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가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싹을 틔웠다?

뉴라이트 식민사관 식민지근대화론의 맹점을 파해쳐보자

검토 완료

신승규(chunje2)등록 2015.02.10 19:20


일제강점기가 우리나라 근대화의 싹을 틔웠다고?






최근들어 일제시대가 우리 민족의 근대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을 자주 듣습니다.

소위 뉴라이트측 주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상당히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주장입니다. 어쨌든 일제시대에 학교, 도로 등의 인프라가 본격화 되었고, 이는 근대화의 중요한 요소이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국가의 출발부터 볼까요? 국가는 언제 나타나나요

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가 나타나고, 이때는 부족국가의 형태를 띕니다.

1. 철기시대와 봉건제 사회







이후 철기 시대에는 봉건제 사회로 넘어가죠.

철기는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철기전에는 가축으로 소를 키우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고조선에도 철기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이 때는 기껏해야 왕족들 무기정도​ 수준이지요. 청동기 무기는 철기무기 앞에 쨉이 안 될테니까 지배계층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바꿔말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낫, 삽, 곡괭이만, 쟁기가 없다는 말이 되지요.

철기 시대에 와야 쟁기가 나타나게 되고, 소가 밭을 갈 수 있게 됩니다.





김홍도의 <논갈이> 김홍도의 <논갈이> ⓒ 김홍도


이 말은 심경, 즉 밭을 갈아 엎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사실 사회와 경제, 인류에게 어마어마한 혁신입니다. 철기 이전의 농사라는 말은 1년밖에 못 짓는 농사를 말합니다.

​바꿔말하면 농사 한 해 지으면, 그 땅을 쓰지를 못 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양분이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과거에는 막 자라는 곡식밖에 심지 못 합니다. 땅의 힘을 쫙 빨아 들이는 인삼 농사같은건 꿈도 못 꾸는 것이죠.



그러나 소가 쓰이면서 쟁기로 밭을 심경. 즉 갈아엎을 수 있게 되면서 매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시스템이 완성 되게 됩니다.



2. 우경을 통한 비약적인 ​인구증가





신라 지증왕때 우경을 지시하면서 경상북도가 개간이 되어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납니다.



백제(전라도) - 신라(경상도) 순으로 땅이 개간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죠.



6세기 초 지증왕 때는 2백만, 다시 법흥왕과 진흥왕을 거치며 가야제국을 흡수하여 4백만정도로 고구려와 백제에 견줄만 한 대국이 되었고, ​

그래서 실제로 삼국통일 직전에는 고구려와 인구차이, 즉 국력차이가 나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인류역사의 발전은 부족국가 - 노예제 사회 - 봉건제 를 거쳐 현대의 자본주의 즉, 산업근대화에 도달하게 됩니다.

3. 그렇다면 일제의 주장은?



일제의 주장은 무엇일까요?



고려시대까지 노예시대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그나마 봉건제로 넘어와서 한일합방의 정당성을 피력하려는 것이죠.



이것이 일제의 3단계 전략인 무력통치-문화통치-민족말살정책 입니다.



세계대전 초기에 무력통치를 시행하던 일제는, 3.1운동을 기점으로 문화통치로 전략을 선회 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는 만주전을 위한 병사보급 전초기지로서 조선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여담입니다만, 일제는 이후 문화통치-민족말살정책을 피게 됩니다. 명분은 조선인에게도 황국신민이 될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창씨계명등을 강요합니다. 조금 있다 나오는 평균수명의 비약적 상승, 조선인의 교육률 증가 등 실제 조선평민들의 신분은 상승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얼핏 합리적인 주장이긴 합니다만, 이는 문화통치의 연장선일 뿐입니다. 결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압제가 정당하고 타당하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4. 내선일체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그러나 조선의 젊은이들이 미쳤다고 나가서 일본을 위해 전쟁을 하겠습니까? 때문에 민족말살정책을 통해 안나라(내) 일본과 조선(선)이 한 나라(일체)인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것이죠.




뉴라이트 진영도 뭐 이러한 일본의 노력이 우리나라에 나쁜 영향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보면 어떨까요? 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죠.





