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않는 남도-순이 삼촌의 비극

제주 4·3항쟁 답사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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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구(sinm1129)등록 2016.09.29 14:11
제주 4·3 항쟁 답사기
<잠들지 않는 남도-순이 삼촌의 비극>
전에 제주도를 찾을 때에는 한라산 트레킹과 관광을 곁들여서 몇 번 찾아왔다. 이 땅에 발을 딛는 제주 국제공항 땅 밑에도 제주 4·3항쟁 당시 희생당한 유골이 묻혀 있다. 해방정국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헤매고 있을 혼들을 달래고 상생할 수 있는 씻김굿 이 필요하지 않을까? 제주도는 섬 전체가 제주 4·3항쟁의 유적지이고 모든 주민들이 항쟁의 피해자이다.

전교조 광주지부 통일위는 자주적 민족 통일을 위해 희생하신 영령들의 유지를 받들기 위한 씻김굿 역할을 위해서 존재한다. 전교조 통일위 소속 선생님 20명과 시민사회단체 10명 총 30명이 제주 4·3민중항쟁 지역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폭염이 한창 극성을 부리는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진행되었다.

오늘날에도 강정 해군 군사 기지 건설, 성주 샤드 배치, 한미 군사 대대적 훈련 등 한반도는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4·3항쟁 답사는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비극의 원인을 밝혀 주는 단초를 제공한다.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기 동안 연합군 일원으로 군국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민족 해방투쟁을 치열하게 싸웠음에도 미국의 세계 패권전략 속에 한반도 남쪽을 일본과 더불어 적대 지역으로 분류하였다. 연합국 일원으로 파쇼 세력에 대항해서 싸웠기에 전승국 일원으로 자주적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제패전략에 따라 미군이 남쪽에 들어왔을 때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미국은 일본을 패전국임에도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해 일본을 설계했음에도 한반도 남쪽은 이런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어떤 독립운동 세력도 어떤 법으로도 인정하지 않고 극단의 시대의 야만으로 통치하였다.

미제의 패권전략은 한반도의 해방정국에서 좌우익을 망라한 자주적 독립운동의 통일세력과 외세를 등에 업은 친일 매국노의 분단세력 간의 전쟁터였다.

제주 4·3이 68년을 맞지만 현재 진행형인 이유는 사건의 총체적 진실이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를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봉기를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벌어진 항쟁과 진압 과정에서 3만 명이 죽었다.

학살극의 희생자 대부분 육지에서 증파된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해안으로부터 5㎞ 밖인 중산간 마을 소개되어 95% 이상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태워 죽이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삼진 작전으로 한라산 기슭과 중산간 마을은 피로 물들었다. 물론 절차적 민주주의라도 지키어 재판을 한 것도 아니고, 총을 들지 않은 어린이와 여성, 노인에 이르기까지 학살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내륙에서는 국민보도연맹으로, 제주도에서는 예비검속에 걸려들어 희생되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로 제주 4·3의 상처와 아픔을 앓으면서 입으로 말도 못하는 고통을 감내해왔다. 그럼에도 68년 동안 제주도민들은 폭력과 죽음의 기억에 맞서 4·3진상규명 운동과 투쟁으로 정부(노무현)로부터 4·3유족과 제주도민은 사과를 받아내고, 제주 4·3특별법을 쟁취했다.

첫째 날(7.27일)
제주도에 도착하니 이 폭염에 연세 지긋하신 교수님이 안내를 해주신단다. 염려와 달리 교수님은 이틀 동안 설명을 잘해주셨다.
첫날 간 곳은 '항상 물이 고여있는 땅'이란 곤을동 마을을 답사하였다.4·3사건의 와중인 1949년 1월 4일 아침 9시경 군 작전으로 24명이 희생되고, 모든 가구가 전소되었다. 고려 시대부터 농사와 어업만을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던 이 마을이 해안지대에 있으면서 이런 희생을 당한 이유는 뭘까? 부상당한 산사람(무장대)을 치료하기 위해서 육지로 보내려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한다.

