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이고 직설적인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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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terriya)등록 2014.01.25 15:40
요즘 뜨거운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다. 영화는 정보 자체로도 흥행력을 보증한다. 사랑이라는 소재와, 파격적인 19금의 징조, 퀴어물이라는 장르의 희귀성, 프랑스 탑 여배우들과 주목받는 감독. 거기에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의 보증수표까지 달고 나온 이 영화를 많은 영화광들이 손꼽아 기다렸다. 그래서 다행히도(?) 무삭제 개봉에, 정상적인 제목과 포스터를 유지하고 관객을 맞이할 수 있었다. 현재 누적관객이 '다양성'영화에서는 1위를 차지한다고.

영화관에 들어갔을 때, 생각보다 관객이 많았다. 그리고 상당히 야하다. 80퍼센트 이상이 노출이다. 3시간 동안 몰입하면서 보는데 옆에 앉은 여자가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담컨대 나 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 역시 울고 있었다.

이 영화 진짜 슬프구나.

영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유연애가 자연스럽게 사회에 자리 잡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타나는 가장 평범한 단계를 묘사한다. 엠마와 아델이라는 두 여자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다가,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시작할 때 불타오르다가 점점 하향을 그리는 곡선이 게이라고 다를까. 국내에도 잊을 만 하면 계절마다 등장하는 활용도가 높은 소재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떻게 사람들을 울릴까?

생각보다 영화는 둘의 관계를 깊이 그리지 않는다. 성관계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부분에서도 그들의 간절한 사랑이 표현되지는 않는다. 아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둘은 동거에 들어가지만, 일상적인 부분은 전혀 비추어지지 않는다. 미래와 감정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드러나지 않는다. 동성애라는 소재도 무색해질 정도로 드러나지 못한다. 오히려 감정의 비율은 영화 중반 이후, 이별하고 몇 년이 흘러도 혼자만 발동하는 아델의 집착에 쏠려있다. 그때부터 이 영화를 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델이 집에서 스파게티를 먹거나, 입을 벌리고 쿨쿨 자는 장면은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데 비하여, 엠마와의 키스장면은 굉장히 로맨틱한 영상이다. 화면 중앙에서 태양이 막 반짝거린다. 이어져 고전명화를 연상케 한다는 파격 정사장면도 두 백인의 하얀 살과 곡선만 부각되어, 마치 현대식 정신병원에 온 것처럼 눈부시다. 도대체 누가 처음해본 섹스를 그렇게 아름답게, 능숙하게 한단 말인가.
아델의 고등학생으로의 삶은 철저하게 건조해서 잔인할 정도이다. 반면 엠마와의 만남은 운명처럼 매끄럽고 사실이 아닌 마치 영화처럼 진행된다.        

설정된 배경의 억지스러운 부분도 고의성이 농후하다. 순수미술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가장 세련된 현대예술의 중심에 있는 학생들이 에곤쉴레나 클림트를 논한다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 게다가 뮤즈에 대한 발언같은 것들이 굉장히 단순하고 유아적이다. 엠마가 그리는 그림까지 심지어 심각하다. 자기가 데리고 살던 모든 여자들을 그려놓고 전시하다니.

엠마와 아델의 각 집안배경이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도 억지스럽다. 노동계급과 엘리트를 칼같이 나누어, 생계 걱정 없는 딸내미만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다니면서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한다는 것도 무리수가 있다. 지식인 가정의 표본으로 등장하는 엠마의 부모님이, 아델의 '선생이 되어 교육을 전파하겠다'는 신성한 노동윤리에 질문을 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없었다. 딸의 게이정신을 환영하는 부모라면 저녁식사 자리에서 쉽게 지적 계급의 논리를 드러낼 리가 없다. 상징적인 역할이라면 말이다.

따라서 이런 허구성이 있는 장면들이 합쳐져 어떤 결론을 유도해 나간다. 그것은 바로 영화가 의도적으로 아델의 시선만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아델의 관점으로 스토리를 밟아갈 뿐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 모두 의도적으로 아델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도 상당부분이 기억에 의존해 있다.
여기서 아델은 18살 고등학생이고, 엠마는 24살쯤은 되는 대학졸업을 앞둔 미대생이다. 둘은 환경, 집안, 외모, 성격 모든 것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세대 차이가 극심하다. 무엇보다 엠마는 평범한 아델과 다르게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서 또래보다 성숙한 인격체로 분류될 수 있다. 따라서 둘관계의 시점이 아델에게 맞추어졌을 경우, 제3자의 눈에는 당연히 아직 미성숙한 아델의 표식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뮤즈, 계급성, 흑백논리 등의 아델만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로 반영된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이 아델의 환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 많다. 시간의 흐름이 그렇다. 마치 한 개인의 꿈이나, 한낮의 기억처럼 각 조각들이 매우 단절되어 있다. 눈을 뜨면 2년이 지나가 있고, 강렬한 경험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왜 아델인가?>

영화에는 정사씬을 제외하고 엠마의 어떤 표정도 자세히 촬영한 부분이 없다. 따라서 엠마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묘사는 없는 셈이다. 헤어질 때 소리를 지르며 꺼지라는 엠마의 표정은 따질 것도 없게 중립적으로 보인다. 본래 그것을 원했던 것인지, 정말 아델의 외도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반면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 집에서 뒹굴 때도, 깊은 관계 속에서도 아델만큼은 어떤 집단과 타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정체성을 갖는다. 관계란 반드시 같이 해야만 하는 것인데 아델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애초에 영화는 엠마의 머리에 파란물을 들이고, 성적 정체성과 개성있는 스타일을 선사하여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지만, 결국 우리는 아델의 눈을 통해서만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아델의 눈은 그런걸 보고 있지 않다. 그게 문제다.  