일본이 침략과 통치를 위해 도로와 항만, 병원등을 건설했고, 공장을 세워 산업화를 이루었고 우리는 그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에 즉,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겪었기 때문에 근대화를 이루었다 라는 것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입니다.




뭐 단순하게 얘기해봐도 이는 철저히 조선의 병참기지화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사회보장을 위해서 였지, 조선의 근대화와 진보발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두 말 할 필요 없지요.





​만약 식민지 발전이 발전타당성에 근거를 제시한다면, 식민지 시대를 겪었기 때문에 지금도 가난한 아프리카는 어찌 설명해야 되나요.


남미는 말할 것도 없구요. 브라질 정도가 그나마 인구와 자원을 바탕으로 조금 일어서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나마 2008 이후에 기를 못 펴고 있죠.


​여하튼 철도부설 공사와 미쓰비시 제철과 일본 제철의 제철소 건설, 일본 질소 비료의 진출에 의한 수력 발전소 건설 등이 더해지면서, 결과적으로는 1920 ~ 30 년대 한반도의 경제 성장률은 연간 약 4 %로 같은 기간 유럽 (1 % 대)과 일본, 미국 (3 %)에 비해 높은 성장을 하게 됩니다.


​ ​


그러나 일본이 회사령을 ​실시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조선인은 회사를 세울 수 없었죠.


일본인과 친일파만 회사를 세울 수 있습니다. 조선인은 노동자 계급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죠.


즉, 교육과 병원, 도로와 항만에 대한 이용권과 특혜는 조선의 발전이 아닌 모두 상위 1% 일본님들과 친일파님들께만 있었던 겁니다.


갑을논쟁이 심한 요즘의 모습을 보면 왜 사업의 참여권이 중요한지 따로 설명할 필요 없겠지요.




일제강점기 농민계층의 변화 ⓒ 네이버


회사령의 영향 ⓒ 네이버


못 믿으시겠다면, 위의 통계로 얘기해볼까요.


1910년대 토지대장 조사로 자소작농이 대폭 줄어들고 소작농이 느는 것을 볼 수있죠.


대신 한국인 소유 회사는 제자리 걸음이고, 일본인 소유 회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조선의 경제성장은 조선인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조서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만​ 돌아간 것입니다.










5. 내재적 발전론과 자본주의 맹아론








통일신라 때 이미 봉건제로 넘어왔고, 그 이후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입니다.




다만, 여기는 한 가지 논쟁이 있습니다. 근대를 언제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인데요.




근대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터져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그 두가지가 모두 없었죠.


유교국가인만큼 혁명이 어려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현대의 정치에서도 우리나라는 혁명성을 보기가 좀 어렵긴 하죠.




일본의 역사관은 그래서 시민혁명에 <4.19>, 산업혁명에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1970년대가 되어서야 근대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대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기간이 바로 일제시대라는 것이죠.




그 단적인 근거로 일제시대에 늘어난 <평균수명>을 듭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때는 인구의 대폭적인 증가가 있었는데요.


식민지 근대론자의 주장. 뉴라이트 측의 주장입니다.




​1910년 인구 1313만명 평균수명 24세
1942년 인구 2553만명 평균수명 45세











​통계에 따라 좀 다른 듯 하지만 위처럼 일본이 일제시대에 한반도 인구와 평균수명이 2배 가까이 늘게 해주었으며, 이것이 일제의 공적이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근거 있는 주장이지요. 단순한 주장은 아닙니다. 즉, 단순하게 비판할 이야기도 아닙니다.


늘 보면 이를 논리적으로 대응도 못 하면서 감정적으로만 대하는 분들이 있어서 (심지어 경제학자들도 그러하더군요) 이 글을 정리해봅니다.










6. 내재적 발전론의 이론적 근거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이양법이 도입이 됩니다.





이양법 즉, 모내기는 고려 중기면 도입되나,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시킵니다.


모내기의 장점은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단위생산량이 대폭 증가하는 것이고, 둘째는 김매기를 하기가 쉽다는 것인데요.


간격을 맞춰서 심어놨기 때문에 간격을 맞춰서 잡초가 자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모내기를 법으로 금지시킨 것입니다. 대체 왜 일까요?





