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궁과 역사속의 유언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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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만(youmany)등록 2013.10.30 10:10
        연희궁 (延禧宮)과 역사 속의 유언비어

조선 명종대에 홍계관(洪季寬)이라는 유명한 점술가가 있었다. 맹인이었던 이 사람의 명성이 장안에 워낙 자자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일부 서민, 아녀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차츰 장안의 이름 있는 부잣집이나 행세하는 시전 상인, 고급 관리들까지 단골로 삼았다고 한다.

홍계관에 관한 기록은 차상찬씨의 '명복 홍계관'을 비롯해서 저작권 위원회 간행의 동명 소설이 있고, 김형광 지음 '이야기 조선야사' 등에 비교적 풍부한 사료가 존재한다. 그런 기록들을 살펴보면 한양 장교방 (현 무교동) 에 있는 홍계관의 집 앞은 점을 치러 오는 사람들로 늘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나와 있다. 장차 형조판서가 될 사람을 미리 알려주는 등 벼슬길에 대한 예언도 정확하게 맞았다는 소문이 있어서 시정의 명성을 얻었다고 했다.

나중에는 어떤 사안에 관하여는 조정의 발표보다 계관의 말을 더 믿어버리는 이상한 풍조까지 생겼다니 일개 점쟁이로서는 대단한 영향력이었던 것 같다. 요즘에도 선거철만 되면 일부 역술인들의 예언이 「대권의 향방을 말한다」 「차기 대권은 누구에게?」등 흥미위주의 시선을 끄는 제목으로 포장되어 종종 주간지 지면을 장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용을 보면 결과를 분명하게 예측하기보다는 "소인이 가고 대인이 온다. 동쪽이 밝으나, 서쪽은 아직 미명이다" 이런 식으로 누가 되더라도 피해갈수 있게 두루뭉실하게 되어 있어 천기누설은커녕 독자들의 감질만 나게 만들고 있다.

현대사회는 언론이 발달하고 각종 여론조사가 활성화되어서 이런 종류의 경박한 예언이 비록 한때 언론을 장식하다 해도 그저 흥밋거리 일 뿐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현혹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선거를 앞두고 점술가, 역술인등의 경박한 발언이 있더라도 이로 인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는 없지만, 공개된 사회적 정보망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문제가 좀 심각했던 모양이다. 너무나 유명해진 것이 오히려 그의 신상에 탈이 날 조짐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했던가? 소문을 들은 왕이 그를 보고자 했다. 처음에는 하도 용하다니까 당신의 신수나 물어볼 단순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국의 왕 쯤 되면 누구를 만나든 이것은 이미 공적인 일로로 국가적인 사무가 된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시작된 일이 논의 과정에서 확대되었다. 조정에서는 왕이 일개 시정의 복자를 만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로 갑론을박이 이어지다가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일부 고관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자체에 그를 혹세무민의 죄를 물어 처벌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

곡절 끝에 왕의 뜻대로 계관을 궁에 들였으나, 이때는 이미 조정의 분위기는 처음 왕의 뜻과는 상관없이 처벌의 꼬투리를 잡자는 쪽이 대세였다. 자기 운수가 다 한 줄도 모른 이 불운한 사나이는 정중한 초대 대신에 왕 앞에 불려와 졸지에 시험을 당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왕 앞에 놓인 검은 천에 싸인 상자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맞추라는 다소 황당한 시험이었다. 그는 어찌어찌해서 안에 든 것이 쥐인 것을 맞추었다고 한다. 곧이어 마릿수까지 맞혀 보라는 짓궂은 질문을 받게 된다. 이것은 실물을 맞출 것을 예상한 '처벌 주장파'의 함정이었다.

이 때 계관은 일곱 마리라고 아뢴다. 상자를 열어보니 암수 두 마리의 쥐가 있을 뿐이었다. 두 마리를 일곱 마리라고 잘못 아룀으로서 '기군망상'의 죄를 짓게 되는 계관,
얄팍한 재주로 백성을 호도한 혹세무민의 죄와 왕을 속인 기군망상의 죄는 죄질이 엄청나게 다르다. 혹세무민의 죄는 대상이 일반 백성이기에 경우에 따라 죽지 않아도 되는 죄였지만, 왕을 속인 죄는 절대 왕권의 군주 사회에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오직 죽음으로 밖에 대신할 수 없는 죄였다. 그것은 이미 왕의 뜻과는 상관없이 계관이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의미였다. 그것 보라는 듯이 들고 일어 난 대신들의 주장에 떠밀려 계관의 처형을 승인하게 된 왕.

