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어쩌다 '열폭'의 대상이 됐나

발렌타인데이를 점령한 '안중근' 현상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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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슬(ruthy)등록 2014.02.15 15:41
"여러분,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가 아니라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라고 합니다."

올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SNS상에서 갑자기 퍼지기 시작한 문구다. 난데없는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설에,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는 '초콜릿'보다 '안중근 의사'의 이름이 상위에 올랐다. 심지어 발렌타인데이는 일제가 안 의사의 사형선고를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파했다는 설까지 나돌았다. 수십 년간 로맨스와 상술을 대표하는 날로 잘만 소비돼온 발렌타인데이가, 올해는 왜 온 국민을 '애국지사'로 만들었을까.

사실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이야기는 유머 사이트에서 나온 말이다. 발렌타인데이를 즐기지 못하는 '솔로'들이 커플의 즐거움에 '재'를 뿌리기 위해 반 농담으로 퍼트린 것이다. 11월 11일 빼빼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농민의 날을 기념하자는 농담을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유머 사이트들은 흔히 'ASKY(안생겨요)'를 외치며 솔로의 처지를 자조하는 유머가 흔히 오간다. 기념일 유머도 그같은 선상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문제는 올 발렌타인데이의 '안중근 의사' 이야기가 전에 없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발렌타인데이를 위시한 각종 기념일 상술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이 커진 탓일까? 아니면 우리나라 특유의 애국심 강요가 빚어낸 해프닝일 뿐일까?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발렌타인데이 등에 유독 심해지는 '연애 강요'에 대한 불편한 정서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초콜릿을 많이 받은 사람은 '위너'로, 받지 못한 사람은 '루저'가 되는 것이 이날의 암묵적인 룰이다. 평소에도 외모와 학벌과 직업과 심지어 사는 곳으로 상시적인 경쟁사회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는, 또다시 초콜릿의 갯수와 가격 따위로 경쟁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애가 이미 '순수한 감정의 교환'만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은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바이다. 경쟁과 비교가 일상화된 젊은이들은 '남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경쟁적으로 이성을 만나고 연애 '스킬'을 배운다. 돈을 주고 이성을 유혹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픽업 아티스트'를 찾기도 한다. 이미 연애는 상당 부분 입시나 취업과 같은, 냉정한 '스펙'의 대결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배은경 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교수는 한 매체에서 "TV와 영화를 통해 '달콤한 연애'의 환상을 지겹도록 학습"한 젊은이들이 "무한 경쟁이 낳은 연애에 대한 강박으로 '나는 그를, 그녀를 사랑한다고 스스로를 세뇌'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연애하지 않거나 못 하는 자들은 패배자가 된다. 연애를 '못'하는 자는, 외모와 인간성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자각과 함께 스스로를 열심히 '반성'할 것을 요구당한다. 하지만 많은 연애자와 기혼자들도 모두 외모와 성격이 완벽하지 않음을 볼 때, 이는 불필요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의 의지로 연애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비연애자'들도 패배자의 비겁한 변명 정도로 취급된다. 성소수자나 장애인, 외국인에 대한 조롱은 금기시되는 반면, 연애를 못하는 자에 대한 조롱은 별 비판 없이 이뤄진다. '연서복(연애에 서투른 복학생)' 등이 그 예다.

과거 부부관계 이외의 성애가 지나치게 터부시돼 문제가 됐다면, 이제는 지나친 '성애 강요'가 또다른 폭력이 되는 시대다. 해법은 간단하다. 타인의 연애에 지나친 관심을 두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연애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긍정적 가치 중 하나일 뿐이다. 돈의 많고 적음이 한 사람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 없듯이, 연애경험의 많고 적음이 한 사람의 훌륭함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세상에는 연애에 선천적·후천적으로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무성애자' 정체성을 가진 이들도 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가치관과 즐거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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