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리오 (sicario):암살자의 도시>(2015)에서 "늑대들의 소굴"

검토 완료

이창우(cwleekr)등록 2016.01.31 15:25
영화 <시카리오(sicario):암살자의 도시>(2015)에서 "늑대들의 소굴"

왠만하면 FBI 무장요원이 주인공인 영화를 안좋아하는데, 드니 빌뇌브 감독의 전작인 <프리즈너>가 워낙 인상 깊어서 찾아 보게 되었다. <시카리오(sicario)>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칼 슈미트가 <정치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법이 필요 없는 "예외상태"는 우리가 아는 미국, 그 합법적 민주주의, 여론정치가 지배하는 "정상상태"를 떠받드는 근원적 세계라는 것이다.영화 내내 정상성에 집착해오는 바람에 연달아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여주인공(FBI 요원)은 법을 초월한 주권자를 상징하는 미지의 암살자(베니치오 델 토로 분)로부터 다음과 같은 충고 내지 꾸중을 듣는다.

"작은 도시로 전출 가세요. 법이 아직 살아 있는 곳으로.
여기선 살아남지 못해요. 당신은 늑대가 아니오.
지금 이곳은 늑대들의 소굴이오. (This is a land of wolves now)"

'허울좋은' 문명인의 세계와 '진실이 숨어 있는' 늑대들의 세계를 대립시키는 사고방식은 뭔가 경각심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핵심을 은밀히 빠뜨리는 함정이 숨어 있다. 문명인은 나쁜 늑대를 물리치기 위해 좋은 늑대로 변신할 수 있다. 즉. 문명인이면서도 동시에 늑대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오직 다음 두 가지 선택지만을 강요한다.

첫째, 문명인은 (여주인공처럼) 자유주의, 합법주의에 쩔은 순박하고 무력한 존재다. 그러므로 문명인의 삶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작은 도시에나 가라.) 슈미트가 증오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주의자들. 리버럴 부르주아.

둘째, 만약 당신이 미국이 아닌 멕시코 즉, 늑대 세계에 있다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나쁜 늑대에게 잡아 먹히는 양이 되는 것 밖에 없다. 벌거벗겨진 채 훼손된 시체가 되어 고가도로에 매달린 '호모 사케르' 들. 예외상태의 벌거벗은 생명은 주권의 실존을 입증하는 도구다.

여기서 "문명인 + 늑대"라는 잡종은 허용되지 않는다. 품위 있게 살고 싶으면 잔인한 현실을 외면하고 시골로 도피하든가, 주류 현실의 한가운데 있으려면 잔인한 주권자와 대면하고 그의 활동에 합류할 수밖에 없다. 늑대란 결국 "훈련된 야만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늑대의 세계에 적응하도록 "훈련된 문명인"의 범주를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아버지가 죽은 줄도 모르고 아버지와 축구할 시간만을 기다리는 영화 맨 마지막의 멕시코 소년은 사실 한명이 아니다.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은 매일 매일 양민을 납치, 고문, 살해하고 있다. 피해자의 무리가 있고 그들이 훈련되고 무장할 가능성은 왜 상상조차 하지 않는가? 단지 아버지의 복수라든가, 또 다른 비적 두목이 되기위해서가 아니라, 대안적인 세계의 구축을 위한 무장을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허약한 문명인'과 '늑대에게 잡아 먹힐 숙명의 양'이라는 양자 택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늑대의 소굴에 걸맞게 단련된 문명인을 소원할 필요가 있다. 나쁜 늑대와 싸우는 좋은 늑대, 혹은 늑대와 싸우는 무장한 양들이 실존할 권리가 주장되어야 한다. 부조리하지만 불가피하다는 아이러니에 침잠하고, 애매하고 음울한 자기 냉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문명인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영화는 이제 질릴만도 하지 않은가?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