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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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만(youmany)등록 2014.04.29 14:27
오후 나절,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문자 창에 '화곡동 누나'라고 뜬다. 화곡동 누나는 4남 5녀, 9남매 우리 형제 중에서 두번째 고참이다. 재작년에 칠순을 지냈다. 몇 년 전에 임피 큰 누님이 돌아가신 후 화곡동 누나와 매형은 우리 집에서 가장 윗어른이 되었다.

"예. 누나, 저예요."
"응. 나다. 유석아. 바쁘냐?"
"아니.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그려. 너 이번에 내려 갈거지?" 

아차 싶다. 내가 먼저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매번 이번에는 내가 먼저 해야지 하면서도 늘 누나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누나가 말하는 '이번'이란 이번 주 일요일 저녁의 아버지 기일을 말하는 것이고, '내려 갈거지?'는 제사를 모시는 군산의 작은 형님댁에 갈 수 있냐는 뜻이다.

양친의 기일은 5월과 11월이다. 음력으로 4월 6일이 아버지, 10월 18일은 어머니의 기일이다. 봄과 가을로 간격도 적당하게 나뉘어 있고, 추석과 설을 피해 있어 교통이 복잡한 명절때보다 이동하기는 더 좋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주로 명절보다는 부모님의 기일에 모인다. 군산에 갈 때는 누나, 매형과 우리 가족이 동행할 때가 많다. 제사를 앞두고 일 주일 전쯤 누나와 전화로 일정을 상의한다. 시간이 임의로운 누나는 보통 하루 전에 내려가는 것을 바라지만, 우리 가족은 여러 가지 사정상 당일 오전에 내려가는 것이 좋다. 일정을 상의하면서 날짜를 맞춘다. 대개 같이 내려가게 되지만 부득이 한 경우에는 각자 행동하기도 한다.

군산에 갈 때 우리는 주로 기차를 탄다. 누나가 사는 화곡동에서 영등포역이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에도 가족 여럿이 갈 때는 답답한 고속버스보다는 열차가 훨씬 좋다. 기차는 무궁화호를 탄다. KTX는 너무 빨라서 타자마자 내리기 때문에 누나도 나도 그다지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우리는 내려가는 동안 열차 안에서 도시락을 사먹으면서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눈다. 열차안에서 먹는 도시락은 아기자기한 반찬이 여러 가지 솜씨있게 담겨 있어 예쁘기도 하고 무척 맛있다. 이 맛에 길들인 우리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 갈 때마다 고모가 사주는 이 도시락을 무척 기대하곤 한다.

누나와 우리 가족은 같은 서울에 살아도 자주 만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1년에 두 번 군산에 다녀오는 차안에서의 대화가 무척 소중하다. 하지만, 근래 들어 나와 아내가 교회에서 맡은 일이 많아지고, 세 아이들도 커가면서 각자 직장과 학교 사정이 있다 보니 다섯 명이 모두 함께 내려가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다. 그것을 누나는 몹시 아쉬워하신다. 나 또한 제사 때마다 한 명이라도 더 데리고 가려고 노력해 보지만, 쉽지 않다.

우린 원래 4남 8녀로 열두 형제였다. 그 중에서 셋이 유명을 달리 했다. 제일 큰 누나인 임피 누님과 셋째 서울 복순이 누님, 막내 고창 순옥이 누님. 이 세분이 우리 형제 곁을 떠나 부모님 계신 곳으로 먼저 가신 분들이다. 나머지 형제 중에도 서울에 사는 가족은 많지 않다. 나와 화곡동에 사는 누나 외에, 부천에서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는 큰 형이 있다.

직업 형편 상 큰 형님은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아파트 경비라는 직업은 휴가가 따로 없다고 한다. 아니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초소에 근무자 단 둘이 맞교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차피 한 사람이 휴가를 가더라도 둘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일이 있어 하루 휴가를 가면 남은 사람이 연속 3일을 근무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팍팍한 근무 여건이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잘 모른다. 다만, 아파트 경비원이라도 기본적인 인간관계속의 구성원의 한 사람일진대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궁금해진다. 1년에 휴가 하루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아파트 경비원은 정규직일까? 비정규직일까?

