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관장과 친구들

- 국제주의와 트리컨티넨탈리즘(Tricontinentalism) 시각에서 본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사건-

검토 완료

이미정(name0925)등록 2016.02.01 18:33
                                                                                                                                         이 름 (무위예술가)

문화는 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가 아닌 세계주의(cosmopolitanism)인가

지난 12월 미술인(국선즈)들이 신임 국립현대미술관장인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Bartomeu Mari Ribas 49)에게 '일체의 권력으로부터 검열과 통제에 반대한다'는 윤리선언을 요구했다. 이에 마리관장은 취임식 기자회견에서 "어떠한 검열에도 반대하며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마리관장의 공식적인 선언은 한국 문화예술인들과의 약속이자 마리관장 자신에게도 검열에 대한 과거의 이력을 만회할 기회가 될지 지켜 볼 일이다. 그런데 마리관장 선임에 반대하는 한국 미술인들의 탄원이 알려질 지난 연말에 마리관장을 지지하고 두둔하는 해외의 미술전문가들의 주장은 한국예술가들의 자존감을 상하게 했는데 나는 이에 굴절된 세계주의를 비판한 국제주의자 시각에서, 예민하게는 한국현대미술의 포스트식민주의로, 구체적으로 트리컨티넨탈리즘적 사건이라 진단한다.

먼저 전(前) "영국 테이트모던 관장인 크리스 더컨(Chris Dercon)은 한국 미술인들의 마리 관장의 반대 입장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 일본, 인도와 경쟁에서 지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한국 미술관에 외국인 관장이 적절한가에 대한 질문에 "자신도 벨기에 사람이지만 영국과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 미술관에서 일했고 테이트 모던의 임기가 끝나면 베를린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한국인들이 외국인 미술관장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건 한국의 문제지만 결코 문화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문화는 전세계적인 것(Culture is about cosmopolitanism)"이라고 강조했다." -2015.11.16 헤럴드 경제-

이 인터뷰를 읽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나는 지인 미술인들과 잠시 SNS에서 비판적으로 반응했고 이후 크리스 던컨 관장이 말하는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이라는 세계주의가 오늘날 예술장에서 어떻게 전용되는가'에 주목하게 되었다. 세계주의의 사전적 어원이란,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전제하는 세계(시민/동포)주의(cosmopolitanism)로 동시에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뿐 아니라 "이성"을 지닌다는 인간존엄성을 강조한 평등의 개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이상적인 세계주의(cosmopolitanism)는 국가적 차원을 넘어 세계적인 무한경쟁의 이데올로기로 변용되어 각국 자본가들의 무한할 것 같은 교역의 활극장이 된 신자유주의 이론에 복무한다. 상기하자면, 세계주의(cosmopolitanism)는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침탈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었기에 이에 비판적인 국제주의(internationalism)가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대안용어로 나온 지 오래다.

그런데 세계굴지의 현대미술관 관장인 크리스 던컨이 굳이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대신 세계주의(cosmopolitanism) 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의문스러웠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세계주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복고 운동일까. 굳이 국제주의를 마다하고 후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거쳐 폐기해야 할 세계주의(cosmopolitanism)를 운운하는 전(前) 테이터 모던 미술관장의 현대미술에서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지고 이에 대해 국제주의와 트리컨티넨탈리즘(Tricontinentalism)의 시각에서 비판의 입장을 취한다.

현대미술에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시각과 소통에 대한 태도

       
만약 던컨 관장이 말하는 세계주의가 포스트식민주의나 트리컨티넨탈리즘(Tricontinentalism)을 초극한 것이라면, 정확히 비례하지는 않더라도 서구의 주요 문화요직에 '동등한 권리와 의무 그리고 이성을 가진'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미술전문가들도 포진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오래 전부터 서구 중심으로 편재[偏在]된 문화예술의 논리에 따라 고착된 헤게모니의 심한 불균형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그들이 사례를 드는 국가를 넘나드는 국공립 미술관장의 임명 사례가 여전히 유럽내 인사들의 특권으로 확장되어 유럽중심적인 배치를 아시아에 적용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해 폭력적으로 까지 느껴진다. 그 점이 글로벌한 세계주의를 또 다른 유럽중심주의인 로컬주의로 환원됨은 국제주의가 '진보'를 매개하기에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두고 신중한 논의를 필요로 하는 것과 달리, 세계주의의 특성인 '보수'성을 일방적으로 예술장에 전이시키며 증명하는 사례가 된다. 따라서 그들의 발언에서 느끼는 모순과 무례함은 지역주의 이전에 국제주의 시각에서 먼저 비판하게 된다.

