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서 발끝까지 청회색의 포대를 둘러쓰고 허리에는 크고 둥근 대나무 테를 넣어 배불뚝이 형상을 한 '장자마리'가 등장했다. 얼굴에 뚫린 구멍으로 두 눈과 입만 드러낸 장자마리는 경쾌한 몸놀림으로 마당 이곳저곳을 휩쓸고 다니며 '관노(官奴)가면극'의 시작을 알렸다. 불룩한 몸에 풍성한 수확을 상징하는 미역, 다시마, 곡식 줄기 등을 주렁주렁 매단 장자마리가 한 바탕 놀이를 벌이고 나가니,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등이 등장해 사랑과 훼방의 드라마를 이어간다.
▲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사랑을 질투하던 시시딱딱이가 완강히 거부하는 소매각시를 붙잡고 억지춤을 추며 훼방을 놓는다. 양반광대가 이 장면을 보고 크게 노해 소매각시를 질책하며 밀치는 장면. 양반광대와 소매각시 사이로 장자마리, 오른쪽으로 시시딱딱이가 보인다. ⓒ 관노가면극 보존회
조선시대 관청의 노비들이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 관노가면극은 강원도 강릉단오제(음력 4월 15일~5월 6일)를 빛내는 주요 공연이다. 강릉단오제는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해 국가가 보전해오다 지난 2005년 축제로서는 세계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이 관노가면극을 이어가고 있는 예능보유자 김종군(75)선생을 지난 6월 18일 강릉시 죽헌길의 강릉 관노가면극 전수회관에서 만났다.
유네스코 인정 강릉단오제를 빛내는 공연
선이 고운 한복을 입은 김 선생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국내 유일의 무언극을 30년 동안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강원도 양양에서 6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12살 되던 해 6.25 전쟁이 터지자 강릉으로 피난 내려왔다가 눌러 살게 됐다고 한다. 당시 농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농악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니 그도 별 수 없이 발을 들이게 됐다. 그러다 1981년 무렵 농촌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며 구성원 공백이 길어지자 마을 농악팀이 해체 위기에 빠졌다. 이 때 제2대 관노가면극 기예능보유자였던 고 권영하 선생(1918~1997)이 관노가면극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관노가면극 공연 경험이 있는 장정용(57·강릉원주대 국문과)교수의 지도로 연습을 시작했지만, 지도자나 참가자들이나 대부분 극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악기와 춤도 서툴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로 연구하고 고민하며 하나씩 극을 채워나갔다. 낮엔 농사일을 하고 밤으로 공연 연습을 했다. 이런 노력 끝에 1985년 강릉단오제 기간 동안 3번의 첫 공연을 만족스럽게 마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관노가면극에 대한 김종군 선생의 헌신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 김종군 관노가면극 예능보유자. ⓒ 이문예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 잘한다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날 이후 30여년 공연을 해 왔지만 김 선생은 아직까지도 배워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관노가면극의 최고 권위자가 됐지만 20년 째 강릉시 소재 초·중·고등학교 동아리 교육을 나가며 학생들과 함께 배운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현재 강릉시에는 초등학교 8개, 중학교 2개, 고등학교 1개의 동아리가 관노가면극을 전수하고 있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동아리도 3개가 있다.
젊은이들에게 잘 물려주는 게 과제
"춤 동작에는 각자의 느낌과 습관들이 녹아나옵니다. 같은 동작을 해도 저마다 다르게 표현되기 마련인데, 가끔 교육을 나가면 가르쳐준 것보다 더 독특하고 매력 있는 동작으로 표현하는 학생들을 만날 때가 있어요. (좀 더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싶지만) 젊은이들이 이런 걸 전문적으로 하려 하나요? 사실 권하기도 미안하죠."
전통예술의 장인이 힘들게 이어온 우리 문화를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다는 고민은 관노가면극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공이 많이 드는 데다 돈 벌이가 되지 않으니 생업으로 권할 수가 없다. 간혹 퇴직한 후 관노가면극을 또 다른 인생의 길로 삼으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10~20년 정도 꾸준히 배우고 익혀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 중년층의 관심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김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젊은이들이 진지한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한다.
현재 20명의 관노가면극 보존회팀에 25세, 31세 청년 둘이 참여하고 있다. 이 둘은 각각 강릉의 문성고, 중앙고 재학 시절 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이 길로 뛰어 들었다. 그 중 31세 김문겸씨는 중앙대 국악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장차 대학에서 관노가면극을 가르칠 꿈을 꾸고 있다. 김 선생은 '어떻게 해야 이 청년들이 이 일로 밥 먹고 살 수 있을까'를 깊이 고민하고 있다. 그는 관청 등을 여기 저기 뛰어다니며 관노가면극을 비롯한 무형문화 전승 활동에 필요한 지원을 받으려 애쓴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역단체장 등의 협력이 시원치 않은 눈치다.
"무형문화재는 10년, 20년은 꾸준히 투자해야 해요. 아무리 투자해도 금방 빛이 나지 않는 게 무형문화재이지요. 그러니 지자체가 투자를 꺼리는 거예요. 안타까워요.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해요."
▲ 2000년 '페리그 미모스 마임 축제'에 초청되어 프랑스를 방문했을 당시 모습. ⓒ 관노가면극 보존회
프랑스 관객의 진지한 눈빛 잊을 수 없어
선생은 지난 2000년 세계 3대 마임 축제인 프랑스 '페리그 미모스 마임(pericuex mimos mime)' 축제에 초청돼 공연을 하고 왔다. 당시 3일간 6회 공연을 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관람객들의 태도였다. 단오제 기간에 잠깐 와서 건성으로 보고 가는 우리 관객들과 달리 진지하게 팜플렛을 들여다보고 동작 하나 하나를 눈에 담아가려고 애쓰던 모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극 속에 숨은 의미를 묻기도 했다. 프랑스에선 낡은 옛날 집들을 허물지 않고 고쳐 쓰는 등 전통의 원형을 보존하려는 지역과 정부 단위의 노력도 눈에 띄었다. 전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대비되어 몹시 부러웠다고 한다.
그는 일흔 다섯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년에 두 세 번씩은 직접 공연을 한다.
"단오제 때가 딱 더워지기 시작할 때예요. 더운데 탈을 쓰면 땀도 눈으로 들어가는데 나이가 드니 눈 따갑고 몸이 힘든 이 일에 꾀를 부리게 돼요. 이젠 하라 그러면 겁부터 나요. 하하하."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몸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는 좀 더 정진하겠다고 한다. 종묘제례악 무형문화재 1호인 고 성경리 선생이 남긴 '예도인(藝道人)의 끝은 없다. 참고 견디며 정진할 뿐'이라는 말씀을 붙잡고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올해 관노가면극은 11월 8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3시, 일요일 오전11시에 강릉시 오죽헌 자경문 앞 야외공연장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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