큰 형님은 부천에서 혼자 산다. 화곡동 누나 말로는 원미동 어느 주택가 연립 주택 지하방이라고 한다. 형님이 사는 집을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가볼 생각도 별로 없다. 가보아야 60대 후반의 남자가 혼자 사는 곳이다. 형님은 지금껏 험한 인생을 살아왔다. 노년에 이른 지금까지도 역시 편치 않은 말년이다. 그 초라한 남자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을 방 한 칸. 어쩌면 하루 한 두 시간의 조각볕 조차도 들지 않을 그 방. 그것을 들여다 보는 내 마음역시 편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님이 형수와 이혼하고 혼자 산 지는 20년이 넘는다. 슬하에 자식도 남매가 있었으나 그 조카들도 이혼하면서 형수를 따라 가버렸다. 형님이 이혼하게 된 저간의 세세한 사정은 잘 알 수 없다. 형님의 이혼을 앞두고 형수와 전혀 연락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형수도 예전엔 나와 자주 만났고 대화를 잘 했던 적이 있었다. 나와 형수는 비교적 잘 통하는 편이었다. 물론 형수와 나누는 그 대화의 대부분은 형님의 술버릇에 대한 형수의 하소연이었다. 그러나 그런 형수도 어느 때부턴가 나와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끊었다. 집 전화는 끊겨졌고, 핸드폰을 해도 받지 않았다. 아마 형수가 이혼을 결심한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형님과의 이혼은 형수의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설령 형수가 다른 남자를 만나 팔자를 새로 고쳐 간 것이라 해도 그분 여생의 행복을 빌 뿐 탓할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그 이혼의 바탕을 이루는 매개체 또는 촉진제로서 형님이 마시는 술이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형님의 술버릇으로 인해 희생되었을 형수의 인생도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군 입대를 앞두고 형은 작은 키로 인해 신검에 불합격되어 현역에서 제외되었다. 160센티미터도 안 될 정도로 몸 체구가 작았고 성질도 매우 내성적이었다. 술이 아니면 평상시에는 말도 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술이 들어가면 말수가 늘었다. 형님은 술을 일찍 배웠다. 젊어서부터 형님은 술을 좋아했다. 형님이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방위병으로 대야면사무소에서 근무할 때부터 일 것이다.

방위도 군대라는데 무슨 군인이 거의 매일 술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술에 취하면 반드시 술주정을 했다. 그 술주정의 대상도 가족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못했다. 형님의 가족에 대한 술주정, 그것은 단순한 술주정이 아니었다. 가족에 대한 행패였고 폭력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형님이 술에 취해 부모님에게 포악을 부리는 모습을 자주 보아 왔다. 어느 해인가는 술에 취해서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다행히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서 바로 꺼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한 겨울에 집이 다 타버릴 뻔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님의 행패로 인해 제 명대로 살기 힘들겠다면서 형님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가족들을 데리고 형님 몰래 이사 갈 생각까지 하신 적이 있다.

그런 형님의 술주정도 작은 형님과 내가 성장하면서 시나브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그렇게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다가 고등학생이던 작은 형에게 지게 작대기로 제대로 한 방 맞은 적이 있다. 그 날 밤 일어난 일을 나는 잘 기억한다. 형이 술에 취해 마당 가운데 서서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안방 쪽을 향해 '당신들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 며 소리치고 있었다.

안방을 향해 욕설을 퍼붓던 형은 갑자기 뒤꼍으로 달려가 장독을 들어내다가 마당에 던져 깨뜨렸다.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잠을 자다가 형이 집에 들어오면서 양철대문을 발길로 차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나는 작은 방에서 무서워 떨며 마당에 켜진 백열등 아래서 흡사 야차와도 같이 날뛰는 형을 향해 증오가 담긴 불길같은 눈동자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작은 형이 보였다. 작은 형은 대문 곁의 오동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행패부리는 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작은 형의 모습을 본 순간 백만 원군을 만난것처럼 든든했다. 이제 큰형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해꼬지 하려고 들면 형과 내가 합세하여 이길 수 있다. 자신감이 생겼다.

바로 그때였다. 깨진 항아리 조각을 손에 들고 큰형이 안방쪽을 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의 손에서 흐르는 피가 마당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내 옆에서 지켜보시던 외할머니가 '저놈이... 저놈이...' 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지금 내가 튀어나가야 하는데... 내가 나가서 우리 부모를 지켜야 하는데...문고리를 잡은 내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때였다. 어느 사이엔가 외양간 앞까지 접근한 작은 형이 마당을 가로 질러 큰형을 향해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불빛 속에서 돌진하는 작은 형의 손에 지게작대기가 들려 있었다. 큰형은 작은 형의 작대기를 마루 밑에서 맞았다. 머리를 맞고 잠시 비틀거리던 큰형은 이내 쓰러졌다.

"우학이 이놈아 성을 죽일라고 그러냐?"

안방문이 벌컥 열리며 아버지가 뛰어나오셨다.

'술만 깨먼 겐찮을 틴디. 우곤이가 죽으먼 어떻게 허냐? 불쌍헌 내 아덜'

아버지는 그 사이에 형의 행패를 잊은 듯 했다. 공포에 떨고 있던 가족들이 마루에 모였다. 외할머니가 쓰러진 형을 향해 다가갔다. 한 동안 얼굴을 만져보고 맥을 짚어보고 하시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이그, 왠수 같은 놈........... 죽던 안겄네. 한잠자고 술이 깨먼 괜찮을 것이어'

나와 작은 형이 큰형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 건넌방에 뉘였다.