더욱이 테이트 모던 미술관장은 "문화는 전세계적인 것"임을 강조하면서 "한국이 외국인 관장을 반대한다면 다른 아시아 국가와 비교해서 경쟁에 지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아시아를 대상화된 타자로 설정하고 서구의 예술문화 논리로 경쟁을 조장하는 발언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비판과 함께 폐기되어야 할 경쟁강화의 덕목으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신물나게 비판하는 21세기 현대미술의 담론에서도 구태를 조장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또한 아시아의 현대미술을 동질적이고 전체론적인(holistic) 것으로 인식하면서 마치 다양한 피식민자의 문화적 특성을 단순화하여 하나의 범주로 인식하려는 식민자들의 태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아 위험하기까지 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이후에 문화예술은 세계주의(cosmopolitanism)의 표준으로 로컬을 규율하고 위세를 가해서는 안되고 로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소통에 임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따라서 마리관장의 국현관장 지지 성명이나 입장을 표명한 유럽의 미술전문가들이 먼저 반대 성명에 서명한 현지이자 로컬의 입장인 한국국립현대미술관의 내홍(內訌)과 문제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검토했어도 그런 입장 표명은 나올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016 광주비엔날레의 마리아 린드 총감독의 지지발언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문제의 본질과는 무심하거나 무성의한 것처럼 보인다. "외국사람이 들어오면 새로운 시각을 전달할 수 있고 더욱 풍요로울 수 있다"... 스톡홀롬 뮤지엄 관장으로 영국인 데이비드 엘리엇이 임명됐었다. -뉴시스  2015.12.03" 반복하지만 흔하게 볼 수 있는 유럽예술전문가들의 유럽내에서의 문화계 요직의 임명을 이 경우에 사례로 드는 것은 경솔하다. 설령 아시아 국공립 미술관에 유럽의 예술계 인사들이 임명된 사례가 있다 해도 이번 한국국립현대미술관 문제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의 문제를 타계하는데 적합한 인사가 초대되어야 하는 것이 핵심이기에 그런 기사를 접한 독자로서 당면한 사태에 적절하지 못한 인터뷰 대상선정으로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인터뷰 기획의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덧붙이자면, 국공립미술관장직과 일회적인 전시기획자로서 비엔날레 총감독의 역할은 다를 뿐 아니라 한국의 국현사태에 대한 본질과 배경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런 답변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트리컨티넨탈리즘(Tricontinentalism) 시각에서 이 문제를 보는 이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선임을 두고 예술 차원에서 비중있게 검토해야 할 것이 있었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연구는 여전히 진행형에 있고 비엔날레같은 스펙타클한 국제적 행사가 도입된 지 20년이 지났으며 수많은 구미유학생들이 예술대학에 포진해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들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및 예술관련 학술대회뿐 아니라 온라인이라는 매체를 통해 서구의 예술경향은 피상적이든 심도있든 속도감 있게 영향을 받고 있어 오히려 해외작가 모작(模作)의 가시적 부작용이 발견되고 있는 상황이다. 강조하지만 식민근대를 경험한 제3세계의 예술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미술의 담론뿐 아니라 자국의 문화와 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연구하는 전문가의 여과장치가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구의 문화 예술을 아는 만큼 서구의 예술전문가들은 한국의 예술을 잘 알지 못한다는 문화 교육적 구조를 직시하고 전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장도 한국의 정치권력의 문제를 넘어 이제까지의 행정적 문제뿐 아니라 한국현대미술의 문제를 보완할 완충지대의 전문가가 초대되어야 마땅했다.

