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쫌 더 일그러진 영웅

아무도 관심 없는 그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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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혁(che9457)등록 2014.12.29 14:28
그 날, 석대가 "잘해 봐. 이 새끼들아." 라고 외치고 교실을 뛰쳐나가 사라졌던 바로 그 날. 석대는 달빛이 어스름한 동네 어귀에서 한 학년 아래의 누군가를 만났다. 내막을 모르는 이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달빛 아래 꽃피는 소년 소녀의 순박한 사랑 이야기로 이해할 법한 그림이었지만, 실은 나이 또래에 걸맞지 않는 모종의 암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석대는 학교를 떠나면서 자신의 비행과 치부들이 후학들에게 두고두고 까이는 것을 경계했고, 그 입막음의 역할을 해줄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석대의 혜안은 빛을 발했고, 석대가 읍에서 사라진 그 후로 아무도 석대의 잘못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에게는 으스스할 만큼 아이답지 않은 침착성과 치밀함, 그리고 야비한 표정이 있었다.

석대가 학교를 떠나기 전 만났던 그 누군가는 과연 누구일까? 그녀의 이름은 바로 석혜. 석대와는 먼 인척관계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우리로써는 그 두 사람의 쭉 째진 눈매가 닮은 점만으로 그저 유추해볼 따름이다. 석대가 사라지고, 병태가 학교를 졸업해 중학교로 진학한 후로는, 작은 읍의 별로 볼 것 없는 Y국민학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학교에는 석혜라는 우리들의 쫌 더 일그러진 영웅이 남아있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석대처럼 표 나게 권력을 드러내고 행사하진 않았지만, 석혜는 이미 Y국민학교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라고도 했고, 정치권의 거물이라고도 했으며, 일본 야쿠자의 보스라고도 했다. 순박한 시골 아이들의 상상력에서 나온 터무니없는 입방아라고 치부하기에는 석혜의 영향력은 이미 학교 전체로 퍼져가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병태의 6학년 담임이었던 김선생의 행방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 보자. 시골 학교의 월급이 제때 지급되지 않자, 생활고에 부딪힌 김선생은 방학을 이용하여 노가다 현장에서 일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학교 측에서는 어떻게 선생이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냐며, 교직원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를 들어 해직시킨다.

해직 교사가 된 김선생은 방황과 고민 끝에 협동조합에 눈을 뜨고, 협동조합 설립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해직교사는 조합원의 자격이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는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길거리에서 처량하게 담배 피는 모습이 한 조감독의 눈에 띄어 즉석 캐스팅이 되었고, 그 후로 영화판에 뛰어들어 단역 배우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대표작으로는 파아란, 올드 보이스, 명랑 등이 존재한다.)

김선생의 해직 후로, 시골 아저씨들처럼 후줄그레한 선생님이 맥없이 앉아 굴뚝같이 담배연기만 뿜어대는 교무실을 가진 Y국민학교에는 혁명의 기운 따위는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6학년이 된 석혜의 반은 예전의 석대반 담임이었던 최선생이 맡게 되었다. 막걸리 방울이 튀어 하얗게 말라붙은 양복은 언제부턴가 말끔한 양복으로 바뀌어 있었고, 손목에는 무궁화가 그려진 금빛 시계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반의 운영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아이들이 석혜의 존재감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이년 쯤 전부터다. 학년이 바뀌게 되면 자신들이 고학년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운동장의 구역 확장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선배라는 완장을 차고 아래 학년들을 몰아세운 후,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그 와중에 선배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놀던 구슬이나 고무줄 따위를 상납하는 저학년들은 그나마 손바닥만한 크기의 땅덩이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던 중, 학교 앞 문구점에서 구슬을 빡쓰떼기로 훔치다가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화가 난 문방구 주인은 그 아이의 귀를 잡고 교무실까지 끌고 와서 바닥에 패대기친다. 이유를 족치던 와중에 그러한 운동장 사용권의 이권이 얽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교감 선생님은 한동안 운동장 사용을 금지 시킨다. 운동장을 못 쓰게 되자 아이들의 불만은 쌓여갔고, 그 화살의 방향은 운동장 사용권을 쥐락펴락했던 몇몇 아이들에게 쏠리게 된다.

물론, 석혜도 그 몇몇 아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위기에 처한 석혜는 정면 돌파를 선언하고, 어디서 구했는지 운동장 한 가운데에 새마을 운동이라고 적힌 커다란 천막을 치게 된다. 그러한 결기 혹은 객기에 선생들은 당황했으며, 아이들이 하나 둘 천막 밑으로 모여들어 고무줄놀이를 재개하자, 어떤 두려움을 감지했는지 다시 운동장을 개방하게 된다.

또 하나, 전교생과 선생들, 그리고 지역의 주민들에게 까지 석혜의 존재를 각인 시킨 사건이 하나 더 있다. 이름 하여 '냉면대접 사건'. 석혜의 권력이 서서히 커져 나가자, 그를 시기 질투하던 한 동급생이 집에서 냉면대접을 숨겨와 석혜의 이마빡을 냅다 후려친 일이다. 그 자리에서 잠시 기절했던 석혜는 깨어나면서 한 마디를 내뱉는다. 그리고 그 한 마디는 듣는 이들에게 감동 이상의 여운을 주고 일파만파 퍼져 나가게 된다. 그 한마디는 이렇다.

"대접은요?" 아! 듣기만 해도 얼마나 가슴 절절한가? 자칫 정통으로 맞았다면 운명을 달리했을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작은 물건 하나를 아끼는 검약정신과 혹시 냉면 대접이 찌그러질 경우, 자신을 가해했던 친구가 엄마한테 맞을 일을 미리 걱정하는 박애정신은 타고난 지도자의 역량이라고 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

훗날 그녀의 최측근 가방모찌로 분류되던 한 아이의 진술에 따르면, 원래 그렇게 짧게 대답하는 게 스타일인데, 거기에 무슨 거창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말 배우는 아이들의 '베이비 토크' 같은 거다라고 해서 한때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은 그 한 마디로 인해 전교생의 동정심을 얻어냈고, 심지어는 대다수 선생님들마저 석혜를 진정성의 대명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6학년이 되었다. 새 학기가 되었으므로, 당연지사 전교 회장 선거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전교 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석혜였지만, 워낙 능력 면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좀 불안한 상황이었다. 최선생의 적극적인 후원 덕에 급장까지는 쉽게 따냈으나, 선거 막바지에 화장실 감금 사건이 아니었다면 석혜의 전교 회장 당선은 물거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없지만 화장실 감금 사건은 간단히 짚고 넘어 가야하겠다.(계속)

덧붙이는 글 본문 내용중에는 이문열 원작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문장의 일부를 대놓고 그대로 옮겨 적은 부분이 존재하므로, 향후 작가가 문제 삼을시 삭제 가능성이 있음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작가의 허락은 당연하게도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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