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우리 모두의 특별한 죽음을 그린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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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lwllo)등록 2015.06.08 09:34
죽음에 관하여

[죽음에 관하여]는 시니와 혀노의 네이버 데뷔작이다. 그러나 미숙함은 없었다. 저승은 흑백으로, 이승은 다양한 색깔로 구현해내는 연출 감각은 매우 탁월했다. 그러나 가장 큰 매력은 이 만화의 에피소드다. [죽음에 관하여]는 이승에서 죽은 사람이 저승에서 신과 만나는 모습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풀어간다. 수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감에도 억지스러움은 드물었다. 독자들을 울리고 혹은 깨닫게도 하며 삶의 다양한 면모를 그려낸 것이다. 이는 작가가 지닌 삶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에피소드라도 좋은 소재와 설정이 없었다면 전해질 수 없다. 본 글은 [죽음에 관하여]가 이토록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자 설정에 집중하고자 한다.

1. [죽음에 관하여]의 소재 -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

어린아이 둘이서 손가락 끝을 마주댔다. 힘을 주어 뻣뻣해진 손가락을 만져보며 "이게 시체 만지는 느낌이래"했다. 둘다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그렇구나 신기하다 한다. 어린아이에게 죽음은 다른 사람만 겪는 것, 뻣뻣하고 서늘한 시체일 뿐이다. 반면 어른이 될수록 죽음은 나쁜 사람에게 돌아가는 벌이거나, 착한 사람이 겪는 억울한 일, TV에서 보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드러난다. 죽을 죄를 지었네, 착한 사람이 그런 일을 겪다니, 끔찍하다는 감탄사가 그 방증이다. 그리고 늙을수록 죽음은 그저 생의 마침표가 된다. 특별한 벌이나 상이 아닌 그저 겪게 되는 일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죽음의 의미가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모두가 가진 호기심은 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호기심이다. 항상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삶의 끝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이후'라고 표현하거나 '될까'라는 표현을 쓴다. 죽음이 하나의 통과의례이고 그 이후에 어떤 삶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신과 죽음, 저승에 관한 신화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죽다는 점에서 이러한 호기심은 거의 '본능적이다'.

그리고 이 호기심은 종교와 합쳐진 예술로 나타났다. [블리치], [유유백서], [헬퍼], [타나토노트]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들 중 [블리치]나 [유유백서] [헬퍼]는 완전히 동양의 민간신앙을 차용한 만화다. 이들에게서는 사신이나 저승사자, 그리고 옥황상제나 저승을 주관하는 신 등이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저승을 그린 만화는 많은 편이다. 비단 이 둘뿐 아니더라도 [신과 함께]나 [염라공주 모모레] 등 한국 만화에서도 자주 동양 전통의 저승이 배경소재로 쓰이기 때문이다.

[타나토노트]는 자주 사용되는 '빛기둥'과 '유체이탈' 등의 소재로 소설을 풀어나간다. 이 역시 참신한 설정은 아니다. 가사상태에 놓여 있거나 임사죽음 체험을 한 이들의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 신, 천국의 전통에서 자주 사용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베르베르가 그린 타나토노트의 저승이 참신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죽음의 관하여]의 저승은 비교적 새롭다. 만화 속 신의 모습이 [브루스 올 마이티]와 같은 영화에서 구현되긴 했지만 자주 나타나는 신의 유형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만화는 만화라는 틀 속에서, 만화의 특징을 활용해서, 자신만의 철학을 담아 독자적인 저승세계를 구축해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2. [죽음에 관하여]의 설정 - 신과 저승

"당신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그대가 보고 싶은 형으로 날 보게 될 거다"

유비쿼터스. "언제 어디에나 있다"는 뜻으로 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신은 그야말로 유비쿼터스하다. 전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도 신은 이 모든 이들의 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 신은 신답다. 인간과는 달리 시간과 공간, 차원의 제약을 완전히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신의 면모를 드러낸다.