와중에 마리관장의 임명을 지지하는 전 테이트 모던 관장의 변론은 마치 문화제국주의로서 EU의 예술권력이 식민지국가들 간에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양, 한국 미술인들의 입장에 대해 다른 아시아 국가를 호명하며 절대타자인 제국으로서 EU의 입장에서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이라는 단어를 공공연하게 내걸고 진보적이어야 할 예술장에서 오히려 세계주의의 모순을 탑재한 권력관계의 연장으로 문화식민주의가 진행 중임을 증명하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명백히 한국미술인들의 탄원서에 '외국인'관장을 반대하는 내용은 없었고 검열사건으로 바르셀로나 미술관을 사퇴했던 마리관장의 이력이 주된 이슈였다. 게다가 성명에 동참한 한국 예술인들의 정치적 상황이 어느 때보다 정치적 검열에 예민한 상황임을 감안할때  소통하려 하기보다  배제하는 듯한 그들의 발언에서 일종의 서구문화 권력의 자기모순으로서 포스트식민주의적 태도가 비판받는 것은 당연하다.

결론적으로 국현관장의 문제는 왜곡된 세계주의나 배외주의(排外主義) 그리고 징고이즘(Jingoism)이 아닌 국제주의와 지역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바탕에서 진행되어야 바람직하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현대미술에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라는 분들이 공공연하게 표방하는 세계주의는 한국의 현대미술에 가하는, 구미권 국가가 비서구권에 가하는 포스트식민주의적인 행태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문화우열주의를 배태하는 우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현관장으로 마리의 임명과정에 드러난 문체부의 파행적 대응과 결정 그리고 마리관장을 지지하는 유럽 미술전문가들의 태도에서 느끼는 우월감과 불쾌감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그들이 사례로 들듯, 유럽의 예술계 인사들이 유럽내의 미술관에 임명되는 것은 문화적으로 충분히 용이하다. 그러나 아시아의 국립현대미술관과 유럽의 현대미술관 사이에 문화의 특수성과 차이로 해법이 다를 수 있는데 ,무엇보다 로컬의 특수성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유럽인사의 한국문화예술 단체장 임명은 한국의 예술문화적 상황에 이해가 부족하거나 포스트 식민주의적 입장일 때나 가능하다. 반복하지만 이는 쇼비니즘과 징고이즘과는 다른 그 지역의 문화와 예술의 특수성을 보호하는 차원의 관점이다. 그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지역주의 변용이라는 트리컨티넨탈리즘(Tricontinentalism)과 연계해서 이 사건의 고찰이 요구된다. 더욱이 서구의 미술관에서 볼 수 없는 한국화나 공예같은 특정 영역의 논의뿐 아니라 근현대미술에 숨 쉬고 있는 한국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은 유럽의 미술관에서 현대미술 관련 일을 해 온 전문가들이 단시간에 이해될 사안이 아니다. 그것이 마리관장의 입장에서 검열문제에 면죄부를 준다 하더라도, 또한 마리관장이 문화예술에 전문성을 띈 유능한 해외관장일지라도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적합하지 않은 이유다.

반대성명과 서명은 '한국의 문제이자 동시에 문화적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컨관장은 마리관장의 문화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한국영화에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첨언했는데, 관장임기 기간동안 유럽과 한국문화 사이에서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과연 현대미술이 이 문제에서 온전히 해방된 영역인지 묻고 싶다. 조잡하게는, 외국인 관장이 어학에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해도 외국어 2~3년 습득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은 전문용어로서 외국어를 공부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악담이 아니라 언론에서 홍보하고 변론하듯 마리관장이 단기간에 탁월한 한국어 습득이 가능할지라도 어쩌면 한국어를 구사할 즈음에 국립현대미술관을 떠나게 되리라는 건 이미 문체부에서 관장 임명이전 1년의 공백기간 동안 관장의 권한을 축소해놨다는 점 역시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리관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려는 지금 한국현대미술이 안고 있고 풀어가야 할 주요문제가 무엇인지 설령 그들이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문제의 본질에 닿을 '관점'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회의적이라는 점이다.