바로 이 장면에서 연희동이 등장한다. 왕은 자신의 호기심으로 인하여 별다른 죄가 없는 불쌍한 맹인 한 사람을 처형하게 된 것이 몹시 개운치 않았다. 마음이 심란하여 좀 일찍 침소에 든 왕에게 전해진 소식은 몸이 연약한 탓에 성 밖 풍광 좋은 연희동에 따로 나가 살던 둘째 공주에게 태기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병약한 공주의 임신 소식으로 기뻐하던 중에 무언가 필(Feel)을 받은 왕은 내관을 시켜 문제의 그 쥐를 다시 살펴보게 하였다. 결국 그 중 암컷의 쥐가 임신 중이었고, 배를 갈라 확인 해보니 놀랍게도 새끼 다섯 마리를 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께름칙했던 왕은 뒤늦게 형장으로 선전관을 급파하여 계관이 무죄하니 방면하라 했으나, 이미 처형된 뒤였다. 이 때 계관이 처형된 장소가 지금의 워커힐 뒷산인 아차산이었다고 한다. 일부 인터넷에는 이 때 특사를 전달하는 선전관이 아차! 한발 늦었다면서 탄식한 것을 일러 이후에 산 이름을 아차산으로 개명했다고 되어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박은식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이미 삼국시대 고구려 평강왕 때 온달장군이 한수지역에 고구려의 군사적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신라와 싸우다 아차산성에서 전사했음을 기록하므로서 아차산이라는 이름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었음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훗날 계관을 흠모하던 점술가 동류들이 이 산의 본래 이름이 아차산인 것을 이용하여 계관을 띄우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당시 공주님이 살았던 연희동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고양현 소속이었다가 일제시대에 한성부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연희동은 궁궐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야말로 산자수명한 마을이었다. 좌로는 안산이 있어 사철 좋은 풍광이 병풍처럼 마을 뒤로 펼쳐지고 북한산에서 흐르는 맑은 홍제천 시냇물이 마을을 감싸 흘렀다. 마을의 배후와 오른쪽은 해병대산으로 이어지는 궁동근린공원을 이루는 제법 높직한 언덕이 겨울철 차가운 바람을 막아 마을을 포근하게 해주었다. 요양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고, 고급 주택지로 훌륭한 곳이었다.

1968년 성산로가 개통되면서 연희 IC를 통하여 시내와의 교통이 더욱 편리해진 연희동은 고급 주택지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서울시내 유수의 고급 주택지로 발전을 거듭했다. 이후 연희동은 이곳과 조금 떨어진 평창동, 북아현동과 함께 서울시내 최고의 고급 주택가로 손꼽히면서 재계 인사 등 돈 많고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렇게 부자들이 모여 살며 지극히 평화롭던 연희동에 어쩌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과 노태우(盧泰禹) 전 대통령 등 5, 6공의 주역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연희동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유언비어를 생산하는 현장으로 등장했다. 이곳 연희동을 진원지로 또는 최종 종착점으로 하는 온갖 유언비어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떠돌면서 수 십년간을 우리를 불안케 해 왔던가.
불과 얼마 전까지도 대학생들과 재야단체에서 '전ㆍ이 부부 체포결사대'를 조직, 이곳의 대통령 사저를 경비하는 전투경찰대와 서로 밀고 밀리던 정황이 뉴스 시간에 자주 등장했었다. 최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저격을 소재로 한 영화 '26년' 이 개봉되기도 했다.
수백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유언비어라는 후진 사회의 지극히 상징적이고도 공통적인 사회 현상으로 나타난 연희동의 운명을 생각해 본다. 정보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때 정보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리고 반드시 그것은 부작용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역사는 퇴보하며, 그로 인한 피해는 온 국민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알수록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두렵고 떨려야 하는 것이다. 살기 좋은 마을 연희동이 앞으로는 정치 사회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평화로운 마을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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