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 자유주의 시대 암흑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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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우(cwleekr)등록 2016.06.01 10:29
    <곡성>은 한 마디로 설명하면, 위기에 빠진 사회의 희망 없는 죽음의 측면, '심연'의 요소에만 오로지 초점을 맞춘 영화다. 우리의 자화상 가운데 가장 무력한 측면, 즉 경악한 후 패닉에 빠진 수동적 상태를 반영한다. 이 영화의 장점은 우리의 현실이 빠져나오기 힘든 어떤 미로 같은 구조로 되어 있는가를 잘 모델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이 영화의 단점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미로 제작자가 그 미로의 신비를 묘사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서, 탈출하는 길을 설계하기는커녕 제작자 본인이 그 미로를 못 빠져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작가의 울음소리가 미로가 야기하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고발하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를 가두는 어리석은 자의 후회를 호소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미로를 개발한 창작자의 희열을 표현하는 것인지 혼돈된다(고통과 후회는 영화 내용에 나와 있지만 희열은 영화를 외부에서 볼 때에만 보인다).
  충격적인 사회적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 당사자 주위에는 언제나 세 개의 기둥이 들어선다. 5.18의 경우를 들어보자. 방금 사살당한 시민들의 유가족이 '나'라고 해보자. 누군가는 범인이 북한 공비라고 말한다. 사실이지 공포정치를 위해서는 언제나 위조된 외부의 적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당국자는 시시비비를 가려 범인을 잡겠다고 나선다. 우리는 당국자가 범인과 쌍둥이라는 것을 안다(두 명의 무당은 똑같이 일본식 기저귀를 찼다.) 마지막으로 이들 둘이 아닌 나머지가 있다. '나머지'는 처음에는 광주의 마지막 날에 도망간 후 가책에 못 이겨 다시 돌아온 운동권 학생이나 광주 영령에 연민을 느끼는 시민으로 그 씨앗이 형성된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르면 정의를 명분삼아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훈수질 하는 정파들로 굳어진다. 5.18이후 무려 36년이 흘렀는데 그 세 기둥은 서로를 비방하고 끝없이 울어대면서 더 많은 죽음의 발생을 오히려 방조한다. 세월호 같은 사건은 당국자의 위선(한국 무당), 끝없이 제기되는 '진정한' 범인에 관한 음모론(일본 무당), 주검 앞에서 애도는 잘 하지만 규명을 위한 실천으로 나서지 않고 오히려 과감한 시민 행동을 앞장서서 만류하고 호도하는 자유주의 정파(무명=천우희 분)의 삼각 구도를 재현하고 있다.
 <곡성>은 세 개의 상이한 세력들이 '나'를 둘러싸고 심포지움을 여는 관념들 사이의 대화 형식에 바탕을 둔다. '메니포스양식'이라고 알려진 이런 유형의 텍스트에서는 서사의 진행이 중요하지 않다. 한 주제 대한 격렬한 입장들이 개진되고, 토론의 전개는 주인공을 천당과 지옥으로 순간순간 이동시킨다. 하지만 <곡성>의 대화 형식은 전반부까지만이다. 조만간 하나의 목소리로 융합한다. 주인공 종구는 처음에 (본의 아닌) 토론 앵커를 맡지만 후반에 들어서는 그의 불안이 모든 목소리를 먹어 치워 버린다. 대화는 독백으로 이행한다. 말하자면 "거지같은 나라. 이민이나 가야겠다."는 자포자기가 투사된다.
 이 영화의 한 가지 기여가 있다면, 권위를 미신화함으로써 더 이상 권위의 두려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진정성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자멸의식에 의하여 운영되는 사회가 도래했음을 정식화한다는 점이다. 그 뚜렷한 징표는 좀비의 등장이다. 좀비 영화는 2000년 전후에서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한국 관객에게 거부되었고 아마 이 <곡성>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에 연착륙할 것으로 보인다. 좀비는 자유주의 사회, 프로이트의 표현으로는 '아버지 없는 자본주의'에서나 통한다. 좀비는 그 삼각축들과 동일시된 화자 (종구=나홍진=관객)의 형상이다. 서구에서 좀비는 노숙자, 시골에 방치된 빈농의 증가에 상응하는 형상이었다. 간단히 말해 하층민의 형상이었는데 한국에서는 권위자가 푸닥거리하는 미신으로 변질되는 길을 따라 나타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봉준호의 <마더>(2009),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2010), <해무>(2014)는 좀비를 조금씩 예비하는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원빈은 말할 것도 없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무당처럼 춤추는 김혜자는 영혼 없는 좀비다. 김지운의 식인자들 또한 아무런 심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채 모여서 식인 축제를 즐긴다. 광기에 사로잡힌 해무 선원들은 유사 좀비 군중이라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의 미신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의 상호 교환, 나의 실천을 제지하는 그 '나머지(고발자, 목격자, 시민,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파들)'이 모여서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정신이 만들어진다. 자유주의의 시민 정신에 기초가 되는 정념은 자포자기이며,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고 희망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스타카토처럼 톡톡 튀는 자극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신체와 벽에 피칠갑되었을 때 느끼는 놀람이다. 하지만 그 놀람도 수초만 지나면 금방 마비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곡성>은 아무런 진정한 놀라움이 없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경탄은 현현이 아니라 재현, 즉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고, 익숙하며 빠져 들어 있는 정신 상태를 잘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를 모면하는 아주 나쁜 방식, 최악의 경로를, 그 경로를 부지불식간에 겪고 있는 당사자들이 눈치채는 순간 느끼는 경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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