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 발랄하다 못해 에로틱한 바흐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그는 무대 위 궁정악단(오케스트라로 분한 무용수들)을 열정적으로 지휘하는가 하면 한껏 부풀린 페티코트를 입은 남성무용수들과의 트리오도 서슴지 않는다. 여성무용수를 첼로삼아 몸과 다리, 팔과 가슴을 오가며 선정적일 정도의 연주마저 선보인다. 나초 두아토는 근엄해 보이기만 하는 바흐의 모습을 사랑하고 고뇌하는, 살아 숨 쉬는 한 인간으로 새롭게 변주해냈다.
▲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 1007)’에서 바흐는 여성무용수를 첼로삼아 몸과 다리, 팔과 가슴을 오가며 선정적일 정도의 연주마저 선보인다. ⓒ 유니버설발레단
1부에서는 <멀티플리시티>라는 주제만큼이나 바흐의 음악을 다채롭게 풀어낸다. 바흐와 나초 두아토의 만남을 그리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시작으로 무용수들은 하나의 음표가 되어 각각의 운율과 파동을 그려낸다. 오케스트라 대형을 그대로 안무에 반영한 '칸타타 BWV 205 중 AEOLUS'의 군무는 음악의 시각화를 극대화하며 들리는 음악 대신 보이는 음악을 유쾌하게 시현해낸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 1007)'의 2인무는 공연의 백미다. 악기로 분한 여성무용수(김나은)와 바흐(예브게니 키사무디노프)는 완벽한 호흡을 선보이며 부드럽고도 강렬한 첼로의 선율을 몸짓만으로 생생하게 표현해낸다. 귀에 익숙한 바흐의 음악이 섹시하게 들리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외에도 바이올린의 활을 펜싱에 비유한 '2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비롯해 쳄발로 협주곡이나 폴로네즈 등 다양한 콜라주에 채색된 정교한 테크닉은 미니멀한 구도와 디테일한 안무와 어우러져 고도의 감각과 기술을 선보인다.
2부 <침묵과 공의 형상>에서는 푸가 위주의 음악으로 톤이 다운되면서 바흐에게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흰 가면을 쓴 여인의 집요한 추적을 피할 새 없이 바흐는 그녀와의 끈질기고도 치밀한 파드되를 이어간다. 무용수들은 일자로, 대각선으로, 앞으로, 옆으로 움직이면서 대위법의 화음('푸가의 기법 BWV 1080' 중 'Contrapuntus')을 끌어내다가 이내 장렬한 죽음의 춤('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 538')을 춘다.
▲ 프롤로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함께 무용수들은 오선지를 상징하는 무대 철골 사이에서 음표가 되어 악보를 이툰다. ⓒ 유니버설발레단
끝내 여인의 손을 맞잡은 바흐는 갖은 번뇌를 뒤로 한 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그려내며 죽음을 맞이한다. 프롤로그에 흘렀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다시금 울려 퍼지고, 무용수들은 그의 음표가 되어 무대 뒤 오선지 속으로 천천히 아로새겨졌다. 바흐에 대한 두아토의 경외감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느껴지는 엔딩이었다.
두아토의 바흐예찬 덕에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바흐와 모던 발레 모두 새롭게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울러 유니버설발레단의 숨은 내공까지 덤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간 흘려온 무수한 땀방울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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