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 나쁜 쪽으로 동질화하는 것에 대한 필사적 저항

경쟁사회의 인종차별

검토 완료

이창우(cwleekr)등록 2016.07.29 13:42
<부산행>은 그간 피상적으로만 접해온 좀비 이야기를 관객들이 직접 마주하고 곱씹을 기회를 주는 영화다. 별다른 굴곡 없고 주인공들이 오직 도망만 다니는 이야기를 가지고도 관객은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보게 된다. 어떻게 뻔한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가?

사실 좀비 이야기는 겉보기에는 평면적인 괴기물 같지만 현대인들의 보편적 정서를 반영하는 만만치 않은 철학을 담고 있다. '거의 전부가 좀비가 되는 세상'이라는 이 영화의 가정에는 다음과 같은 이율배반적인 논리가 들어 있다.
1. 우리는 모두 같지만
2. 약간의 차이만으로도 완전히 다르다.
좀비가 유별나게 탐욕적이고 요란스러운 동작을 보이는 특징이 있지만, 이야기 흐름을 가만히 보다보면, 좀비와 인간이 결국은 신체적 더러움에서나 정신적 더러움에서나 꼭 같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읽혀진다. 모두 전락하고, 무의미해지고 동일하게 된다. 좀비와 싸우느라 주인공 일행의 행색은 좀비와 유사해지고, 이들 주인공 일행을 더럽다고 격리시키는 깨끗한 사람들은 그 마음이 좀비의 더러움과 유사하다. 좀비란 결국 정상인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모든 사람이 좀비 쪽으로 수렴한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가족, 벗이 지금이라도 좀비가 된다면 유대감으로 묶여 있었던 그와 나는 결별해야 한다. 감염자와 비감염자로 한순간 나뉘면 사람들 사이의 소중한 관계에 거대한 심연, 낭떨어지가 박힌다. 영화는 좀비가 방금 몇 초전까지 좀비와 싸우던 정상인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사소한 차이로 인하여 동료들끼리도 돌변하여 결사적으로 싸우는 현실의 세태를 풍자한다.
위 두 가지를 종합할 때, 나쁜 쪽으로 모두를 같게 만드는 힘에 대한 필사적 저항이 읽혀진다. 이것이 경쟁 사회의 논리인 것은 자명한데, 더 이상 정상을 놓고 다투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하향 평준화했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썩은 고기로부터 먼 거리를 취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서로 죽인다.
푸코가 말한 그대로다. 자유주의 시대의 인종주의. 다른 인종간의 싸움이 아니다. 같은 인종인 한에서 집단의 일부가 썩을 때 피할 길 없는 각자는 살기 위하여 발작하고 그 집단은 전체적으로는 결국 자살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집단을 내려다보는 인구학자가 아니라 집단에 속한 성원이 겪는 경험을 중계한다. 동질화 안에서 동질화에 저항하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가 러닝타임내내 전개된다. 무력하게 자멸하는 느낌이 대세를 형성하는 가운데, 스타카토처럼 튕기는 급격한 위험이 나타나고 (그 공포 때문에 잠시 생기가 돌고), 오직 바다를 이루는 썩은 군중들을 몰살시키는 시점에서만 숭고한 해방을 느끼는 좁은 탈출구가 제시된다. 라스트 신에서 죽게 내버려진 군중으로부터 겨우 탈출한 두 여성를 향하여 총구를 겨누던 군대의 살기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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