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봄이면 언론은 떠들썩하게 개화시기를 알린다. 때맞춰 꽃은 북쪽으로 올라가고, 상춘객들은 남쪽으로 내려간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지역농업문제세미나' 참가자들은 지난달 3일 경남 하동으로 봄을 만나러 갔다.
여러 겹 껴입고 간 옷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따뜻했던 전날과 달리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이러다 만개한 벚꽃이 다 떨어져버리면 어쩌지? 안타까움을 안고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로 향한다. 벚꽃을 보러 온 상춘객의 자동차 행렬이 섬진강 양쪽 강변도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평사리로 향하는 19번 국도는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지만 섬진강의 물줄기와 모래톱 그리고 벚나무가 어우러져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꼽힌다. 벚꽃 터널 아래 느릿느릿 기어가는 차 안에서 찬찬히 꽃구경을 하자니 벚꽃도 다 같은 흰색이 아니다. 빗물을 머금은 꽃잎은 붉은 빛이 선명하다. 빗물에 더 검어 보이는 나뭇가지는 붉은빛이 옅게 퍼진 꽃잎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 비를 맞아 색이 더 진해진 19번 국도 벚꽃 터널 ⓒ 유수빈
험한 오르막 하나 없이 순탄하게 펼쳐진 강변 길에서 바라본 섬진강은 넓은 강바닥에 모래톱이 크게 드러나 있다. 예부터 섬진강은 모래가 많아 다사강(多沙江), 사천(沙川), 모래가람 등으로 불렸다. 560여 리(220km)에 이르는 섬진강에서도 모래펄이 가장 넓고 평평하게 펼쳐진 곳은 이름 그대로 평사리(平沙里)다. 초록빛으로 물든 논을 끼고 마을 길을 따라 마을 안 길로 접어들었다.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마을
평사리는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평사리의 최참판댁은 작가의 상상 속 마을을 거꾸로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소설 속 최참판댁을 비롯해 옛 평사리 주민의 삶터를 재현해 놓았다. 소설의 배경을 재현해둔 최참판댁으로 올라가는 길은 산나물, 막걸리, 공예품 등을 파는 상점이 줄지어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이거 한번 보고 가요." 굵은 비가 내렸지만 가게들은 문을 열고 찾아온 관광객들을 반겼다.
▲ 토지 촬영지로 향하는 길은 비가 내려 더 정취가 있었다. ⓒ 유수빈
최참판댁 초입에 다다르자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것은 프랜차이즈 카페. 산아래 전통 가옥들을 옹기종기 재현해둔 토지세트장과 다르게 그 모습이 세련됐다.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받는 곳이라 관광객의 수요와 편의를 생각하고 들어선 것이겠지만 소설 속 풍경을 상상하고 온 관광객들에게는 좀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내리는 빗물에 더 힘차게 돌아가는 물레방아와 디딜방아를 지나 초가에 딸린 작은 텃밭을 구경하면서 마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소설 속 인물들의 집이 하나둘 나온다. 평사리의 과부로 아낙들과 어울려 성실히 일하는 '야무네', 자존심이 강하고 바른말 잘하는 평사리 농부 '석이네'를 비롯해 '관수네', '이평이네', '막달이네' 등 평사리 사람들의 주거공간을 꼼꼼히 재현해두었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박제된 공간처럼 느껴지는 아쉬움은 마구간의 소와 닭장 속의 닭들이 조금 채워준다.
▲ 초가로 지어진 토지 세트장에는 마침 배추꽃이 활짝 핀 채마밭이 있어 정겹다. ⓒ 유수빈
역시 사람이 살아야 분위기가 산다
'끝순이' '말순이'처럼 딸 그만 낳으라는 뜻을 지닌 막달이네를 지나 도착한 '두리네'는 색다른 생기가 느껴진다. 허리 굽은 노인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소쿠리를 만드는 장인 이상봉(83)씨다. '전통공예학교'라는 나무 팻말이 붙은 초가 마루에 쌓여있는 십여 개 대나무 소쿠리는 이씨의 솜씨다. 그는 중국, 홍콩, 리비아 등지를 다니며 일하다 젊었을 적 배운 기술을 살려 3년여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가 하루에 만드는 소쿠리는 3개. 그는 "아무리 못 만들어도 한 달에 90개는 만든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하동군에서 8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하나에 3만원하는 소쿠리를 팔아서 얻는 수입도 쏠쏠하다. 그는 "아무리 수입이 안 돼도 한 달에 250만원 정도는 된다"면서도 "후계자를 세워야 하는데 그럴 만한 이가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 토지 세트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대나무 소쿠리 장인 이상봉 씨는 후계자가 없음을 아쉬워했다. ⓒ 유수빈
대지주 저택에 숨겨진 신분차별
이어 도착한 곳은 고즈넉한 운치를 자랑하는 최참판댁. 영남의 대지주였음을 보여주듯 당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별당과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과 초당 등을 둘러보며, 마치 소설 속 시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낀다. 드라마 '토지' 촬영을 위해 2002년에 재현해놓은 곳이다.
