 코가 우뚝하여 용의 상을 닮았으며, 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가 있어 일월(日月)을 상징하고 좌우 겨드랑이에는 비늘이 81개가 돋아 있었으며,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의 형상과 같았고 온 몸에는 광채가 솟아 눈을 부시게 하였으니 이 아기가 파평윤씨의 시조가 되셨다고 전해온다. <파평윤씨 대동보 자료 참고 작성> 

용연을 돌아보고 우리는 파평산 산행을 위하여 이동해 '덕천교' 채 못 미쳐 '봉영사'입구에서 산행을 시작 꼬불꼬불 이어지는 자동차 도로를 따라 오르니 '봉영사'가 나오는데  사찰엔 일체 사람 그림자도 볼 수 없어 확인하니 봉영사는 지금 한창 수리중이라'대웅전 현판도 떼어내고 불상'도 다 철거해 텅텅 빈 사찰이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6.25 전쟁 전후에도 이곳'봉영사'에 오셔서 '국가의 안전과 우리가족 만수무강을 위해 치성'을 드리셨다는 사찰이라 모처럼 온 김에 지금은 하늘에 계신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 기리며 기도라도 드리고 가려 했는데 ……. 발길을 돌려 다시 산행을 시작하는 등산로는 군 작전도로로 이어지는데,

파평산 오름길에 만난 '봉영사' 그런데 이곳 사찰은 지금 개축중이다. 그 옛날 나의 어머니께서도 이곳 봉영사에 열심히 다니시며 치성을 올리시던 사찰이다. ⓒ 윤도균


아주 작은 군사 작전용 통신시설 같은데 영락없는 모형 장남감 같다. ⓒ 윤도균


내 욕심 같아선 좌측으로 난 가파르게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빡센 산행을 하고 싶지만 일행 중 문중에서 최고로 항렬이 높으시고 74세 연세로 나에겐 대부뻘 되시는 어르신을 모시고 오르는 산행이라 내 욕심 보다는 대부를 안전하게 모시고 파평산 정상을 오르는 것에 더 의미가 있어 아쉬움을 접고 군사 도로를 따라 느림보 산 거북이가 되어 느릿느릿 오른다.  

"파평산은 파평윤씨 시조(始祖)이신 태사공께서 파평산 아래 사시면서 학문과 무예를 닦으셨는데 파평산 마루에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을 닦고 궁마 훈련을 하시며 이곳을 '치마대'라 이름을 지으셨으며 태사공께서 기마술 연습을 하시다 애마가 죽자 이를 가엾이 여겨 작은 철마를 만들어 두었는데 후일 어떤 철공이 그것을 훔쳐 갔다 즉사 했고, 그때 함께 갔던 사람이 두려운 생각에 흙으로 구운 작은 말을 가져다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태사공께서 학문을 닦으시던 금강사도 지금은 사지만이 남아 있다. 태사공께서는 파주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경을 내왕 하실 적에 공이 강을 건너실 때면 항상 강물이 갈라지며 홀연히 백사장이 드러나 신발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 다니셨고, 송도에 있는 조정에 출사 하신 뒤에도 말을 타고 파평면에 있는 사저에서 강너머로 내왕 하시는데 말의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 강을 건널 때에는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고 하여 이를 두고 이곳을 '물결을 끊고 마시듯이 강을 건넌다. 하여 여음진(如飮津)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음진(飮津)으로 고쳤는데 이것이 다시 후세에 음이 변하여 임진강이 되었다고 전한다. <파평윤씨 대동보 자료 참고 작성> 

평소 나에 산행 스타일은 항상 남들 보다 한 발 앞서 선두 산행을 하는 사람인데 이날은 맨 뒤에서 "운동이라곤 골프" 외 다른 것은 안 해봤다는 조카와 함께 오르는데 산행 시작하고 겨우 1시간 정도 되었는데 땀을 유달리 많이 흘리며 힘들어 하던 조카가  팔각정을 불과 800여 미터 남겨두고 "아저씨 이제 전 더 이상 못 갑니다" 하며 기권을 하고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야구공은 아닙니다. 버섯인데 영락없는 야구공 닮았네요. ⓒ 윤도균


이곳은 6.25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 제1호 입니다. 인근에 팔각정 정자도 있고 6.25때 이곳의 전투의 전투가 얼마나 심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 윤도균


그런 조카를 더 붙잡지 못한 이유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따라 파주지방 기온이 올 여름 들어 최고 기온이라 자칫 무리해서 사고라도 날것을 염려해 더 붙잡지 못하고 조카를 내려 보내고 나 홀로 서둘러 바쁘게 오르는데 어럽쇼! 이번엔 앞서 먼저 올라갔던 동생이 '허겁지겁'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 카메라를 잃어 버렸다며 줄행랑치듯 달려 내려간다.