또한 아무리 외국인관장이 진보적인 전시를 생산하는 유능한 관장일지라도 이번 국현관장건으로 보여준 마리의 친구들(약칭)의 반응은 마치 굴절된 거울로서 백색주의 문화식민주의를 연상케할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에 그들만의 세계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적 시각을 한국의 동시대 작가로 경계하는 바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외부인사를 탓하기 전에 이러한 상황을 연출한 문체부의 판단이 치명적으로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에 따라 국현관장직의 권한이 축소되어 마리관장의 영향이 한국현대미술에서 크지않다 해도 이 시기에 '능력'을 내세워 예술문화 교류를 통한 인프라의 기능적인 면을 강조하는 문체부의 발상은 동시대 한국미술의 맥을 잘못 짚었거나 국내인사가 관장으로 임명되었을 경우 이전과 유사한 문제의 발생을 우려한 회피성 결정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최초의 외국인 관장을 영입함으로써 문체부가 한국에서 국립현대미술관 문제를 극복할 적합한 인재를 발굴 못한 무능함을 입증한 것은 자타가 공인한 셈이다.

물론 간혹 드물게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 전문가가 있는 것처럼, 마리관장이 한국현대미술을 한국의 미술인보다 더 잘 아는 전문가로서 만약 검열문제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문화는 세계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것이며 보편적이고 특수한 것이기에 마리관장 선임을 두고 한국 미술인들의 반대 성명서에도 외국인이기에 문제삼는 내용이 없었던 것처럼, 반대할 명분은 희박하다. 따라서 한국의 국립미술관장직을 두고 한국의 미술인들이 외국인관장을 반대하는 것이 "한국의 문제지만 문화적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전(前)테이트 모던 미술관 관장의 판단기준은 어디에 근거하는지 묻고 싶다. (물론 여기에서 그들이라 하면 김종덕 문체부장관뿐 아니라 장관에게 자문한 한국 예술인들도 포함된다.) 오히려 마리관장 반대 서명에 동참한 적지않은 미술인들은  그것이 '한국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리관장의 실수(!)에 관대한 사람들

이 글의 비판 대상은 크리스 더컨 관장과 마리아 린드 총감독뿐 아니다. 세계현대미술관협의회(CIMAM)의 엔리코 룽기(룩셈부르크 현대미술박물관), 케이트 파울르(모스크바 가라지 현대미술박물관), 칼린 단(부쿠레슈티 국립현대미술관), 크리스티앙 베르나르드(제네바 근현대미술박물관)도 포함된다. 그들은 마리관장의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임명을 지지하고 추천하는 유럽발 성명 내용에서 그에 반대서명에 동참했던 한국미술인(1차서명:831명, 2차서명:550명)들의 자존감과 명예를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훼손시켰다.

"...서명을 한 모든 사람들이 과연 마리가 직접 자신의 입장에 대하여 설명한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MACBA)과 관련된 사실들에 관하여 확인해 보았는지는 의문이다. .... 마리의 가장 큰 실수가 자신의 큐레이터 팀의 의견에 시기적절하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었다면 어떨까?......그가 좋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는 이유로 지금 비가역적 인신공격을 받는 것이 과연 마땅한 것인가? 그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렀고 관련된 책임이 없을 때, 잘못 이해된 예술적 자유의 명목 하에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https://news.artnet.com/…/bartomeu-mari-south-korea-macb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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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_링크

