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선생님에서 담탱이로

교권 붕괴는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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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슬기(kingka8789)등록 2013.09.16 14:05
아이들이 교사에게 대든다. 교권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엄청난 문제로 규정한다. 교사의 권한과 학생의 권리가 충돌할 때 일반적으로 교사의 권한을 강화해야 교육이 실현된다고 본다. 교권회복으로 인해 문제를 덮는 것이 교실의 평화라고 착각한다. 이런 생각 밑바닥에는 교사가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중요한 역할이라는 고려는 없다. 무시무시한 경쟁을 뚫고 철밥통에 안착한 교사가 누려야 할 마땅한 보상이며, 좀 더 거시적으로는 약자를 강자의 입맛에 맞게 길러내야 한다는 기득권 논리이다. 본질적으로 일제치하 당시 일제가 조선인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명제를 실천했던 것과 같다. 교사가 칼을 차고 아이들에게 권력자에게 복종하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과 같다. 군부독재 시절 교실에서 시작해 군대와 회사를 거치며 복종의 문화를 주입하던 원리와 같다.

대부분 사람은 군부독재 시절의 교육은 지금처럼 망가지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교사가 제대로 교실의 질서를 잡았고, 부모가 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아도 교육이 잘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교권이 무너져 부모가 간섭해야 하고, 또 부모가 개입하니까 교권이 붕괴한다. 몇몇 아이들이 교사에게 대드는 모습을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중계하며 마녀사냥 하다 보면 버릇없는 몇몇 아이들의 문제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교육과 그 당시 교육의 문제는 정도와 모습의 차이일 뿐 본질은 같다. 학생들은 교육의 객체라는 점이 본질이다. 학생들은 항상 수동적인 존재이며, 통제의 대상일 뿐이다. 군부독재 당시엔 부모가 개입하지 않아도 명문고에 보내면 아이들은 쥐고 흔들어 경쟁에서 승리시켜줄 교사가 있으니 교권의 남용도 용납되었던 것이고, 지금은 부모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해서 자식을 어른들의 입맛대로 길러내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이를 부모로부터 분리할 필요가 있다. 루소는 '에밀'에서 자녀에게 부모의 영향력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소의 이런 주장은 자신의 아픈 경험에서부터 나오는 통찰이다. 루소는 자신의 자녀를 제대로 돌볼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녀를 보육원에 맡기게 된다. 자녀의 교육을 각 가정이 담당할 때 자녀는 부자와 빈자의 격차를 그대로 떠안게 된다. 부자는 부유한 교육을 받고 빈자는 교육의 기회를 상실한다. 부자와 빈자가 자녀를 통해 대리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가 지난 우리 사회에서 빈부격차는 그대로 성적격차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루소의 통찰은 지금 우리에게 유효하다. 루소는 자녀를 부모로부터 떼어내어 공동탁아를 하자고 주장한다. 교육 영역에서의 공공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생계형 교사가 아닌 사명감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한국의 교사들은 생계형 교사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아직 가부장적인 질서지만 여성들에게 맞벌이가 요구되는 열악한 임금구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있다. 맞벌이와 육아를 동시에 감당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직업으로서의 교사, 즉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을 둘 다 수행하는 여성에 가장 합당한 지점에 교사라는 직업이 서 있다. 그래서일까, 학생들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 교육자가 된 '스승'을 찾기는 힘들다. 학생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고 교권의 붕괴만을 힘들다고 부르짖는 월급쟁이들만 교단을 지키고 있다. 잘못된 일이라고 느끼더라도 조용히 타협하고 사는 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 부모들의 자녀를 통한 대리 출세욕구와 교사들의 사명감 없는 모습 사이에서 아이들은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질서에 익숙한 존재로 길러진다.

한국 교육의 또 다른 문제가 지나친 경쟁이라고 한다. 지나친 경쟁은 교육의 주도권이 개별적으로 분산되어서 생기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부모가 교육에 너무 많이 개입한다는 뜻이다. 자식이 경쟁에서 승리해야 그 부모도 수혜를 보기 때문이다. 교육의 주도권이 각 가정으로 분산되어 있을 때 교육이라는 사회화는 언제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내 자녀가 옆집 자녀보다 공부를 못할 때 결코 기뻐할 수 없는 교육구조 속에서 학생들은 공감능력이나 이타심을 배울 기회를 상실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 없이 수직적인 질서에서 윗자리를 선점하는 능력만을 선호한다.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의 모습은 군대에서 상관과 부하, 기업에서의 상사와 부하의 모습과 비슷하다.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1등을 했을 때 우리는 더 좋은 상급자에게 선택받는 것만이 목표가 된다.

우리는 루소의 에밀을 통해 해답에 접근해볼 수 있다. 교육에서 부모의 영향력을 배제해야 한다. 사명감 있는 교사에게 교육을 양도해야 한다. 내 아이를 위한다는 생각에서 부자의 자녀와 빈자의 자녀 혹은 고아가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루소가 공동탁아를 주장하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얼마나 공공성을 많이 확보하는가에 따라 현 교육의 문제 해결 여부도 결정된다. 사실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가정교사를 두거나 스승과 숙식을 해결하며 부모의 영향력을 배제하여 사명감 있는 교사, 즉 스승에게 교육을 맡기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를 교육의 객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로 만드는 것, 이 사회에서 힘없고 약한 들러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 권력자나 자본가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표현할 수 있는 시민으로 만드는 교육이 필요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말한다. "공공성이란 동일한 규칙에 지배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상이한 규칙을 가진 타자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우리는 민주사회 공공성의 회복을 통해서 교실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성적이 아닌 다른 가치들로 아이들을 존중한다면, 생각이나 모습이 조금 다른 아이들도 그 교실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옆 친구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으로 연결되는 구조에서 벗어난다면, 왕따나 학교폭력 혹은 성적 비관으로 인한 자살도 줄어들 것이다. 교권의 회복이 무엇일까? 아이들을 다시 무섭게 억압하는 것? 집이나 학원에서 억눌려 있는 아이들을 교실에서도 억압하는 것? 우리는 아이들이 담임선생님에게서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대드는 모습을 통해 아이들의 고통을 봐야 한다. 총리까지 하셨던 어떤 '교수'의 말대로 교육이 '부진아를 솎아내는 과정'일 것인지 아니면 아이가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과정일 것인지 묻는다면 누구나 후자를 택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전자에 더 익숙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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