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을 통해 학교교육을 말하다

박성우 '삼학년'을 통해 과도한 사교육에 대한 생각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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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perfect95)등록 2015.06.04 16:52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쓴 시가 화제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로 시작되는 시인데 엄마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 동시라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극단적인 묘사 없이도 학원에 가기 싫은 마음을 충분히 전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잔혹하고 비교육적인 접근 방식으로 다가설 필요가 있는지 반문하는 사람들도 적잖다. 뜨거운 감자로서의 치열한 공방은 잠시 논외로 두더라도 한국 사회가 입시와 경쟁이라는 감옥에서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기는 하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대해 정부가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해 감염 범위가 확산되고 감염자 수가 늘어났듯 병들어 있는 이 사회에서 '과도한 사교육'이라는 바이러스를 잡아주지 못하면 건강하고 행복해야 할 아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버리는 어른들의 만행은 그 어디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육아정책연구소가 지난 2014년 발표한 '영유아 교육·보육비용 연구서'에 따르면 영유아 사교육비가 2013년 대비 22% 상승, 3조 2300억 원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또한 한국소비자원 조사 결과 초등학생의 월 사교육비는 평균 37만 원이라고 한다. 더욱 안타까운 부분은 아이들이 영어, 수학을 비롯한 교과 전문 학원에 다니며 맹목적인 지식 쌓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서울 강남 지역에서는 승마, 펜싱 등 고가의 체육 과외가 유행하기는 한다.) OECD 국가 중 '더 나은 삶' 지수에 있어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을 때 긍정적인 대답을 한 사람의 비율이 우리나라가 가장 낮았다는 점은 통계의 허상을 고려하더라도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등학생의 부모가 2016 대입 설명회에 참여하는 모습, 요상한 커리큘럼으로 초등학생들을 의대 진학반으로 유인하는 모습 등은 지금, 여기의 한국사회에서 빈번히 연출되는 장면이다. 그 진풍경의 주인공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무지로서의 용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문제의 본질을 사교육비의 증가에 두는 것은 케케묵은 논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결국 과도함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학습자로서의 어린이에게 선택과 자발적 의지라는 선물을 안겨주자는 것이다. 영어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라면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요소마다 필요한 힘을 빌려 쓸 수도 있는 법이다. 굳이 선행학습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사교육비 증가의 주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죄책감도 가질 필요 없다. 교과 공부를 벗어나 아이의 감성을 충전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본인이 원치도 않는데 태권도장이나 피아노학원에 다니게 할 필요도 없다. 부모의 필요와 선택이 한 인격체로서의 어린이에게 강요로 연결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아이가 미성숙한 존재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에 현명한 판단의 몫은 어른인 부모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주의 전체 공간을 가로축으로, 인류가 함께한 역사를 세로축으로 두었을 때 한 인간의 존재감은 과연 어느 영역에 어떤 점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시류에 대한 본인의 눈이 정확하리라는 과도한 용맹보다는 아이들의 순수한 직관과 본능을 믿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를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가도 몽땅 털어 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를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박성우, '삼학년'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는 화자의 마음이 예쁘다. 미숫가루를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는 화자의 행동도 갸륵하다. 미숫가루의 맛을 돋보이게 해 줄 다양한 재료들을 우물에 넣으며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화자의 모습도 예쁘다. 미숫가루를 먹고 싶다는 자발적 의지가 있다는 사실이, 많이 먹기 위해 동화적 상상이든 만화적 발상이든 과도한 객기이든 뜻한 바에 다가서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이, 미숫가루를 저으며 맛난 음료를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성을 들였다는 사실이 이 아이를 예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도한 사교육'에 길들여진 아이에게서 화자의 마음과도 같은 순수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 선택을 박탈당한 아이에게서 화자의 행위와도 같은 의지와 열정을 발견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후 머리를 쓰다듬어 줄 사람을 만날지 뺨을 때려 줄 사람을 만날지는 본인의 몫이거나 숙명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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