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리본들

미얀마 변호사, 군장교 출신 법관 임명에 반대하여 “노란 리본” 캠페인 시작

검토 완료

국제민주연대(khis21)등록 2015.09.22 13:45

노란 리본을 착용한 변호사들 항의의 의미로 노란리본을 착용한 미얀마의 변호사들 ⓒ Nyein Chan Kyaw 변호사 페이스북


지난 9월 9일, 미얀마 네피도 법자문 위원회 소속 변호사들은 데키나 지방법원 앞에서 사법부의 군사화에 반대하는 노란리본 캠페인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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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장교 출신 인사들의 법관 임명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은 노란리본 ,
출처: Radio Free Asia)

미얀마는 2010년 총선 이후 민정이양이 이루어져 표면적으로 군사정권이 종식되었으나, 여전히 의회 의석 대부분과 행정 부처의 요직에 군부 인사가 자리잡고 있어서 온전한 민간 정부 출범이 요원한 상황이다. 특히, 독립성을 유지해야 할 사법부까지도 군장교 출신 인사들이 요직을 장악하게 되면서 시민을 상대로 한 법원의 공정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8월, 군장교 출신 인사 20여명을 미얀마 연방최고법원 법관직에 임명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변호사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2010년 10월 제정된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판사로 임명되기 위해서는 법과대학 졸업 이후 판사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또한 연방최고법원 및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되기 위해서는 판/검사 또는 변호사로서 법조인 경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현재 헌법 하에서는 대통령이 저명법률가로 판단하는 경우 경력 유무에 상관없이 판사 임명이 가능한 실정이다. 현재 미얀마 연방최고법원 수석재판관 Htun Htun Oo를 포함해 판사 7명 중 4명은 군장교 출신이다.

양곤의 변호사인 Aung Soe는 "군출신 장교들을 군법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시민을 상대로한 법원에서는 제대로 된 법관들이 일해야 한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혔다. 노란 리본 캠페인 참가자들은 사법부가 준군사적 성격을 띄게 되면서 상명하달식으로 움직이고, 집권여당인 집권 통합 단결 발전당(USDP)의 입맛에 맞게 판결을 내린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시아 인권위원회(AHRC)도 이런 사법부 반군사화 움직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아시아 인권위원회는 지난 9월 10일 법적 자질과 전문적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법관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국가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군장교 출신 법관을 기용하는 관행을 끝낼 것을 요구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변호사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노란리본 캠페인은 현재 검은 리본 캠페인 참가자들과 힘을 합치려 하고 있다고 아시아 인권위원회 소속 미얀마 변호사 Min Lwin Oo는 말했다.  7월 말 미얀마 보건당국이 군출신 인사들을 해당 부처에 임명할 것이라고 밝힌 것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검은 리본 캠페인은, 의사들 뿐 아니라 간호사, 의료 기관 종사자들, 의대생들까지 참가한 대규모 저항 운동이다. 이 운동의 성과로 미얀마 보건부 장관은 추가적인 군출신 인사 임명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해당 분야에서의 충분한 경험이 없는 군장교 출신 인사들이 요직에 임명되는 현실에 대해 저항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리본 캠페인의 협력은 정부에게도 큰 압박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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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리본을 착용한 변호사들
출처: Nyein Chan Kyaw 변호사 페이스북)

앞으로 미얀마 변호사들은 노란리본 캠페인을 네피도 관할 지역의 시법원 및 핀마나, 르위 등 하급 법원 지역들까지 확대해 나갈 전망이다.
올해 11월로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 사법부의 독립 문제를 포함하여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진전이냐 후퇴이냐를 두고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사법부를 포함하여 미얀마를 사실상 통치해온 군부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군부가 총선 결과를 수용할지 여부도 초미의 관심사이다.

한국에서도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를 추모하는 검은 리본을 SNS에서 최근 많이 볼 수 있었다. 바로 버마 NLD(민족민주동맹)한국 지부장이었던 내툰나잉(Nay Tun Naing)씨가 지난 9월 4일에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양곤대학 시절, 8888항쟁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뒤, 1994년에 한국으로 들어와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민주화 투쟁을 펼쳤던 고인은 2003년에 동료들과 함께 미얀마 인으로는 처음으로 난민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특유의 성실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한국시민사회에 버마(미얀마) 민주주의 투쟁을 알리고 함께 버마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싸워온 고인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국내 미얀마 공동체 뿐만 아니라 한국 시민사회에도 큰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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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내툰나잉 대표가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 고 내툰나잉씨는 지난 9월 11일에 화장 후 부천석왕사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출처는 버마 NLD 한국지부 페이스북)

21년의 기다림 끝에, 총선이 끝나면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던 민주화 운동가는 결국 머나먼 한국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그리도 소망하던 고국의 민주화는 리본을 단 모든 이들의 소망처럼 실현되기를 한국의 시민사회는 함께 소망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국제민주연대 김태민 인턴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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