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효능감", 유권자가 투표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뜻한다. 문제는 그것이 허구일 때 나타난다. 유권자가 사실상 정치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음에도 정작 본인은 정치효능감을 느낄 때, 민주주의는 큰 위기를 맞는다. 거짓된 정치효능감 속에서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적 모순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이른바 "거짓된 정치효능감의 함정"이다.
최근 영국 국민의 투표로 인해 브렉시트가 결정되자, 여러 언론매체에는 탈퇴를 지지했던 탈퇴 파 국민들이 환호하는 장면이 실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내 손으로 한 나라의, 아니 유럽 전체의 정치·경제 판을 바꿨다'는 자신만만한 정치효능감이 보인다. 몇몇 언론에서는 나라의 중대한 사안을 국민투표로 결정하다니 역시 근대민주주의가 시작된 국가답다는 평도 나온다. 그러나 브렉시트에 투표한 영국 국민들은 현재 거짓된 정치효능감에 빠졌을 뿐이다.
브렉시트는 기존 체제를 향한 하층민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국민투표 이전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의 조사에 따르면, 일을 하면서도 절대 빈곤을 겪는 영국 국민은 2011년 이후 50%의 비율 이상이었다. 하루하루 생계를 책임지기 힘든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외국인노동자가 영국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일부 정치인들의 주장은 매우 솔깃했다. '내가 이렇게 못사는 이유가 이민자들에게 있다'는 하층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실제로 저소득·저학력층은 국민투표에서 "잔류(Remain)" 혹은 "이탈(Leave)"의 항목 중 후자를 압도적으로 선택했다. 어쩌면 영국 하층민이 선택한 답은 브렉시트(brexit)의 의미보다, 지독히도 못 사는 지금 내 상황으로부터의 탈출(exit)이었을 지도 모른다.
▲ 영국 국민은 브렉시트 국민투표 투표용지에서 잔류(Remain)와 탈퇴(Leave) 중 하나를 선택했다. ⓒ Getty Images/이매진스
함정은 영국 하층민 빈곤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EU에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빈곤문제의 핵심은 바로 영국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양극화다. 영국 보수당은 분배보다는 성장을 주장하며, 낮은 복지, 부자 감세를 주요 정책 아젠다로 꼽는다. 정부는 법인세율을 20%로, 독일(30.2%)과 프랑스(34.4%)보다 훨씬 낮게 낮췄지만, 그럼에도 2020년까지 법인세율을 17%로 낮추겠다는 계획을 계속 추진 중에 있다. 덧붙여 개인소득세나 자본이득세 등 부유층의 세금 부담은 줄이는 대신에, 모든 국민에게 거둬들여 저소득층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간접세는 인상했다. 복지 예산도 120억 파운드(약 20조2000억 원)가량 줄였다. 영국 정부의 이러한 신자유주의 노선의 정책은 2007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계속되는 저성장 시대 속에서 영국 사회 내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세계경제포럼(WEF) 2015' 자료에 따르면, 소득 불평등을 뜻하는 영국 지니계수는 0.348로 선진 30개국 가운데 4번째로 높았다.
브렉시트가 "거짓된 정치효능감의 함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 국민은 기존 체제로부터의 탈출을 이뤄냈다고 생각하지만, EU 탈퇴로 양극화라는 영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브렉시트라는 결과는 탈퇴 파를 주도한 보수당에 더 큰 힘을 실어준 꼴이 됐다. 거짓된 정치효능감 속에, 낮은 복지, 부자 감세의 일부 계층만 이익을 얻는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의 문제는 수면 아래에 가라앉을 뿐인 것이다. 그 피해는 브렉시트의 후폭풍까지 더해 고스란히 영국 하층민의 몫이 될 것이다. '내 손으로 정치의 판을 바꿨다'며 기뻐하고 있는 영국 국민들에게, 국민투표는 애초에 "Remain/Leave"의 항목이기보다 "Remain A/Remain B"의 선택지였을 지도 모른다. 어떤 선택을 하든, 영국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탈출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박노자 교수가 라디오 인터뷰에서 브렉시트에 대해, 양극화에 대한 기층민중의 저항을 다른 쟁점으로 돌려보려는 극우파 정치인들의 술책이라고 분석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브렉시트의 "거짓된 정치효능감의 함정"은 우리사회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우리 국민도 비교적 최근, 브렉시트 못지않은 정치효능감을 느꼈다. 두 달여 전에 이뤄졌던 4.13 총선에서다. 기적처럼 여소야대와 3당 구조를 만들어낸 4.13 총선 결과는, 영국의 이번 국민투표처럼 '기존 체제를 향한 국민의 분노'로 해석됐다. 분노의 원인 역시 불평등과 사회양극화에 있었다. 영국의 지니계수가 선진 30개국 4번째로 높다면, 같은 자료에서 한국의 지니계수는 영국 바로 다음인 5번째에 위치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자녀의 삶이 결정된다는 '금수저론', '헬조선론' 등의 담론도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서민들은 이렇게 살기 힘든데, 정치권은 고용불안정을 담보한 노동개혁을 주장했고 공천파동 등 계파갈등을 일으켰다. 이에 국민은 선거를 통해 정치 기득권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총선 당시 국민에게 투표지는 기존 체제에 대한 "잔류(Remain)" 혹은 "이탈(Leave)"의 선택지였던 셈이다. 우리 국민은 영국 국민과 같이 그렇게 "Leave"를 택했고, 기적적인 총선 결과에 승리감을 만끽했다.
그러나 총선이 실시된 지 두 달 반이 흐른 지금, 총선 이전의 정치판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의문이다. 여전히 최저임금 인상은 지지부진하고 고용불안정의 노동개혁은 추진 중에 있다. 국민의 새로운 탈출구였던 "새 정치" 제3의 정당은 불법 리베이트 의혹에 휩싸여 대표가 사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국민이 4.13 총선을 통해 요구했던 사회양극화, 불평등 해소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는 시작되지도 않은 셈이다. 달라진 것 없는 정치판의 모습은, 우리 힘으로 정치판을 바꿨다고 좋아하는 데 머물러있을 때가 아님을 보여준다. 여소야대와 3당 구조라는 선거 결과에 만족하고 양극화와 불평등이라는 근본적인 사회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멈춘다면, 우리사회도 브렉시트를 선택한 영국과 같이 "거짓된 정치효능감의 함정"에 빠질 뿐이다.
정치효능감. 선거에 기반을 두는 대의민주주의에서 정치효능감은 투표를 통한 국민의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중요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효능"감"에만 그쳐선 안 된다. 과연 나의 선택이 정치에 영향을 줌으로써 근본적인 사회문제를 변화시키는 데 실제로 "효능"이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일부 영국 국민은 현재 근본적인 사회문제를 짚어내지 못한 채 승리감에 젖어있다. 거짓된 정치효능감, 그 함정의 위험성. 이것이야말로 브렉시트가 4.13 총선 이후의 우리사회에 전하는 경고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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