한국 미술인들이 국현 서울관의 1년간의 공석이라는 파행성을 감수하고 그간 국현의 누적된 문제를 우려하고 극복해보려는 입장에서 임명될 새로운 관장에 대해서 극도로 예민하게 마리관장의 검열사건을 검토했고 까다롭게 대응한다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다. 그런데 유럽발 성명서에 서명한 큐레이터들은 마치 반대서명에 참여한 한국 미술인들이 바르토메우 마리의 바르셀로나 관장시 발생했던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경솔하게 판단해서 서명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오히려 세계현대미술관협의회(CIMAM) 성명내용을 종합해 볼 때, 한국의 미술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철저하게 마리 관장 1인에 대해 지지 발언하는 태도로 비쳐져 심히 유감스럽다. 왜 그들은 마리관장의 실책을 실수라고 축소하며 마리관장의 검열사건에 관대한 입장을 표할까. 그에 대해 이권과 관련된 동료의식이거나 포스트 식민주의 관점에서 우려스런 입장이라는 날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관철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입장이 타당한 것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 성명에 서명한 큐레이터들은 한국 예술이 정치적 검열로 얼마나 예민해져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리관장을 마치 과도한 비난을 받는 피해자인양 설정하고 편파적으로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바로 그들의 이런 태도가 대륙적 문화권력 관계에서 타자에 가하는 폭력적 관점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문체부와 유럽미술관의 사생아로서 국립현대미술관

    
그런 까닭에 최초의 외국인 관장을 영입한 김종덕 문체부장관과 마리관장을 지지한 외국의 문화권력들은 마치 예술이 스포츠로, 마리관장을 히딩크 감독으로 착각하고 있거나 착각하는 척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칠게 표현해서 국현을 문체부 산하기구로 용이하게 재편해서 그에 걸맞을 것 같은 마리관장을 고용하는 예술행정이라 해도 문제지만, 동시에 한국의 예술행정과 예술인들이 얼마나 문화적으로 쉬운 상대기에 이런 글로벌한 교류와 거래가 용이할까. 이 사건으로 몇몇 미술인들이 국현에서 시위를 하는 수고를 하고 문체부에 성명서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으나 추측 가능한 답변만 돌아왔다. 그리고 현재 현장시위는 주춤하고 몇 미술인들이 디자이너와 한 팀을 이뤄 포스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나는 그간 미뤄져 늦은 감 있는 이 소회의 글과 작가로서 예술생태계의 재난을 야기한 총체적 상황과 관련해서 이번 국현관장 사태에 대한 유감과 우려를 '작품없는 작품'이라는 수동적 저항으로 예술생태계의 문제를 표출하고 있다. 이 같은 나의 문제제기에 대한 비판과 결여에 대한 보완은 현실정치의 풍향계에서 자유로이 예술전문가들의 깊이있고 첨예한 논의가 이어져야 하고 문체부는 이를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예술전문가로서 마리관장 문제에 개입하는 입장은 현지의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지 않은 일방향적인 태도로 문화식민주의의 권력아래, 서구문화의 이권을 정당화하고 확장하려는 전형적인 태도로 보이기에 나는 무위예술가로 여기에 호명된 관장이나 예술감독 그리고 큐레이터가 기획하는 전시에 보이콧을 하는 것도 제도비판과 관련해 주요한 미술활동이라 생각한다. 특히 문체부는 미술관장이라는 직책의 관료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하더라도 문화예술의 논리는 효율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경영과 스포츠와는 다른 영역이므로 관료적으로 동일시 취급하여 처리해서 안된다는 점을 재차 지적하고 싶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목하(目下) 중요한 것은 김종덕 장관이 강조하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능력'이 아니라 '관점'이다. 또한 '관점이 곧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현실정치와 맞물려있는 국현관장 임명에 관한 내용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바위에 계란을 투척하는 마음으로, 멋쩍게 뒷북을 치는 마음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이 글을 쓴 필자도 10여년 유럽문화의 영향권에서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을 고찰하면서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배타적인 편견과 오해를 피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밝힌다. 그럼에도 과장되고 과민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미 관장 임명과정에서 그 징후들을 목격했기에 재차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종덕 문체부장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을 문체부와 유럽미술관의 사생아로 만들텐가!

덧붙이는 글 최근 온라인 비평 사이트인 크리틱칼에 기고했습니다. 명예훼손 부분에에 관해 점검해주시고 게재를 부탁드립니다. 필명(이 름)을 본명인 이미정 대신 사용합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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