더욱이 그는 형태로부터도 자유롭다. 어떤 모습으로도 존재할 수 있기에 어떤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존재를 모습으로 인식하고, 모습을 띤 것을 이름 지어 존재를 인정한다. 즉, 볼 수 있는 것만을 인식해 그것에, 적절한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이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이름도, 정체도 없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이 '자신을 어떤 것으로 보고 이름 불러도 좋다'고 허락하는 것은 그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양으로 다가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이 그 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규정짓느냐에 따라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의 특징이 명료하게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신의 특징은 이 만화의 가장 큰 '장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초반의 설정과는 달리, 작품이 중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신은 아저씨(미중년의 아저씨의 모습)으로 고정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만화라는 특성 상, 캐릭터의 모습에 독자의 팬심이 움직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개인의 삶 속 가장 큰 특징을 '그림으로서'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는 초반의 열린 설정을 살리지 못했기에 작가가 설정한 '열려있는 저승'의 이미지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하얀 공백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아저씨"가 이 만화 속 저승의 전부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잘 들어주는 신비로운 아저씨'가 신이 되자, 신은 곧 독자이자 작가의 노골적인 페르소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만화 속에 있지만 만화 밖 독자들과 동일시되며, 만화 안팎에 걸쳐져 있는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만화 속 신은 대부분 조언을 하기 보다는 죽은 이의 사연을 거의 들어주며 간단한 대꾸만을 한다. 그리고 윤리적인 문제가 걸렸을 시 한 두 마디의 대사를 짧게 남길 뿐이다. 이는 신이 들어주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 '들어주는 설정'을 통해 독자가 캐릭터로부터 자신의 사연과 감정을 노골적으로 듣게 하는 것이며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신의 입을 빌어 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신은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적절히 잘 넣은 '작품 속 독자'이자 '작가의 한 마디'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물론 이 신은 전지전능하기도 했다. 이 전지전능함은 신의 캐릭터를 드러내기 보다는 만화 자체의 독자적인 저승을 구현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는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이다. 예컨대 저승에 온 살인자는 신에 의해 "역지사지의 체험"을 벌로서 겪게 된다. 자신이 죽인 당사자, 그의 남편, 아내 등의 입장을 돌아가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주어진 벌은 죽을 때 당시의 고통과 피해자의 슬픔, 이를 이해하게 됨으로써 생긴 죄책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존의 '착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저승관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작가 자신이 구축한 새로운 저승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저승의 모습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원하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며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복수를 원하는 독자의 복수심도 충족시키고, 살인자를 불로 태우는 것보다 인도적이기에 연민을 자극하며, 이를 통해 에피소드 역시 전개시켰기에 연출력을 과시했을 뿐더러, 작가 개인의 연출력과 상상력을 부각시키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3. 평을 마치며

화력한 색도, 뛰어난 작화력도, 예쁘거나 멋진 캐릭터도 없다. 이 만화는 웹툰이면서도 흑백만을 주로 사용했으며 대사 역시 절제돼 있었다. 그러나 강했다. [죽음에 관하여]가 연재되던 당시, 이 만화는 해당요일의 상위에 랭크되곤 했던 것이다.

이는 대중만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일이라고 보는 게 옳다. 본디 대중만화는 대중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목표 하에 '웃기고 폭력적이며 야하고 자극적인 소재'가 사용되기 마련이다. 결국 대중만화는 싸구려이자 천박한 하위문화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됐다. 그러나 이 만화는 웹툰이라는 점에서 대중만화를 표방하지만, 대중 만화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았다. 오직 연출력과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 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진한 감동과 공감을 전하는 것으로만 승부를 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대중 만화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시니와 혀노는 자신만의 팬층을 구축한 작가가 됐다. 그리고 이들의 만화가 쌓일수록 이들의 작품과 비슷한 분위기를 표방하는 다른 작품 역시 창작될 것이며 결국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기에 이를 것이다. 이들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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