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돼지는 우리 친구다 - 러시아 광대 두로프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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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우(cwleekr)등록 2016.07.19 11:25
   인류는 반으로 나뉘는데 기꺼이 개나 돼지를 자기와 동등한 수준의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러한 가축들과 자신을 만약 동급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곧 나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분노할 사람들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은 개돼지의 친구입니까?"라는 질문은 답하는 사람을 엘리트와 평민으로 구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이다.
  그런데 "가축이 나의 친구인가"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는 유쾌한 실천은 이미 20세기 초반 독일에서 실제로 있었다. <어릿 광대의 정치학 > (조엘 쉐흐터, 실천문학사)에 보면 돼지를 진정으로 사랑한 러시아 국적인 서커스 광대 두로프의 얘기가 나온다. 이 책에는 그가 "추스카"라고 이름 붙인 친구 돼지와 한 침대에서 자는 사진도 수록되어 있다. 돼지를 훈련시켜 그가 타고 있는 작은 수레를 끌고 거리를 달리게 하자 경찰관은 그를 무면허 운전, 교통방해, 서커스단의 무허가 광고 등의 죄목으로 법정에 소환했다. 그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돼지를 교통수단으로 쓰지 못한다는 법적 제한은 없다. .... 우리는 돼지를 완벽하게 훈련시켰으며 다른 수레들과 같은 방향으로 달렸기 때문에 교통을 방해한 일도 없다. 그리고 수레를 끄는 동안 돼지는 한번도 꿀꿀거린 일도 없다.... 나는 돼지가 죽은 후에 저녁 식탁에서 고기로서만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도 이처럼 유용한 동물임을 증명하고 싶다."

서커스 텐트 내부에 국한했다면 '무대위의 가상'으로 관조되고 말았을, 돼지가 인간을 끄는 사건이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도심 번화가에서 구현되고 있다. 사실 이 사건은 브레히트 상황극에 영향을 준 숨은 원천이었다.
   돼지와 자신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두로프의 말투에는 어떤 자조나 냉소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무한 긍정의 태도, 돼지와의 진실한 우정이란 기껏해야 사회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무력한 소극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지만 동물과 연대하는 평등한 잡종 공동체를 긍정하는 세계가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면? 그래서 확산하는 긍정과 이를 거부하는 부정이 맞선다면?
  두로프는 서커스 링에 독일 장교의 모자를 걸어두었는데 그 이름은 헬름이었다. 그는 복화술로 "Ich will helm (나는 군모를 원한다)" 라고 말했고 훈련받은 돼지는 그것을 가지러 달려갔다. 돼지가 "나는 (황제) 빌헬름이다"라고 말하는 격이었다.
  이 농담이 모든 사람를 다 모욕하지는 않는다는 점, 즉 전 사회성원에게 '대칭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정답고 신성한 나의 돼지 친구가 나에게 비유된다면 그것은 모욕이 아니다. 사실 아무도 타인에게 모욕을 가한 일은 없다. 오직 '돼지=인간'인 어떤 명랑한 세계(서커스 링)로의 초대가 있었을 뿐이다. 다만 그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 돼지와 자신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끝까지 우기는 사람(가령 빌헬름 황제)만이 스스로 그 초대를 모욕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광대 두로프는 1907년 돼지 연극을 한 죄로 체포되어 반역죄 선고를 받았다. 스파르타쿠스단을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결성했던 리프크네히트가 변호에 나섰지만 끝내 독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 사건은 기묘한 교훈을 준다.  
  우선 만약 지배 엘리트가 민중을 개돼지라고 경멸한다면, 민중이 할 일은 개돼지를 만화영화의 캐릭터나, 독거 노인의 반려 동물이나, 리움 미술관 옆과 건너편에 있는 두 마리의 (사람보다 몇배나 더 큰) 거대한 개 조각들이나, 이태원역과 녹사평 역 사이에 있는 어떤 식당입구의 진주 목걸이를 하고 모자를 삐딱하게 쓴 검은 돼지처럼 당당하고 정답고 우아한 친구로 간주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동물과 인간이 함께 하는 천진난만한 세상에 지배 엘리트를 초청하는 것이다. 조류나 설치류는 만약 월트 디즈니의 세계에서였다면 도날드 덕이나 미키 마우스로 친근해진다. 그러나 현실 정치인들은 자신을 닭이나 쥐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심보는 그들의 고약한 귀족의식의 발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과 인간이 잡종 공동체를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마음으로 그 공동체를 실존하는 모든 국가와 경제 권력의 영역까지 넓히는 일이다. 연대와 평등의 즐거움을 외면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에게 오명을 뒤집어 쓸 것이고 조롱과 격하의 대상이 될 것이다. 혐오와 역겨움은 연대와 관용의 공동체에 편입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자가 스스로 내뿜는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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