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설팅(consulting)이라는 미명으로 황폐화되는 교육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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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식(kj190)등록 2016.06.15 11:10
Consulting의 사전적 의미는 명사로 쓰일 때 자문, 조언, 그리고 진찰의 의미가 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자문이란 어떤 일을 좀 더 효율적이고 바르게 처리하려고 그 방면의 전문가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기구에 의견을 묻는 것을 의미하고 조언은 말로 거들거나 깨우쳐 주어서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그 세부적인 뜻을 살펴보니 컨설팅이라는 것은 전혀 그 방면에 지식이 없는 사람이 어떤 일(매우 위험요소가 많은 일 – 흔히 말하는 자기 손실의 우려가 예상되는 일)을 처음 하려 할 때 여기 저기서 도움을 얻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주로 쓰이는 곳은 매우 특화되고 동시에 자본과 밀접한 부분으로서 개인의 방향 선택에 따라 득과 실이 확연해지는 분야, 예를 들면 금융, 창업 등의 분야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파생될 수 밖에 없는 불확실한 미래와 환경에 대한 예측과 방향을 제시하는 곳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 단어가 교육 현장에 깊숙하게 들어와 버렸다. 교육은 불투명한 미래예측이 핵심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교육은 득과 실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장이 아니라 사람의 성장과 인격과 지식을 획득하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분명한 희망의 장이다. 이 장기간에 걸친 인격과 지식의 형성과정인 교육의 장에 속도와 성과라는 자본의 냄새가 가득한 컨설팅이라는 단어가 어느 새 스멀스멀 기어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많이 양보해서 교육업무라는 측면의 컨설팅은 이해되는 측면도 약간은 있다. 교육적 목표 달성을 위한 행정적 업무라는 측면에서 선험자들의 경험과 노력의 결과를 후임자들에게 공정하게 나눠준다는 순기능도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교육현장에서는 이 컨설팅이 만연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컨설팅이라는 명목 하에 이전 시기에 존재하던 권위적인 장학지도가 환생해온 느낌이다. 분명 컨설팅의 목적은 교육 목적에 맞는 교육행위의 과정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자문과 조언이어야 하는데 교감, 장학사, 교장이라는 직위를 앞세워 컨설팅이라는 교묘한 방법으로 감시와 통제를 자행하려는 권위적 태도는 현장 교사로서 교육적 자문과 조언이라고 느끼기 보다는 그저 불쾌하고 불필요한 간섭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또, 컨설팅이 필요한 것은 교육행위에서 최소한이어야 하는데 지금 교육현장에서 컨설팅은 모든 것에 걸쳐져 있는 만능의 방법이 되고 말았다. 용어도 다양하다. 컨설팅으로부터 모니터링까지 영어로 된 모호한 단어들이 교육현장에 연일 공문으로 쏟아진다. 이 사실은 이미 자본주의 교육이 가지는 최악의 단점인 경쟁을 암암리에 유발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특정 교육 사업이 성공적으로 실행되기 위한 목적으로 컨설팅을 받게 되는데 이 때, 그 사업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예산이 동반되는 사업이 대부분이다. 예산이 투여되면 효율성이라는 조건이 그 사업에 부가되게 되고 효율성은 곧 성과로 귀결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여기에 컨설팅을 부가시키는 것은 그 성과를 높이자는 것인데 교육의 성과를 단기간에 높이겠다는 생각 자체가 벌써 자본주의적이며 동시에 비 교육적인 상황으로 전이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국가 백 년의 큰 계획이 교육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교육은 단기적 성과라는 기치 때문에 일 년의 농사보다 못한 기형적인 모습으로 시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산이 투여되는 모든 교육적 사업에서 단기적인 성과를 따지는 현실이 지금의 교육적 위기를 가져온 주요한 원인일 가능성이 높은 현실에서 자본주의적 성과 향상 방법인 컨설팅을 거기에 부가시키는 이 현실이 현장 교사로서 너무나 답답하고 화가 난다. 언제나 말하지만 교육은 단기적인 성과를 낼 수 없다. 컨설팅으로 향상될 수 있는 것은 교육관료들의 문서에 나타나는 단순 수치일 뿐이다. 더군다나 각각의 단위 사업마다 몇 회 이상의 컨설팅을 요구하는 천박한 교육에 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소위 전문직(장학사, 관)으로 있는 이상 우리의 교육은 점점 황폐화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또 하나의 컨설팅이 가진 폐해는 교사의 자율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다. 결정적으로 교사는 자율성에 기초하여 수업을 하고 교육적 행위를 한다. 이 자율성은 법령과 법규를 준수하는 조건으로 교사에게 보장된 거의 최후의 보루다. 그런데 컨설팅은 성과라는 단기지표의 수단으로 교사의 자율적 교육행위를 급박하거나 조정하려 한다. 예산이 투여되면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는 교사로 하여금 예산 투여된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교사는 교육적 행위에 쓰일 예산의 사용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것을 회피하게 될 가능성 커지게 된다. 즉 교사의 자율권은 이 지점에서 혼선을 빗는다. 즉, 자율권이 침해되어도 예산 투여 사업을 진행할 것인지 아니면 일체의 예산 투여 사업을 그만둘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벌써 교사의 자율권은 심각하게 침해 받고 있는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컨설팅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곳곳에 이 컨설팅의 횟수를 지정하고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컨설턴트라고 지정된 당사자들의 능력에 대한 불신도 매우 크다. 주로 장학사와 교감, 그리고 일부 교사도 포함된 컨설턴트의 능력은 그것이 교유적이든 혹은 비교육적이든 간에 그저 상급기관과 제도가 정한 승진 점수를 말없이 개미처럼 모아 승진했기 때문에 보장된 일종의 일방수혜적 위치일 뿐이다.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컨설팅이 미래예측과 불확실성에 대한 위험을 줄이는 대책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육청에서 요구하는 것을 수행하고 표면적인 성과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매우 형식적인 지도일 뿐이다. 상급 기관에서 요구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하는 컨설팅에서 상당한 교육적 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렵지만 컨설팅이라는 행위가 도대체 교육이라는 형식에 맞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조차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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