처음으로 들른 별당은 딸이나 첩이 거처하던 공간으로, 별당 안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전통 조경 원리에 따라 만든 연못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조상들의 인식에 기반해 정사각형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들고 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 별당에 자리한 우리나라 전통 연못. ⓒ 유수빈
작은 출입문을 지나자 안채였다. 집 안주인이 거처하던 공간으로 뒤주(쌀통)와 화초장(장롱)이 있고 안채 뒤쪽으로는 장독대가 있다. 당시 안주인이 집안의 대소사에서 권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공간의 위계질서에 있어서도 정실과 첩을 차별해 별당보다 안채가 좀 더 앞으로 나와 있고 건물도 높다.
안채 주변에는 행랑채가 있다. 하인이 거주하던 곳으로, 여러 칸의 창고가 연이어 있어 참판댁의 재력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모든 노비들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며 솔거노비만 해당됐다. 식솔처럼 주인과 함께 산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반면 '집 바깥에 거주한다'는 뜻의 외거(外居)노비도 있었는데 결혼과 함께 일정 부분 독립해 살아갔다. 흔히들 알고있는 바와 달리 주인들은 노비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했다. 퇴계 이황도 노비의 자식을 자기 자식과 같이 교육시켰다고 전해온다. 배우는 데 귀천이 따로 없다는 인식에서다.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사랑채는 집안 건물 중 가장 높게 지어졌다.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손님을 이곳으로 모신 것은 아니다. 주인과 동격인 사람만 사랑채에 재웠고 신분이 낮거나 제자인 경우 사랑채 뒤채로 갔다. 건물 뒤에는 오솔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정원을 꾸며놓았다. 글만 읽기보다는 자연과 함께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다.
▲ 자연과 어우러진 뒤뜰의 모습. ⓒ 유수빈
대나무 숲길 한 편에 자리한 사당은 조상의 신주를 모셔다 놓은 곳이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祭主)를 기준으로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4대 신위를 모신다. 제주가 죽으면 가장 윗대 신주는 태워서 땅에 묻는다. 위대한 조상의 위패는 태우지 않는데, 이를 불천위(不遷位)라 한다. 위패를 옮기지 않는 조상이라는 뜻이다.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집이 종가의 기준이 된다. 불천위 대상은 나라가 정했으며 제대로 모시지 않으면 처벌이 따랐다. 안동에는 47개 불천위 종가가 있다고 한다. 길을 따라 더 올라가니 초당이 있다. 초당은 그 당시 사랑채의 별채 구실을 했다. 출세 전 신분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기와를 올리지 않고 검소하게 꾸몄다. 원래 초가삼간은 방 둘에 부엌을 두었지만 이곳에는 부엌 기능이 필요 없어 마루로 대신해놨다.
'토지'의 숨결을 느끼기에는 2% 부족
초당을 지나 계속 올라가면 평사리문학관이 나온다. 2004년 개관해 소설가 박경리의 주요 저작물과 토지 드라마 자료를 전시해놓은 곳이다. 대표작에서 발췌한 문장들로 벽을 장식해놓아 눈길을 끈다.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화관과 함께 박경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장소다. 전시 자료가 충분치 않은 점이 아쉽다.
최참판댁 일대를 구경하고 다시 내려가는 길 옆에서 노천 공연장을 마주했다. 주변의 자연색과 달리 원색인 흰색 벽면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비가 오는 중에 공연도 없어 휑한 느낌을 준다. 바로 옆 흙길과 달리 공연장 일대는 콘크리트를 많이 사용해 마을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동떨어진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 동네 분위기와 달리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공연장. ⓒ 유수빈
하동군청에 문의한 결과, "공연장은 개선을 요하는 문제"라며 "최참판댁 일대의 전통문화를 고급화해 품격을 높이고자 계획중"이라고 답했다. 최참판댁 관리 담당자들 중 관련 전공자는 박물관학과를 나온 한 명밖에 없다는 점도 아쉬웠다.
일선 지방자치단체들 중에는 아직도 문화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일반 공무원에게 문화재 관리 업무를 맡기는가 하면 저마다 정체불명의 문화제를 개최하는 곳도 많다. 과도한 복원과 증·개축으로 유적지의 본 모습을 해치는 경우도 흔하다. 어디나 비슷한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는 이유들이다. 평사리는 고즈넉한 풍광과 박경리의 상상력이 어우러져 빚어낸 명소이다. 더 이상 상업화가 진전돼 소설과 동떨어진 관광지가 된다면 소설 독자와 드라마 시청자들이 좋은 인상을 갖고 떠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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