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 절망은 도돌이표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리뷰

검토 완료

신민기(soil84)등록 2015.09.02 14:44
말하자면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 같은 것이다. 아무도 없음은 언제나 차갑고, 절망은 그렇게 시작된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검게 칠한 잉크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던 날, 미나(권소현)는 남들에게 자신이 한낱 웃음거리에 불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제야 자기에게 아무도 없음을 확신한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만이 미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시간이 지나 미나는 보험회사 콜센터 직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다음은 화장품 공장 여공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사창가까지 흘러들어 간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여고를 다닐 때부터 미나는 항상 여자들이 모인 공간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도망치고 쫓겨나도 이 공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남성은 여자들을 군림하는 존재로 그려지는데, 영화는 그런 남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미나를 죽음까지 몰고 가는지 보여준다.
미나가 사는 공간에선 여성의 존재는 두 가지로 나뉜다. 군림하는 남성을 이용하려는 자와 이용당하는 자. 그리고 그것은 해림(서영희)이 근무하는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해림과 미나는 남성에게 이용당하는 여자에 속하지만, 남성을 이용하려는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해림은 미나와 다르다.
섹시스타 마돈나가 시각적 매체를 통해 남성들에게 성적 판타지로써 소비된다면, 영화 속 마돈나인 미나는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실재의 도구로써 소비된다. 남성들이 미나에게 요구하는 건 오직 섹스뿐이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남성들에겐 죄책감과 동정과 같은 감정 따윈 없다. 그들은 오로지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원초적인 힘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자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미나는 남성이 군림하는 여성들의 집단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쳐 보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미나에겐 절망이 희망보다 가깝고, 절벽의 끝자락은 점점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올 뿐이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게서 희망을 찾아보려 하지만, 그것마저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미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남성들은 미나의 죽음마저 이용하려 한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태어난 아기에게 해림은 엄마의 이름을 대물려 주는데, 이것은 새로운 마돈나의 탄생을 알림과 동시에, 절망은 언제나 도돌이표처럼 연주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는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영화 속 남성의 상징은 납득하기 힘들며, 더불어 여성의 존재까지 이해하기 힘들다.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자 한 것보다는 마치 세상은 이런 사회인 것 마냥 과장되게 표현한 것 같아 관객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마돈나>는 누구를 위한 영화인지, 무엇을 위한 영화인지 그 맥락을 찾기가 어려웠고, 미나의 공간과 해림의 공간이 쉬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의 엉성함이 드러났다.
덧붙이는 글 리뷰보단 비평에 가까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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