여러 장면에서 그 점이 드러난다. 아델은 혼자 자위를 할 때 각종 감정에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아델은 엠마와 관계를 가질 때도 같은 표정으로 눈물을 흘린다. 혼자와 둘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아델은 미국영화를 좋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현실적인 소녀다. 그 후 엠마와 몇 년을 동거했지만 아델은 엠마의 진보적인 성향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방식으로 엠마의 지인들에게 파티를 열어주는데 정성을 퍼붓고, 그저 격렬한 스킨십을 원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어떻게 사람이 누군가와 섞여 사는데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하는 것이 없을까. 아델은 엠마가 자신보다 뛰어나고 주목받아도 질투하지 않는다. 그녀가 속한 다른 세계, 곧 예술과 정치 등에 대한 호기심이나 경계심 또한 없다. 레즈비언 사회에 들어가서도 아델의 외모는 변하지 않는다. 그들처럼 머리를 자르거나, 피어싱을 하는 등의 외적 코드도 갖지 않는다. 아델이 엠마를 진정으로 의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결국 아델은 헤어진 후에 가끔 혼자 오열할 때를 빼놓고는, 열심히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간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셈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고통스러워한다. 그렇다고 영화가 아델이 그렇게 강하고 묵묵한 인간인 것을 찍자고 하는 바는 아닌 듯 하다. 다시 돌아가면, 이 영화는 사랑영화다.

<차이면 고통스럽고, 사랑하면 행복하다>

영화는 원초적인 사랑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사랑은 물론 주고받는 것이고, 아닐 경우 스토킹이지만, 연애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사랑은 문화적인 차이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사랑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델이 엠마에게 원하는 것이 지적 대리만족도, 정서적 공감도 아니라는 것. 아델은 성적 접촉을 가장 중요시 한다. 엠마는 아델의 인생관에 은근슬쩍 관여하지만, 아델은 엠마에게 키스만을 원할 뿐이다. 솔직히 아델은 엠마가 그런 외모만 유지한다면, 예술가든 백수든 아무 상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 다시 만나서도 아델은 가장 그리웠던 것이 몸을 섞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델은 엠마를 붙잡으려 할 때도, 설득하거나 계획을 세우는 대신 몸으로 표현한다. 관계의 시작 역시 엠마의 외적 이미지를 향한 꿈 속의 상상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델이 기존 여성에 대한 편견에 비해 얼마나 육체적인 인간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점은 영화 전반 내내 강조되는데, 18세 소녀의 식욕과 수면욕이 성욕과 사랑으로 전환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그려진다.
오히려 그러한 아델의 극단적인 동물성에 엠마가 다름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런 설정이 훨씬 익숙하고, 관객들 입장에서는 경험해 본적이 많지 않을까 싶다.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서 도입부분. 수업시간에 아델의 반이 공부하는 책은 '마리안의 일생'으로, 프랑스 미완소설이다. 이 소설은 영문으로 번역하면 'Life of Adele'로, 영화의 원제이며 오마쥬이기도 하다. 11권이나 되도 끝나지 못한 18세기 풍속소설이 영화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수업 도중 문학선생이 지시한다.

<나는 여자이고 이건 내 이야기다> 이 문장에서, '나는 여자이고'까지가 사실이고, '이건 내이야기'는 '너'의 이야기라고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읽어봐라.

영화가 관객들에게 바라는 것은 공감이었고, 나아가 영화적 체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섹스신이든, 게이이야기든 남녀노소 누구나 강렬함을 느끼게끔 아주 치밀하게 잘 짜여진 수작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사람들의 공감 뿐 아니라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영화다. 흔한 방식의 멜로는 아니지만 매우 보편적인 코드를 가지고 있고, 굉장히 직설적이다.
솔직히 자위를 하며 느끼는 낯선 감정에 눈물을 흘리는 사춘기를 거쳐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첫사랑과 함께 찾아오는 성적 긴장감, 그 둘을 누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랑을 잃었을 때 본능적으로 두렵고 고통스러워서 벌벌 떨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아주 쉽고 단순한 얘기다. 누구보다 가깝지만, 가장 먼 사람이 되는 것이 전남친/전여친이고, 가장 인생에 영향을 많이 주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은 모순적이고, 제목처럼 파랑이 가장 따뜻한 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억울하게 망하고 끝나도, 털털 털린 자기의 마음은 그 기억만이 채운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이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골목을 혼자 걸어가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자신을 보지 않을까 싶다. 자기 자신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각자의 사랑의 깊이가 진실되게 느껴졌다. 그런 진실성을 잘 살려낸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도 정말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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