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을 자주 접하지 못하는 한국인에게 흑인 사진 여러 장을 준다. 사진을 잠시 보게 한 뒤에 사진 중에 한 사람이 실제로 등장한다. 그리고 몇 번째 사진이었는지 기억해내는 실험을 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익숙하지 않은 다른 인종을 구분해보라고 하면 잘 구분해내지 못하고 금방 얼굴을 잊어버린다. 흑인이 한국인을 봐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다른 인종을 구분하는데 시각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만약 이 한국인이 흑인 마을에 가서 오래 산 뒤에 실험을 다시 하면 시각이 발달하게 되어 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미술관에 처음 가본 사람은 미술품이 왜 의미가 있는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지 못하고 지루해한다. 그러나 자주 미술을 접하고 거기에 대해서 익숙해지면 감각이 발달한다. 그러면 그것이 왜 가치가 있고 왜 아름다운지에 대해서 서서히 눈뜨게 된다. 인간 감각의 발달은 시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각뿐 아니라 인간의 감각이란 모두 이렇다. 따라서 기성세대가 요즘 나오는 노래를 정신없다고 생각하거나, 대중가요만 듣는 사람이 클래식을 그저 따분한 음악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접하지 못한 음악을 느낄만한 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충분히 느끼고 나서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주 접하다 보면 그만큼 감각을 통해 느끼는 예술성 즉 감성이 풍부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감성이 풍부하지 못하다. 경험하기보단 그냥 지식을 채워가는 것이 익숙하다. 감성적인 것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근대사회의 이분법이 철칙으로 작용한다. 성인이 될 때까지 다양한 예술 활동을 접하거나 감성을 느껴보는 경험을 박탈당한다. 성적이나 경제력에 의해 우열을 가리는데 익숙할 뿐, 크게 슬프거나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면 모두가 무표정으로 앉아 있고, 어쩌다가 감정 표현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천박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경멸의 눈길을 보내곤 한다. 느낄 필요가 없다. 그저 어디론가 좀비처럼 달려갈 뿐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감성이 바닥난 사회다. 7~80년대만 해도 음악차트는 거의 모두 다른 장르의 곡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나라의 음악들을 즐기는 팬들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2013년 음악차트는 거의 다 비슷비슷한 곡으로 구성된다.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쓴다지만 한국은 다양한 나라들의 노래를 얼마나 들을까? 아무리 생활세계가 식민화되어 다양성과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현대사회라지만 우리의 획일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각자가 개성이라고 주장하는 것마저도 조금만 물러서서 보면 '모방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미술관에서 흥미를 느끼고 관람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미술관에 왔다는 인증 촬영과 입장권 수집이 더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곱게 차려입고 예술의 전당에서 조는 불청객들이 즐비하며, 그런 것은 그냥 사치일 뿐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된다. 예술이 발달하기도 힘든 구조이며, 예술에 대한 투자도 별로 없고, 예술마저도 돈으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국민들은 자연히 감성을 증폭해볼 기회가 없다. 서점에 가도 '돈을 많이 버는 방법' 혹은 '나의 몸값을 올리는 방법'에 대한 책이 수없이 쏟아져 메인 코너를 채우기 바쁘다. 경쟁해서 살아남아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최우선인 사회, 즉 아직도 산업시대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이다. 60년대 유럽이 이미 걷기 시작한 탈물질주의 사회를 한국은 아직도 구경조차 못 했다. 따라서 한국은 기본적으로 '즐기고 싶은 사람 (감성이 풍부해지고 싶은 사람)'이 '그러지 못하게 억누르는 사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경쟁하는 사회)'에 제압당한다. 다양한 감성에 대해 느끼지 못하는 감성의 불구들로 채워지게 된다. 삼포시대라고 한다. 연애, 결혼, 출산의 공통점은 사랑이다. 인간의 존재 이유인 사랑조차 포기하게 한다. 느끼지 못하는 삶의 결과는 전 세계 최상위를 기록하는 자살률과 최하위를 기록하는 행복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코패스를 향해 가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현재가 (경쟁으로 가득 차있는 등의 이유로) 억압적이어서 미래가 어두운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가능성이 없다. 동시에 집단적으로 새로운 미래의 출현을 위해 살아갈 가능성도 없다. 미래에 대한 현실적인 설계는 현재를 충실하게 직면하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충분히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만이 건설적인 미래를 꿈꾼다.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충분히 향유한다면 그것을 위해 달려간다. 행복은 거기서 느낄 수 있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지금과 같은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그렇지만 현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토피아적인 미래에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포기나 주술적인 조급함에) 자신을 버려준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열심히 하다가 찾아오는 성공이 아니라 주술적인 것 - 예를 들면 젊은 층의 로또나 스포츠 토토 열풍 - 에 의한 집착만이 남게 된다. 여러 가지 핑계들로 포장한 돈을 따라간다. 감성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타인의 삶이나 아픔보다는 돈이 중요하다고 믿는 기업환경에서는 사이코패스들만 성공할 수 있다. 사이코패스들이 가장 많이 있는 직업군은 CEO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이코패스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들을 향해 간다. 심지어 백수들조차 CEO들을 걱정하거나 혹은 CEO들이 해야 하는 걱정들을 하고 살아간다. 강자가 약자를 때려도, 누군가의 권리가 박탈당하고, 온갖 부정한 일들이 저질러져도 그러려니 넘어가는 것이 익숙하다. 느껴지지 않으면 분노하지 않는다. 우리의 꿈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이코패스를 닮아가고 그들을 흉내 내서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회복해야 하는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국영수 위주의 교육도 바꿔야 하고, 경제력에 비해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이나 부족한 문화 공간도 문제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철이 없거나 천박하다고 보는 시선도 바꿔야 하고, 심리나 정신 상담을 특수한 사람들만의 일상으로 치부하는 시선도 바꿔야 한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감정을 넣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삶의 주인이다. 자신 삶의 주인이 아닌 사람은 언제나 감정을 참거나 없애야 한다. 강자만이 자신의 감정을 증폭한다. 표현을 바꾸면 국민 개개인이 모두 주인인 사회에서는 감정이 충만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억압되어 있다면 우리의 감정은 불필요한 것이 되어 버린다. 자본이 주인인 사회에서는 경제성장률만이 중요하다. 경제성장률이 3%에서 4%로 올라도 국민들은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 경제성장률보다 행복성장률이 중요한 사회가 필요하다. 많이 느끼면 더 행복해진다. #사이코패스 #행복 #감성 #예술 #민주주의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