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도피하는 이유.

일상 속에서 도피하는 우리들과 결국 완벽히 도피하지 못하는 이유.

검토 완료

신가영(akdong7146)등록 2014.05.29 17:58
대학생인 필자는, 얼마 전 과제를 '도피'하기 위해 다음 웹툰을 정주행했다. 고아라 작가의 어떤 교집합 이라는 작품이었다. 역시 대학생인 주인공이 삼촌의 부탁으로 인사동 게스트하우스를 작은 삼촌과 아르바이트생 누나와 함께 운영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작품의 중심에 서 있는 작은 삼촌은 원래 시골 본가에서 생활하며 도시생활을 극도로 꺼려하는 인물이었다. 작은 삼촌이 그런 이상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친하게 지냈던 고향 친구가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게 되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되었지만 그 친구가 큰 화재로 얼굴과 온 몸에 화상을 입게 된 일 때문이었다. 작은 삼촌은 '자신이 격려하지 않았다면 그 친구가 서울로 가지 않았을 것이며 화상도 입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죄책감에 그 때의 마음을 마주하는 장소인 '서울'을 꺼려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작품 말미에서는 그 자신의 도피하는 행동이 친구를 더 상처 입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친구를 마주하며 자신 또한 마음에 화상을 입고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다른 인물인 아르바이트생 누나 또한 취업준비생으로, 매일을 도서관에서 주어진 현실과 싸워가지만 게스트하우스로 일을 하러 오는 시간에 함께 하는 동료들과 여러가지 일을 겪게 되면서 자신이 서 있는 곳 중 어떤 것이 '현실'이며, '도피'인지 곰곰히 생각하게 한다.

어떤 교집합의 인물들의 상황을 휴대폰 화면으로 조금씩 내려가면서 나 또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접하고 있는 웹툰 자체로 도피할 수 있는 현실이라면, 나는 그저 웹툰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대답은 확실히 'NO'였다. 어정쩡한 도피로 과제를 회피하고 있었을 뿐이며, 만화라는 장르적 환상을 통해 내 문제를 두껍게 덮어 씌우려고 했던 것 뿐 이었다. 내가 보고 있던 웹툰은 공통적 고민 장르인 '젊은이들의 현실'이라는 타이틀을 가져와 모두 같은 고민을 하게 하며, 자신의 특정한 상황을 보게 하는 내면의 눈을 멀게 했다.

우리가 현실을 겪는 방향은 모두가 다르다. 절대로 같을 수 없다. 하지만 '희생양'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우리는 가장 연약하게 현실을 앓아야하는 대한민국의 20대이다. 르네 지라르의 <폭력의 성스러움> 이라는 번역서를 읽어 보면, '희생양(파르마코스)'은 집단 내부에 잠재되어 있어 언제든지 폭력의 고리를 물고 늘어질 수 있는 대중(하위주체)의 폭력을 상징적인 폭력으로 해소하는 역할을 떠맡는 제물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가 대표적인 희생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상징적인 '청춘'이라는 키워드를 희생양 삼음으로써 아파야 청춘이라는 키워드 안에 젊음들을 가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청춘을 아프게 함으로써 아픈 청춘들이 스스로를 미화시키며 현실을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폭력'인 것이다.

솔직히 토론해보자.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이 아픈가. 도피를 행해야 할만큼 쓰라리게 아픈 것인가? 그 대답에 대한 대답은 모두가 다르다. 아픔을 느끼는 개인의 차이는 청춘에게도 있으며 그로인해 파생되는 것들에 대한 도피결정권 또한 청춘에게 있다. 현실에 적응하여 안전히 살 것인지,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새로이 시작하는 것들을 맞이할 것인지를 생각해본 적 있는가. 적응하려한다면 적응하려하는 현실이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도피하려 한다면 내가 얻어가려 하는 자유가 완전히 유토피아적인지 고민한 적이 있는가.

  그에 대한 해답, 혹은 오답을 가지고 있는 소설 속 등장인물로는 <달의 바다>의 고모(이하 고모)와 <아내가 결혼했다>의 아내(이하 아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고모와 아내는 현실을 벗어나 자신이 건설한 이상 속을 거닐면서 살아간다. 고모는 재미교포와의 결혼 실패로 한국에 돌아와야하는 '현실'에 처하지만, 미국에 머무르며 자신이 평생 꿈꾸던 우주비행사들이 즐비해 있는 우주 연구소에서 핫도그를 팔며 살아간다. 그와 다르게 아내는 한국이라는 보수국가에서 두 명의 남편을 거니르며 어떠한 현상을 스스로는 감지하지 않았지만 결국 주변인의 동요로 인해 한국의 현실을 도피하여 두 명의 남편과 함께 남미로 떠난다. 둘 중 어떤 인물이 좋은 도피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나는 후자를 이야기 해보고 싶다. 아내는 두 명의 타인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왔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국가 속으로 사람들을 불러온 것이다. 타인의 동조가 도피의 변명이 될 수 있지만, 그녀는 두 명의 남편이라는 자신의 세계에 대한 변명거리가 존재한다. 아내는 현대사회의 질병을 온전히 앓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 인식했으며 완전히 도피했다. 사랑이라는 본질을 직면했으며 그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거세되었지만, 그녀 스스로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를 행했다.

물론, 아내처럼 모든 이가 행하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의 도피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변명 또한 멋들어지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 모르는 삶은 불쌍하고 가엽다. 그 것은 불안을 동반하기 때문에 도망을 멈추는 것이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는 일이 되기도 한다. 도망치지 말고 도피하라. 그 후에 오는 결과 또한 본인이 만들어가라. 그리고 본래 머물던 곳에 고착하려고 한다면, 고착하려고 하는 이유를 완벽히 이해해라.
도피, 적응 모든 것은 '나로 인해'가 되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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