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어 환장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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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수(sydney)등록 2014.10.16 15:06
1971년 한 해 미국의 대학에서 4,800회의 반전 데모가 벌어졌고 체포 7,400명, 3분의 2가 경찰이었던 부상자 462명, 방화 247명, 사망이 8명이나 되었고 도서관이나 연구소에 방화가 발생했었다. 닉슨 대통령이 한 베트남 참전 장교의 부인에게 베트남에 있는 병사들은 훌륭히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대학에서 일부 건달패(Bums)들이 소동을 부리고 있다고 언급한 말이 보도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학생들이 마치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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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학에서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파견하였고 발포명령이 떨어져 대학생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잇달아 전국적으로 데모가 번져 450 개에 달하는 대학이 휴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에서 대학생들이 반전운동을 벌여서 일선에서 전투를 해야 하는 미군의 전의를 감소시키고 있을 때에 남베트남 대학생들은 격렬한 반정부 운동을 벌리고 있었다. 매달 수천 명의 젊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도 남베트남의 대학생들은 징집이 연기되어 수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의 젊은이로서 국가의 특혜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들도 양심은 있기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는 독재정부를 타도하여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날마다 데모를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박정희 정권은 외신을 통제해서 한국군이 파병되어 있는 월남에 관해서 부정적인 정보는 일체 보도가 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6, 70 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탈출해보려고 몸부림쳤었다.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혹은 브라질로 집단 이민의 길을 찾았고 개인별로는 독일의 광부나 간호사로 노동자들은 중동건설 현장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났었다. 월남 참전 초창기에는 막연한 외국에 대한 선망, 돈을 벌어야 하겠다 등등의 이유로 대부분이 지원을 했었다. 참전군인들 가운데 부산 제 3 부두에서 태극기 물결 속에 배에 오를 때 속으로는 가족을 위한 희생양(scapegoat)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고기값이라도 해보자.' 즉 죽으면 보상금이라도 타서 부모님에게 효도나 해보자는 자조적 농담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최소한 누구나 "내가 무사히 돌아가면 우리 집에 황소 한 마리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한창 월남전이 진행될 때 월남에서 근무하는 기간을 한국에서 근무를 하는 것보다 두 배로 근무연수로 계산이 되는 직업 군인들은 파병이 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기도 했고 일반 사병들도 파병을 위해서 상납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파월 되었던 1972년에는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여 월맹 정규군이 마지막 총공세를 펼쳐서 한국군이 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시기였던 만큼 진급을 위한 경력 관리가 필요한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서는 지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부대에서는 부대별로 할당이 떨어져도 지원병이 없으니까 할 수없이 차출을 하는데 보통 평소에 부대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병사를 보냈다. 그래서 월남차출이 떨어지면 부대장에게 "앞으로 부대 생활 착실하게 할 터이니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을 하는 웃지 못 할 희극도 벌어지곤 했다. 따라서 혹시 일어날 줄 모르는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서 당사자에게는 바로 전날 통보를 해서 정신없이 보내 버리기도 했다.
하루는 대대에서 PX병으로 근무하던 대학 동창은 월남 전출병으로 차출이 되어서 내일 떠나게 되었다며 연대본부에 있던 나에게 인사과에 돈을 얼마를 써서라도 자기를 좀 빼달라고 울면서 전화를 했었다. 사정은 안 보아도 뻔한 일이었다. 중대에서 병력을 빼면 다른 중대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곤란하니까 그 친구는 전혀 군대생활에서 말썽이나 문제를 일으킬 사람이 아니었지만 아무 하고도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PX 관리병을 보내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지만 일개 사병인 입장에서 더욱이 출발 전날 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나는 "야! 임마! 월남 간다고 다 죽냐? 걱정 하지 말고 가. 나도 곧 뒤 따라 갈께"라고 했다. 나중에 내가 월남에 간 다음에 그렇게 달래서 보냈던 동창생의 생사가 계속 궁금했지만 사병의 입장으로서는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철수를 할 때 공항에서 키가 컸기에 의장대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피차 눈으로만 감격의 인사를 교환했던 기억이 새롭다.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속한 집단과 '다르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가 속한 집단과 정서를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은 고통일 수 있다. 왕따든 자따든 소외의 결과는 타인과 다른 자기만의 내적 동기가 더 강화될 수도 있거나 왜곡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일베 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월남전에 지원 했을 당시의 나의 처지가 꼭 그러했다. 당시 모든 면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심리적으로 점점 전쟁터로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남들은 군대를 이미 다녀올 25살의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갔지만 입대를 하자마자 기회만 있으면 월남으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사귀고 있던 정희의 친척이 되는 당시 미8군 연락장교단장으로 있던 박희도 대령에게 월남으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박 대령은 비교적 안전한 사이공에 있는 주월 사령부에 자리가 있나 알아볼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파리에서 미국, 월맹, 베트콩의 3자 평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어서 언제 전쟁에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했는데 마침 월남 차출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때는 이 때다.' 하고 지원을 했다. 내가 지원을 하자 사병계는 이상하게 생각해서 인사과장에게 보고를 하고 인사과장은 부연대장에게 보고를 했다. 연대장이 자리를 비우려면 2 단계 지휘관 즉 군단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마침 연대장이 임기 동안 단 한 번뿐인 사흘 동안의 휴가를 얻어 자리를 비웠었다. 장군 진급 심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는 시범을 앞두고 머리가 좋은 연대장은 전체 군단 지휘관들 앞에서 멋있는 시범을 펼치기 위해서 사단 안에서 낭독을 잘할 수 있는 사병을 찾아 달라고 정훈 참모에게 부탁을 해서 방송의 경험이 있는 나를 뽑아서 데려다 놓았었다. 나는 이런 사정으로 연대장이 필요해서 데려다 놓은 필수 요원이었기 때문에 비록 시범은 끝났지만 연대장의 하락이 없이는 부대를 빠져나갈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인사과장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를 연대장실로 데리고 가서 부연대장에게 "연대장님이 이 녀석 월남 간다고 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부연대장은 "그렇다면 허락하셨겠지. 뭐?" 라고 하며 눈을 껌벅이던 모습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아마도 내가 거짓말을 하리하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 좋은 부연대장은 나중에 내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연대장에게 혼 좀 났을 거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대였다면 그런 거짓말이 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군대의 통신 시스템은 교환대를 거쳐서 상급 부대와 하급 부대만 통할 수 있었지 소속이 다른 옆 부대와는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단 범위를 벋어나기 전까지는 마음이 조마조마 하다가 동두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사단 법위를 벋어나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흘 후에 연대장이 돌아와서 내가 없어진 것을 알더라도 연대장의 힘으로는 이미 사단 밖을 벋어나서 있는 나를 도로 불러 올 수는 없다는 군대의 명령체계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저지른 행동이었다. 항상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알듯 아는 놈이 범죄도 저지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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