형님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당시 의정부에 살던 춘자누나의 소개로 만난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 이후 시골에 살다가 건축 현장 목수일을 하시는 큰 매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가진 기술도 없이 매형만을 바라보고 서울로 올라 온 형님은 화곡동 누나 곁에 방을 얻었다. 그 이후 줄곧 매형과 같이 일하면서 현장 잡역부 일을 배웠다. 그러나 결국 날마다 술에 취해 사는 형님은 누나에게 큰 화근 덩어리였다. 변변한 직장도 없이 시골에서 빈둥대던 동생을 품안에 거둔 갸륵한 누나는 평생을 두고 꺼지지 않을 불덩어리를 스스로 불러들여 가슴에 안은 꼴이었다. 형님은 날이 날마다 술이었고, 그럴수록 누나를 향한 형수의 푸념은 늘어만 갔다.

형님의 술버릇은 조카들을 낳고도 계속 되었다. 형님은 술로 인해 큰 실수를 한 다음 날에는 매형과 누나, 형수앞에서 반드시 술을 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 맹세는 반드시 작심3일이었다. 그러다가 형님은 갑자기 이혼 당했다. 형이 던진 물건에 맞은 상처를 근거로 떼온 진단서와 부서진 가재도구가 가득 담긴 사진들, 아이들의 불리한 증언을 근거로 법원은 형수의 일방적 이혼 신청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그들 가족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화곡동 72번지 집은 자녀 양육비 명목으로 형수에게 넘어 갔다.

그렇게 날마다 술에 취하면 형수를 때리고 가재도구를 부수며 형수에게 집을 나가라던 형님은 오히려 자신이 집을 나오게 되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득한 벼랑끝에 서게 된 것을 깨닫게 된 형님은 뒤늦게 형수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법원은 그런 형님에게 100m이내 접근금지라는 마지막 선물을 안겼다.

그래도 형님은 뉘우친다며 살던 집 주변을 맴돌았다. 얼마 후 형수가 집을 팔고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 일손을 놓고 형수의 흔적을 찾아 형수의 고향인 의정부 일대를 헤매던 형과 그런 동생을 끌어안고 이제라도 정신차리라며 몸부림치던 누나. 군대 제대 후 6개월 준비 끝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 생활을 막 시작한 나에게 서울은 그런 곳이었고, 내 가족 또한 그런 모습이었다.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현장 일을 다니던 형님은 몇 년 전 허리를 크게 다친 이후 건축 잡역부 일을 그만두었다. 형님은 아파트 경비 일도 한 군데 오래 근무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몇 달에 한번 씩 통화하다 보면 아파트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형님과의 통화는 내가 할 때도 있지만,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는 때가 더 많다. 그래도 공무원하는 동생이라고 뭘 물어보는 것이다.

전화하고서도 용건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바쁘지 않느냐고... 바쁘면 끊겠다고 한다. 동생한테 전화하면서도 떳떳치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이 전화기너머로 보이는 것 같다. 형님의 그런 태도가 짜증스러워져서 살짝 미간이 찌푸려진다. 괜찮다고.... 할 말 있으면 하라고 한다. 적십자 회비 청구서가 쌓였는데 어떻게 해야 되냐? 보일러가 고장 났는데 집 주인에게 연락해도 고쳐주지 않는다. 주로 이런 전화들이다. 들어보면 거의가 내가 해결해 줄 일도 아니지만, 형님도 딱히 무슨 해결책을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통화할 뿐이다.

이제 형님의 나이 70이 가깝다. 사는 날까지 살기 위해서는 그나마의 직장마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변변찮은 직장 일 때문에 집안에 일이 있을 때 함께하지 못하는 형님은 큰 죄를 진 듯 몸을 움추리면서 늘 동생들에게 미안해 한다. 지난 젊은 시절의 과오를 사죄하는 듯 허리굽은 형님이 동생들에게 굽신거리며 쩔쩔 매는 모습이 이제는 차라리 안쓰럽다.

"유석야! 전화끊었냐? 얘가 통화하다 말고 어디 간 거야?"

나를 부르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전화기는 꺼지지 않은 채 아직 내 손에 들려있다.

"아. 누나 미안해요. 내가 뭔가 정신이 딴데 팔려서...."

누나와 일요일 오전 11시 반 무궁화호 열차로 내려가기로 약속했다. 나와 아내, 아들 이렇게 셋이 내려간다고 했다. 학원강사인 큰 딸과 재수생인 막내는 이번에는 내려가지 못한다.  내가 인터넷으로 표를 예매하겠다고 했다. 누나는 도시락을 사겠다고 한다. 누나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열차안에서 까먹는 도시락은 참 맛있다. 이번에는 무슨 도시락일지....기대된다.

창밖에 봄비가 내린다. 생각해보니 아까부터 내린 것 같다. 봄비 치고는 좀 많다고 느낀다. 아마 내일쯤 형님에게서 전화가 올 것 같다.

"유석아! 난데 저기.... 안 바쁘냐? 통화해도 돼? 바쁘면 끊을께. 나 이번에도 내려가 보지는 못할 것 같다. 미안하다. 나 할 말이 좀 있어.....어제 비가 많이 왔잖아. 근데....벌어진 창틀사이로 빗물이 들어와서 방안이 흥건해. 주인한테 전화했더니 받지를 않네. 어떻게 해야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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