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스위스 국민 몸값 삼백, 한국은?

검토 완료

송인선(songbangjiger)등록 2016.06.07 09:07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 300만 원(2500 스위스프랑)을 보장하자는 스위스 최저생활 보장안이 5일 열린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반대 이유는 명확히 알지 못하나 그동안 나왔던 반론들은 이렇다. 스위스 사회복지는 이미 체계가 잘 잡혀있다. 굳이 적잖은 금액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이유는 없다. 설령 지급하더라도 정부 재원이 부족하다. 노동자들은 노동 의지를 상실하고 종국에는 근로 소득도 떨어질 수 있다. 스위스 국민의 이런 우려들이 79.6%의 반대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다들 이번 국민투표 결과를 눈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올해 들어 기본소득에 관한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20대 총선 당시 녹생당·노동당이 기본소득을 핵심 의제로 내세운 말과 네덜란드·핀란드가 기본소득 지급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말이 그렇다. 찬성과 반대는 주로 '노동'에서 부딪혔는데,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노동의 질이 좋아진다는 주장과 떨어진다는 주장이 싸웠다. 실상 전자는 노동자의 말이고 후자는 사업가의 말이다. 노동을 통해 인생을 설계하려는 자와, 근로 효율을 한계치까지 끌어 올려 최대의 잉여이익을 얻으려는 자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정치권에서는 진영 논리가 개입하기 편한 사안이기도 하다. 보란듯이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무상복지가 확산일로에 있는 지금 우리나라 좌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스위스 국민들이지만 깨어있는 국민이 나라를 지킨다는 입장에서 보면 참 대단한 스위스 국민들"이라고 페이스북 담벼락에 글을 남겼다. 왜 좌파 프레임을 씌우는 지, 스스로를 우파에 가둔 홍준표 속내가 궁금하다.

월 50만 원 청년배당을 비롯한 성남시 3대 무상복지를 겨냥했을 수 있다. 최근 이재명 성남시장 인기가 좋다. 성남시 부채를 해결한 뒤 무상교복·산후조리지원 등의 복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대중을 겨냥한 포퓰리즘 아니냐는 비판이 일지만 대부분 바깥말이다. 혜택 받은 성남시민들의 군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지는 않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진주의료원을 폐업하고 무상급식 예산 지원을 중단하면서 도민 36만 명(주민소환투표 서명)의 분노를 산 것에 비하면 고요하다.

일련의 반응을 보며 가난과 악의 문제를 생각했다. 무상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는 한결같은 기준이 있다. 실례로 위에서 언급한 홍 지사 게시물에는 "세금은 한푼 안(못)내면서 밥안준다고 징징대던 사람들 좀 느끼는 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됨니다", "의무감을 회피하고 공짜만 바라는 좌파들이 나라를 망치는구나…"라는 댓글이 달려 있다. 논지는 노동의 의무다. 의무를 다한 자가 먹고 살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조금 더 보편적인 느낌으로 다듬으면, 가난은 게으른 자들의 인과응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같은 맥락의 질문이 있다. 구걸하는 이에게 돈을 줘야 할까? 돈을 주면 안 된다고 답하는 이들이 있다. 노동하지 않는 자에게 거저 주면 평생 구걸하며 지낸다는 논리다. 똑같은 말을 무상복지에 적용할 수 있다. 노동하지 않는 자에게 무상으로 복지 혜택을 베풀면 평생 그것만 바라면 지낸다.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일해라. 일하면 된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무상복지에 반대하는 이들의 말은 단호하고 말끔하다. 가난은 악이다.

나는 구걸하는 이에게 돈을 준다. 불쌍하다는 동정심에 그런다. 불쌍하다는 동정이 상대의 인격을 깎아 내린다고 생각지 않는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라는데 그 앞을 매몰차게 지나치는 것이 인간 품격에 걸맞지 않다고 여길 뿐이다. 그 사람은 살기 위해 하루를 지독히 버틴다. 주어진 생을 놓지않는 것 만큼 숭고한 태도가 있을까. 그가 느끼는 생존 욕구는 우리 것과 다르지 않다. 내 커피 한 잔이 한 생명의 생존을 결정한다면 줘도 아깝지 않다. 이게 자기 자랑으로 읽힌다면 더할 나위 없다. 좋은 일 한거다.

부산역 노숙인의 자립을 돕는 것으로 잘 알려진 <나눔 커뮤니티>의 송주현 전도사가 있다. 홍안 청년이 이 일에 뛰어든 계기는 단순하고 간단하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한 할아버지를 보며 사람의 처지가 저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그는 부산역 광장으로 나갔다. 어떤 날은 그들과 같이 거리에서 밤을 보낸다. 그렇게 정을 쌓다 자립 의지가 있는 노숙인을 만나면 방을 잡아 주고 월세를 치른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나 신앙의 힘으로 버텼다. 그의 선행을 안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내서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신의 의를 구하는 이의 형편을 신이 직접 보살핀다는 예수의 가르침이 있는데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이지 않을까. 노숙인을 게으른 악인으로 보지 않고 되세울 인격으로 보았을 때의 좋은 예다. 가난은 극복해야 할 악일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한 자는 악인이 아니다.

결국 무상복지를 보는 관점은 돈 아니면 사람일 것이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른데, 현재는 돈이다. 복지 사각지대에서 생을 이어 나갈 수단이 없는 이들의 비보가 자꾸 들려오니 말이다. 돈이 대체 뭔가. 남으면 남을수록 좋은 잉여이익에 불과하지 않은가.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돈의 가치가 제일의 선(善)이라면 더 많이 남기기 위해 수고하는 사람만큼 선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중에는 부자가 선이 되고 빈자가 악(惡)이 될 터이다. 한 인간의 품격이 생계 수단의 잉여로 결정되는 체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내가 이상한가? 그게 이 세상의 신성불가침이라면 스위스 사람은 300만 원이고 대한민국 사람은 50만 원도 채 안된다는 건데, 난 스위스에 저축도 못하니 여지없이 50만 원 이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