그 사이 나는 팔각정 '평화의 쉼터 6.25전사자 유해발굴 지역1호'에 도착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파평산 정상 (실제로 파평산 정상은 군부대 주둔)을 오르는데 이어지는 무성한 숲길은 각종 야생화가 싱그럽게 만발하고 햇빛 한 조각 쏟아져 내릴 틈도 없는 수목 사이로 불어오는 파랗게 싱그러운 바람이 가슴을 파고드는데 그 달콤함이란? 아마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아마 나는 그 맛 때문에 산을 즐겨 찾는지도 모른다.

숲길도 지나고 군 작전용 헬기장도 지나니 마지막 완만하게 이어지는 통나무 계단 길을 앞서가는 두 사람이 오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저 언덕만 오르면 파평산 정상인데 그곳엔 정자 전망대가 우리를 반겨 정자에 배낭을 두고 파평산 주능선에 올라 조망을 살피는데 주능선 왼편으론 파주시 천현면 곰시 방향 조망이 한 눈에 들어오고 깎아지른 기암절경이 현기증을 느끼게 할 정도다.

청명한날 같았으면 이곳 전망대에서 임진강 건너 북녘땅'개성 시와 송악산,덕물산'도 시원스럽게 조망할 수 있을 텐데, 박무 현상으로 조망이 완전 꽝이다 . 그러는 사이 카메라 찾으러 간 동생이 다행히 카메라를 찾아들고 돌아와 우리는 정자에서 어젯밤 냉동실에 꽁꽁 얼려 신문지 둘둘 말아 짊어지고 온 시원한 맥주를 한 잔 가득히 따라 한 잔하고 나니 어쩌면 그렇게 시원 하던지…….꿀맛도 저리가라 할 정도다.

멀리 파평산 정상이 보이는데 저곳은 군주둔 지역이라 파평산 정산에는 오를 수 없다. ⓒ 윤도균


하산길에 만난 약수터인데 물이 홀홀하고 상쾌한 기분이 든다. ⓒ 윤도균


이어서 곧 하산 길에 들어 오를 때와 달리 팔각정 정자에 내려서 "약수터, 소나무쉼터, 사방댐" 방향으로 하산을 하다. 잠시 약수터에서 휴식을 취하며 물한 모금 마시고 내려서는데 좌측 계곡에서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실 폭포 소리에 마치 뭣에 홀린 사람처럼 따라가 실례고, 체면이고 다 집어 치우고 사람부터 살려야 갰다는 생각에 흠뻑 땀에 젖은 옷을 훌훌 벗어 바위에 던져 놓고 풍덩 계곡물에 몸을 담가 "알 탕" 한판 하고 났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분명 그 옛날 어린 시절 내가 읽은 "선녀와 나무꾼" 전설에는 선녀가 목욕하는 사이 나무꾼이 옷을 감추는 바람에 꼼짝없이 선녀가 나무꾼의 아내가 되어 아들딸 낳고 살았는데 이곳 파평산 선녀님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나무꾼 만나 천년만년 살고 지내시는지 "내 벗어놓은 옷"이 없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그대로다.ㅋㅋㅋ 만약 파평산 선녀님이 내 옷을 집어 갔으면 "내 팔자도 달라졌을 것이고, 압박과 설 음속에 40여년 받아온 도영할 망구박"도 잊고 살 수 있었을 텐데…….

괜스레 허황된 개꿈 꾸다 깨어나니 급한 화가 온다. "아저씨 왜 이렇게 안내려 오시는 거야요" 하는 조카의 전화다 그 바람에 시원한 알 탕한 것 무색하게 영락없이 북한군 1.24군 부대 방불케 뛰어 내려와 '임진강폭포' 인근 덕천 교에서 "내 성씨의 고향 파평산" 산행을 모두 마치고 조카가 안내한 '메기 매운탕' 집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저녁을 먹고 서둘러 귀가를 한다.

하산 완료 지점 인근에 알알이 익어가는 참께밭 풍경이다. ⓒ 윤도균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