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 당한 인생, 영화 <소무>

사회로부터 소매치기 당하는 개인의 삶

검토 완료

이주영(achime)등록 2014.12.28 14:21

영화 <소무> 포스터 ⓒ 네이버 영화


주인공 소무는 버스에 무임승차를 하고도 뻔뻔하게 담배를 피워대는 양아치다. 남의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훔쳐 먹고 사는 소매치기다. 키는 작고 머리는 덥수룩하고 표정은 늘 찡그러져있다. 영화 초반에 나타난 소무의 모습은 여느 골목길에서나 볼 수 있는 센 척하는 '찌질이'다. 하지만 영화가 흐르면서 관객들은 소무에게 괜스레 마음이 간다. 소무는 단순한 개인이 아닌 자본주의에 찌들어가는 세상에 속한 개인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 어쩜 나 역시 소무가 될 수도 있다는 달갑지 않은 동질성, 그리고 그에 따른 동정심으로 소무를 바라보게 되면 소무가 훔친 것 보다 빼앗긴 것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친구를 빼앗기다 

소무는 노련한 소매치기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상에는 서툴다. 소무가 가진 능력은 남의 푼돈을 훔치는 것 뿐 이다. 세상은 더 이상 그런 능력으론 먹고 살 수가 없다. 하루를 훔쳐 하루를 먹고 살 수 있다 해도 내일을 기대하며 살 수 없다. 소무가 살아남기 위해선 다른 기술을 배우거나. 소용처럼 조금 더 큰 도둑놈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소무는 그러기엔 간이 크지 못하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배운 게 좀도둑질뿐이라, 좀도둑질밖에 할 수 없다.

소무와 소용은 함께 소매치기를 하던 친구이지만 소용이 발을 빼면서 더 이상 친구도 되지 못한다. 소용은 자신의 과거가 그대로 담겨있는 소무를 보는 걸 꺼려한다. 결혼식에도 초대 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엔 소용은 소무와 달리 번듯한 사업을 일구어낸 이상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사실, 소용은 소무보다 훨씬 더 큰 범죄자이다. 거대한 자본가가 되어 불법으로 밀수입을 하고 있지만, 본받아야 할 이 시대의 인물로 텔레비전을 통해 나온다. 소매치기 능력을 자본주의의 흐름에 맞게 업그레이드 시킨 소용은 적응력만큼은 존경받을 인물이다. 

소무는 여전히 소용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자신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를 숨기지 못한다. 내 친구가 자신을 창피하게 보고 있다는 것도 열이 받는다. 하지만 예전에 나눴던 약속만큼은 지키고 싶어 한다. 비록 자신을 저버린 친구일지라도 '의리'만큼은 지켜내는 게 소무의 허세든 사명이다. 소무는 결혼식 전날 소용에게 축의금을 떠넘기듯 줘버리고 소용의 비싼 라이터를 가져온다. 엘리제를 위하여, 라는 고고한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불로 소무는 담배를 연거푸 피워댄다. 이제 더 이상 소용을 친구로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사랑을 빼앗기다

소무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급 메이를 만난다. 자본주의의 논리를 흉내 내듯 돈을 주고 여자를 데려다 놓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할 여급이 제 말을 통 듣지 않는다. 소무는 그런 메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노래주점을 떠나지만 은근슬쩍 마음이 동한다. 돈을 주고 샀지만 그런 자본의 논리와 상관없이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는 메이는 여급이지만 주체성이 살아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소무 역시 그런 메이를 돈을 주고 샀다는 이유로 함부로 취하지 않는다. 돈이 아닌 인간적으로 엮인 관계로 그녀를 대하며 여관이 아닌 머리를 손질해주고 전화를 걸 수 있게 해준다.

소무와 메이는 닮은 점이 많다. 직업이라 할 수도 없는 소매치기와 여급이라는 일로 돈을 번다.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다. 이상은 있지만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나마의 소매치기 실력과, 그나마의 예쁜 얼굴을 활용하는 것 뿐 이다. 둘 다 사회에서 낙오된 인물이다. 소무는 그런 메이에게 사랑을 느낀다. 아마 그 사랑의 이유엔, 자신보다 낮은 처지라는 우월감이나 연민 또는 동지애 같은 것이 뒤섞였을 것이다. 소무는 메이를 위해 노래를 연습하고 반지를 산다.

하지만 메이는 사회의 바닥에서 소무를 버려두고 돈 많은 이를 쫓아 자본주의의 승리자가 된다. 메이는 떠나고 소무는 또다시 홀로 남겨진다. 둘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최신식 근대 산물인 삐삐밖에 없다. 이미 진정한 소통을 잃어버린 둘 사이에 삐삐는 그저 차가운 쇳덩어리로만 남게 된다. 결국 소무는 고향집으로 걸어간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쫓겨나다

아직도 농사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전근대적인 소무의 고향집은 말 그대로 근대에 물들지 않은 시골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소무는 메이에게 전달하지 못한 반지를 어머니에게 대신 전해준다. 자신에게 필요 없어졌기 때문에 처분하듯 줘버린 것이기도 하지만, 외로움을 달래고자 했던 마음이 담긴 반지를 어머니에게라도 전하고 싶었던 모습 같기도 하다. 그러나 반지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어머니가 아닌 형의 아내에게 전달되고 소무의 외로움은 또 한 번 무시된다. 가족 안에서도 도무지 소통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소무는 결국 집에서조차 쫓겨난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체제 아래 소무는 사회로부터 '사회악'으로 정의 내려진다. 그리고 경찰에게 잡혀 손이 묶이고 삐삐를 빼앗긴다. TV에서는 우리 삶의 질을 떨어트리던 양소무가 잡혀 세상은 더욱 평화로워졌다는 식의 방송을 내보낸다. 그렇게 소무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인물이 된다.

 소매치기 당한 인생

소무에게 이젠 친구 소용도 없고, 사랑하던 메이도 없다. 소무는 푼돈을 소매치기했기 때문에, 자신이 벌을 받는다는 반성을 요구 당한다. 하지만 사회의 모습은 그의 죗값을 치루게 하는 것 보다 소무를 싹둑 잘라냄으로써 사회 체제의 겉을 그럴듯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커 보인다. 영화 <소무>는 빼앗은 것보다 빼앗긴 것이 더 많은 개인이자, 사회적 약자의 한 모습이 사회체제 아래 어떻게 배제의 타깃이 되어 갈취당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길거리에 손이 묶인 채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덩그러니 놓인 소무는 모든 것이 탈탈 털린 채 몸둥아리만 남아있는 상태다. 눈 뜬 채 소매치기 당한 인생, 그 허무함과 비참함 속에 주저앉고 만다. 그리고 감독은 구경꾼과 관객의 눈을 마주치게 함으로써, 영화 속 소무가 되는 섬뜩한 간접 경험을 맛보게 한다. 관객은 곁눈질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과 정치세력을 살피지만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소무>는 그 순간 경고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미 소매치기 당하고 있는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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