우리나라는 태백산맥이 있죠.


지리시간에 다 배웠듯이 이 태백산맥은 높새바람을 만듭니다. 높은 산맥을 넘어오며, 비를 뿌리고 내려오면서 고온건조한 바람이 불어오게 되는 것이죠. 이를 푄 현상(Föhn phenomenon)이라고 합니다.



푄현상 ⓒ 네이버


​​


​이 높새바람때문에 우리나라는 고질적인 봄가뭄이 발생합니다.


즉, 모내기를 하면 이 가뭄 때문에 다 모종들이 다 죽어버리는 것이죠. 때문에 법으로 금지시킨 것입니다.


모내기 이앙법은 소위 대박 아니면 쪽박인 것이죠. 근데 쪽박이면 굶어죽음으로 할 수가 없는 것이죠.




때문에 계속해서 직파법을 고수하게 됩니다.










7. 임진왜란의 발생








이 때 우리나라의 큰 전란인 임진왜란이 터집니다.





임란 이후 백성들이 많이 죽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이 때문에 직파를 할 만한 정도의 (젊은) 인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동시에 임자 없는 논이 다수 발생하게 되지요. 이 때 저수지 축조기술이 개발되면서 여기에 저수지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8세기 말에는 큰 저수지가 3,590개소, 작은 저수지가 2,265개소, 합하여 저수지의 총수가 약 6천 개에 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수원의 서호(西湖), 김제의 벽골제, 홍주의 합덕제(合德堤), 연안의 남대지(南大池) 등은 가장 큰 저수지로 꼽혔다.









우리 선조들은 이를 바탕으로 봄가뭄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내기, 즉 이앙법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래도 가뭄을 못 이기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면, 이전에는 직파법이라 먹고는 살았으나 이앙법 이후의 가뭄에 농사를 망쳐버리면 방법이 없게 되버립니다. 이 때문에 가뭄이 오게 되면, 논을 팔고 소작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임진왜란 후 저수지 추이 ⓒ 교과서





이로 인해 대농장을 소유한 대지주가 탄생하게 됩니다.​






논농사는 대단위의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산업입니다. 때문에, 노예제도에서는 논농사가 정착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모내기는 노동력이 단일 시간에 집중적으로 필요하게 되죠.








8. 임금 노동자의 출현








여기서 소작이 아니라 고용, 즉 임노동 관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출발점이 나타나는 것이죠.




봄에는 그러면 모내기 일하고, 나머지 3계절은 무엇을 하게 될까요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은(銀)의 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은광 개발이 점차 활기를 띄게 되며, 이들은 바로 광산 노동자가 되게 됩니다.


큰 자본을 모으는 자본가도 나게 되는데요. 이른바 덕대(德大)라고 불리는 물주가 노동자를 고용하여 대규모 광산을 개발하게 됩니다.





​​


그리고 중국이 영국과 아편전쟁이 터지면서 화폐전쟁 즉, 영국의 금본위제와 중국의 은본위제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이에 ​중국내부에서 금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죠.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금광 개발 붐이 입니다.




따라서 봄에는 모내기, 다른 계절에는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즉, 앞서 말했던 자본 임노동 계약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당연히 광산 자본가가 생겨나게 됩니다.




일본의 도움때문에 근대화가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적으로도 근대 자본주의로 가는 자체적인 모습들


즉, 근대사회의 태동,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내재적 발전의 모습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후 개항을 하면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회와 경제적으로는 조선도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고, 시장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지요.


당연히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발전하고 있던 조선사회와 경제와는 별개로 정치는 오히려 보학으로 빠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19세기 들어서면서 세도정치가 자리를 더욱 굳건히 잡으면서, 진보하고 발전하는 사회에 역행해 정치는 더욱 보수적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500년전 고려시대 때 혁신적으로 들여온 성리학을 답습에 답습하면서 자신의 정치논리로만 키워갔던 것이죠.






9. 자본가의 출현







노동자의 탄생은 이해가 되셨을테고, 자본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이이와 조광조가 공통으로 주장했던 제도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수미법입니다. 쌀로 세금을 내자는 것이죠.




