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이 없었다면, 윤동주도 없었다

윤동주 친필 원고 묶음 보관했던 광양 망덕포구의 정병욱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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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ds2032)등록 2016.03.30 10:45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감춰뒀던 광양 망덕포구의 정병욱 가옥. 민족시인 윤동주의 오늘을 존재하게 한 집이다. ⓒ 이돈삼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가 회자되고 있다. 영화 <동주> 덕분이다. 영화는 비극의 시대인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동갑내기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윤동주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윤동주는 부끄러움과 참회에 서정성을 버무린 시를 주로 썼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의 시 '서시(序詩)' 전문이다. 시인 윤동주를 얘기할 때 광양 망덕포구를 빼놓을 수 없다. 윤동주를 시인으로 세상에 알린 곳이 망덕이기 때문이다. 망덕포구는 윤동주가 직접 쓴 원고를 보관했던 장소이다. 망덕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시인 윤동주의 존재를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동주>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광양 망덕포구 전경. 봄엔 섬진강에서 건져올린 강굴로, 가을엔 전어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포구다. ⓒ 이돈삼


망덕포구에 자리한 정병욱 가옥. 윤동주의 생전 원고를 보관했던 집이다. ⓒ 이돈삼


안타까움과 서운함을 안고 망덕포구로 간다. 지난 3월 12일이었다. 광양 망덕포구는 장장 550리를 흘러온 섬진강물이 남해바다와 몸을 섞는 지점이다. 강물과 바닷물이 몸을 섞는 기수역에서 지금 강굴이 나온다. 벚꽃이 필 때까지 계속 채취한다고 '벚굴'이라고도 한다. 가을이면 전어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횟집이 줄지어 선 포구에서 낡은 함석지붕의 오래 된 집 한 채를 만난다. 윤동주의 친필 원고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관했던 집이다. '윤동주 유고(遺稿) 보존 정병욱 가옥'이다. 작은 안내판이 아니라면 낡은 집쯤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돼 있다.

미닫이로 된 유리문 안으로 집안이 들여다보인다. 드나드는 문은 왼편에 따로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다. 윤동주의 원고가 빛을 보기 전까지 이 집의 마룻바닥 밑에 숨겨져 있었다.

윤동주의 원고를 보관했던 정병욱의 집 마루. 정병욱의 어머니는 이 집의 마룻장을 뜯어내고 그 아래에 원고를 숨겨뒀다. ⓒ 이돈삼


정병욱이 보관했던 윤동주의 육필 원고. 망덕포구의 정병욱 가옥에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 ⓒ 이돈삼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떠나기 전, 열아홉 편의 시를 책으로 엮으려 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제목까지 붙였다. 서문 형식으로 적어놓은 글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시 '서시'다.

하지만 일제 치하의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우리말로 된 책을 내기가 어려웠다. 윤동주는 이 원고를 정병욱(1922∼1982)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떠났다. 표지에 '윤동주 드림'이라는 의미로 '尹東柱 呈'이라 썼다.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항일운동을 하다 붙잡혀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어갔다. 27살 2개월의 짧은 생이었다.

윤동주로부터 원고를 넘겨받은 정병욱은 자신의 어머니한테 맡겼다. 원고를 받은 그의 어머니는 집안의 마룻장을 뜯어내고 그 안에 고이 숨겨뒀다. 은밀하게 보관된 원고는 1948년 정병욱(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에 의해 한 권의 시집으로 빛을 봤다. 윤동주가 생전에 써뒀던 다른 글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출간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망덕포구의 정병욱 가옥에 사진이 붙여져 있다. ⓒ 이돈삼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정병욱과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어찌 됐을지. 윤동주의 시는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고, 민족시인 윤동주의 존재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시 '서시'도, '자화상'도, '별 헤는 밤'도.

포구를 지키고 선 허름한 옛 주택이 귀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건물도 요즘 보기 드문 1920년대 점포주택이다. 영화 <동주>에 이런 이야기도 곁들여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망덕포구에 세워진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시비. 윤동주의 유고가 보존됐던 인연으로 광양시가 세웠다. ⓒ 이돈삼


망덕포구에 세워진 윤동주의 생애. 바닷가 쉼터에 패널로 전시해 놓았다. ⓒ 이돈삼


망덕포구에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시비도 세워져 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의 생애를 정리해 놓은 사각형 판(패널)도 줄지어 있다. 북간도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지와 후쿠오카 형무소의 모습도 사진으로 만난다. 윤동주의 생애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설명판들이다.

광양 선소리 표지석. 조선시대 군사의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 때 배를 만들고, 군량미를 쌓아뒀던 마을이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 이돈삼


망덕포구에 세워진 망뎅이 조형물. 옛날 왜적의 침입을 망봤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을 뜻하고 있다. ⓒ 이돈삼


윤동주의 친필 원고를 보관했던 망덕(望德)은 옛사람들이 섬진강을 거슬러 구례, 광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광양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망뎅이'라 불렸다. 왜적의 침입을 망봤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망덕은 조선시대 군사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배를 만들고, 군량미를 쌓아뒀던 마을이다. 이순신 장군의 수하였던 광양현감 어영담은 여기서 만든 판옥선으로 해전에 참가, 큰 공을 세웠다. 일제 강점기엔 황병학이 이끈 의병이 어업권을 빼앗은 일본인을 처단하기도 했다.

포구에 떠있는 섬 배알도의 솔숲도 멋스럽다. 망덕산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이라고 '배알(拜謁)'이다. 배알도 너머로는 포구사람들의 애증이 교차하는 포스코 광양제철소가 자리하고 있다. 제철소가 건립되면서 일부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고향을 떠났다.

망덕포구에 떠있는 섬 배알도. 망덕산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이라고 이름 붙었다. ⓒ 이돈삼


궁기마을에 있는 김유물전시관. 김 양식을 처음 시작한 이 마을 출신의 김여익 선생을 기리는 공간이다. ⓒ 이돈삼


김을 처음 양식했던 시식지도 광양제철소에 묻혔다. 김 양식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궁기마을 김여익(1606∼1660)이었다.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에 엉긴 김을 보고 산죽과 밤나무 가지로 지주를 세운 것이 시초다. '김'이란 이름도 그의 성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망덕포구에서 섬진강변을 거슬러 올라가면 다압면 매화마을로 연결된다. 강변을 따라가며 만나는 매화, 산수유 꽃너울도 화사한 봄을 노래한다.

광양 망덕포구 전경. 바닷가에 지역 특산 전어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설명자료가 붙여져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가는길
망덕포구는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에 속한다. 광주에서 부산 방면으로 호남·남해고속국도를 타고 진월 나들목으로 나간다. 나들목에서 바로 좌회전하면 망덕포구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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