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갈등은 합리적인가

노인은 왜 쓰레기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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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슬기(kingka8789)등록 2013.09.10 19:42
새로운 것이 존중받는 시대이다. 우리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가 되어야 하고 그 '신분'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촌스러운 사람으로 전락하게 되고 가치 없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 전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젊은 사람은 새로운 것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다. 반면 늙은 사람은 새로운 것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젊은 사람은 늙은 사람보다 더 값어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된다. 우리는 지금 모더니티 사회(새로움을 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모더니티 사회에서는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메일 보내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어머니와 그것도 모르느냐며 짜증을 내는 자녀, PPT 강의자료를 항상 제자에게 부탁해야만 하는 노교수의 모습이 그렇다.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무시하기도 한다. 노인들의 훈계에 대들거나 힘으로 제압하려는 청소년들의 모습, 특정신문만 본다고 그들을 외면하는 청년들의 시선들은 이제 익숙하다. 작년부터 '세대갈등'이 우리 사회 균열의 한 축이 되었지만, 새로움만이 가치 있는 사회에서 이는 예정된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냉소적 관점에서 말하면, 현재의 공공재정 문제를 보건대 일하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모두 죽는 편이 낫다." (Richard Liscia, 파리) 벤야민이 초창기 자본주의의 수도라고 말했던 파리에서 공식적으로 회자하는 이야기인 점에서 이 표현은 더 날카롭다. 파리의 노화문제 연구위원회 보고서에도 비슷한 맥락의 가슴 아픈 표현이 있다. "정치적, 심리적으로 노화는 보수주의, 습관에 대한 집착, 이동성의 약화, 현대사회의 변화에 대한 부적응 등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21세기에 노인은 한마디로 쓰레기다. 돈을 벌지도 못하면서, 돈 먹는 존재로 기능한다. 느리고 답답하다. 빠른 현대사회에 적응도 하지 못하니 그냥 죽는 편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노동은 생산적인 노동과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는 생산적인 노동만 의미를 가진다. 생산적인 노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비용'일 뿐이다. 노인들이 손자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거나 여가를 즐기는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일이다. 그들도 젊었을 때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깊은 고독뿐이다. 이제는 어린 녀석들에게 경험담 한번 말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종로 어느 공원에서 한나절 바둑이나 두다 조용히 흩어질 뿐이다. 가끔은 혼자 살던 노인의 시신을 몇 개월 뒤에 이웃이 발견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렇다면 새로움에 빨리 적응하는 청년들은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청년들도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기성세대가 가진 것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느낀다. 청년들은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 가질 것도 별로 없어 보인다. 어른들을 측은하게 볼 여유도 이유도 없다. 노인들은 괜히 보수정당에다 투표해서 기득권층의 배만 불려주는 답답한 존재로 보일 뿐이다. 이따금 낡은 가치관으로 훈계나 하는 꽉 막힌 퇴물로 인식된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지 못해서 답답한 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더 세금을 내야 한다니 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2012년 대선에서 세대갈등은 키워드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전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 이제 붕괴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이제는 '경험의 축적'이 존중받는 사회가 아니라는 뜻이다. 서로서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불필요하다. 서로 노는 공간도 다르고, 보는 매체도 다르다. 세대갈등이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명쾌한 진리인 것처럼 떠들고 다닐 때 거기에 이의 제기를 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젊은 층과 노년층이 서로 외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서로의 차이점을 계속 부각하며 분노를 증폭시킬 때 누군가는 기뻐하고 있다. 세대가 서로 대립할 때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굴까?

첫 번째로는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노년층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다. 그들은 노인들에게 따뜻하다. 여러 민주인사나 야권 인사들이 변절(?)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일단 대접해준다. 젊은 시절 꿈을 불태웠던 공간에서 퇴물로 전락하는 비참한 경험을 통해 더는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이 사회의 주인공이 아님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곳으로 가고 싶기 마련이다. 지금의 세대갈등을 지속한다면 노년층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장기 집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정당은 세대갈등을 계속 증폭시킬 것이다. 지역갈등을 이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로는 기뻐하는 사람들은 재벌들이다. 2~30대들은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치유하는데 어떠한 방법을 사용할까? 과연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부모나 조부모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할까? 이들은 삶이 팍팍해질수록 거대자본에 의존하게 된다. 끊임없이 대기업의 물건들을 소비한다. 신상품을 소비해야 하고, 대기업이 만든 공간에서 화려함을 즐겨야 한다. 좀 더 화려하고 멋진 것에 돈을 쓰며 스트레스를 없앤다. 할머니의 경험 섞인 한마디보다 대기업 임원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 새로움을 소비들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나이 든 사람이라고 무시하며 묘한 희열마저 느낀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 고은 시인은 '무릎 걷어 올리고'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겉 늙은이야 가자/ 겨우 마흔 살에 에헴 하면 암이나 걸린다/ 가자 진수렁길 무릎 걷어 올리고 마른 길은 맨발로 가자/.../ 가자 모든 책 찢어버리고 가자/ 그동안 거짓과 권위와 책은 하나였다/.../ 가자 여든 살 지팡이 짚고 가자/ 닐리리 어린이가 되어가자/ 청년이자 꿈의 당원으로 한 패거리로 가자' 고은 시인은 어른들에게 권위를 버리라고 말한다. 무게 잡고 '에헴' 할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되어 청년들과 한 패거리가 되자(연대하자)고 말한다.  어른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내려놓고,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세대갈등은 자본주의와 우리 사회 기득권층이 만들고 증폭시키는 문제점이지 '우리의 미래'가 아니다.

좋은 사회는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사회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사회이다. 요즘은 남녀마저 대립해 싸우고 있다. 국민들이 서로 미워할 때 나쁜 지도자들만 승리하는 세상이다.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이 수많은 국민을 분열시켜 억압하며 지배하고 있다. 더는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았으면 한다. 억지로 노인을 공경할 필요는 없다. 생산성의 유무가 아닌 그냥 한 '인간'으로 측은하게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이면 된다. 세대갈등이 우리를 갉아먹고 있다는 자각만 있으면 된다. 노인은 타인이 아니다. 미래의 나의 모습이다. 노인의 자리는 우리가 곧 앉게 될 자리다. 노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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