조선 시대 세금은 3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부역(노가다),


하나는 공납(특산품),


하나는 전세(수확 곡식)입니다.





이 중에서 특산품을 바치는데서 국가입장에서는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흉년이 들면 세금이 안 걷혀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이 공납을 전문적으로 납부하는 상입이 발달하게 됩니다.





세금은 상인이 알아서 내고, 이 상인에게는 백성들에게서 공납 세금을 직접 징발할 수 있는 권한, 독점권을 주는 것이죠.


대신 납부하는 방납업자가 상인이니까 당근 100개를 세금으로 내고, 200개를 징발하는 겁니다.






​조선 시대에 핸드폰이 있었다면 방납업자들과 이렇게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참고로 마지막에 빠꾸 먹는다는 말을 설명하면 이렇다.


산을 건너 전복을 구해오더라도 돈이 원가에 100배가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공납을 방납업자에게 안 사고 실물로 직접 구해오는 이들에게는 관가에서는 ​트집을 잡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서민은 울며겨자먹기로 방납업자에게 살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게 된다.


참으로 꼼꼼한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는 정경유착의 선례라 하겠다.​








이를 방납의 폐단이라고 부릅니다.


문헌에 따르면 1~2배 수준이 아니라, 100배의 가격을 착복했다고 합니다.




민중을 가장 괴롭히는 것이 바로 16세기의 방납. 17~18세기 군역. 19세기의 환곡입니다.


군역은 아실테고, 환곡은 흉년기에 곡식을 양민들에게 빌려주고 추수기에 받는 것인데, 삼국시대부터 있던 풍습이 조선시대에 제도로서 정착된 것입니다.​


하지만 왜란과 호란으로​ 나라 재정이 쪼들리자 백성의 구제가 아닌 재정확보 수단으로 삼게 됩니다.


즉,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은 선례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공납을 폐지하고 세금을 쌀로 걷으라고 이이와 조광조가 상소를 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수미법입니다.




이 수미법이 본격화되는 것이 바로 영화 광해에 나오는 대동법입니다.





왕은 세금을 쌀로 걷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필요한 것은 쌀이 아니고 공산품이죠.





덕분에 이 공산품을 국가에 판매하는 상인계급이 발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시장경제체제가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화폐경제는 나오지 못 하더라도 쌀을 매개로 화폐의 역할을 강제하는 시장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중계무역과 인삼무역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 그 유명한 개경상인 개상(송상), 일본무역의 핵심 동래 내상, 중국과 무역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의정부 상인 의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상인, 즉 도고라 불리는 자본가가 발달하게 되는 것이죠.







10. 화폐경제의 발달











상업의 발달은 결국 화폐경제의 발달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대동법의 정착되면서 대동미를 공산품과 특산품으로 바꾸어줄 상인세력, 즉 시장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이에 자연스럽게 시장과 공산품의 생산등이 활발하게 됩니다.





이는 자연스레 일반 서민들이 공산품과 곡식, 채소와 고기등을 교환하는 장터가 활발해지는 단계에 이르지요.





이 때 청나라에서 패상봉쇄를 해지하며 대일무역이 증가하자, 일본에서는 은이 ​​부족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은 대신 구리로 결제를 시작하게 되고, 조선에는 구리가 흔하게 되지요.






이를 이용해 장희빈 누나로 더 유명한 숙종 오빠가 상평통보를 통용시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엽전이라는 것이지요.









그 이전까지의 조선경제는 화폐가 있긴 했지만 사실상 잘 사용되지 않아, 화폐경제가 아닌 실물경제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화폐경제가 시작되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나라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됩니다.


일본이나 뉴라이트 계열은 조선시대를 봉건제, 심지어 노예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 사실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약하게 되는 것이죠.




더구나 6.25 전쟁 때 이런 일제시대의 시설들은 다 파괴되었으니까요.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받은 혜택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합니다.





굳이 따진다면, 잔재를 불​하받은 불산기업들 정도일까요? 그들은 결국 지금 모두 대기업이 되었으니까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렵고 배고픈 시절을 거치면서도, 안 먹고 안 써서 아껴온 돈으로 저축해서 그 돈으로 공장짓고 해서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이룬 것을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대해서 심층 분석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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