곤을동 마을터에서 곤을동마을은 해안가임에도 불구하고 무고한 양민 24명이 희생되고 모든 가구가 전소되었다.부상당한 산사람(무장대)를 치료하기 위해 육지로 보내려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한다.전교조 광주지부과 시민단체 회원들 ⓒ 신민구


국제법상 전쟁 중일지라도 금지하고 있는 제노사이드(집단 대학살)이 북촌리에서 일어났다. 북촌리는 해변 마을로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 조직이 활성화 됐던 곳이다. 1949년 1월 17일 마을에 있었던 무고한 양민 남녀노소 3백여 명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되었다.

현기영의 순이삼촌 기념비 1949년 43사건 당시 443명이 희생되는 43의 아픔을 알리는 소설 순이삼촌 배경의 장소인 북촌리 너븐숭이이다..이 옴팡밭 일대에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눕혀져 있는 비석들은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이다. 안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회원들 ⓒ 신민구


1980년 중반 복학 대학 시절 현대사에서 제주 4·3 항쟁같은 비극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면서 주위 사람들과 기꺼히 이야기했고 이후 교직생활 중에 수업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엄혹한 유신 말기 시대에 아무도 말 못하던 시절, 문학적 양심으로 고향의 아픈 역사에 대한 펜대를 들이댄 작가가 현기영이었다.
그는 북촌리의 4·3을 다룬 작품 <순이삼촌>을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하면서 발표하면서 침묵의 금기를 깨고  논의의 한복판으로 끌어내었다.

너븐숭이에는 학살 때 희생된 아이들의 돌무덤 몇 기가 당시 매장된 상태로 남아있다.
너븐숭이 4·3기념관 안에는 유가족들이 남긴 쪽지 글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여러 글 중 하나만 옮깁니다.
'삼촌 두 분이 4·3피해자라는 말을 어릴 적 얼핏 들었을 뿐 일체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지요. 이제 나마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온 것 같지만 그 많은 세 월 아픔을 누가 책임질까요?'

다음은 낙선동 4·3성을 가다. 1949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토벌대가 설치되어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개념에 따라서 모든 마을에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구상하게 된다. 들판의 모든 먹을 것과 가옥을 철거하여 적에게 양식과 거처의 편의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을 지켜내는 토벌작전이었다.

1949년 4월 성이 완성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였다. 성 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4·3 당시 200세대가 성안에 살았으나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고 현재는 13가 호가 남아있다.

둘째 날(7.28일)
전교조 광주지부에서 단체로 몇 년 전에 관람하였다. 토벌대에 쫓기어 숨을 곳을 겨우 찾은 곳이 큰넓궤였다. 폭염이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땀을 선사하였지만 답사원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한참을 걸어서 찾아갔다. 필자를 포함해서 대원 몇 명이 스마트폰의 전등을 이용해서 기어서 굴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입구도 매우 비좁고 동굴 안도 120여 명이 어떻게 살았을까 할 정도로 매우 열악하였다. 영화 대사 중 무동이가 배가 불러 동굴의 좁은 폭에서 나오지 못하고 갇힌 아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리고 나갈려고 할 때 아내의 대사는 목을 메이게 하였다. "우리 무생이는 어떵허잰 햄수꽈. 난 괜찮수다. 어서 갑서. 난 괜찮댄 허난"
혼자 남겨질 자식이 더 걱정이 되어 내자식을 책임져줄 남편이 먼저 안전해야 된다는 그 생각 그래서 모질게 떠나보낸다.

큰넓궤-영화 지슬의 배경이 된 동굴 큰넓궤는 동광리 무동이왓 주민들이 산간마을의 초토화작전을 피해 숨었던 용암동굴이다.120여명이 2개월 가량 은신했으나 결국 토벌대에 잡혀 총살되었다. ⓒ 신민구


동광리는 48년 11월 중순 이후 토벌대의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에 의해 모두 파괴됐고, 현재 간장리만이 복구돼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무동이 왓은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마을로 규모가 컸던 만큼 피해도 컸다. 토벌대는 12월 11일 체포된 주민 30여 명을 학살하고 다음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나타난 가족 19명을 학살했다. 삼을 재배하던 마을이라 하여 삼밧구석이라 불렸던 마을에서는 48년 초토화작전이 시행되면서 주민들이 큰넓궤로 숨었으나 토벌대에 발각돼 죽거나 서귀포시 정방폭포에 끌려가 집단 총살당했다. 마을 주민들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99년 '4·3사건 위령비'를 삼밧 구석 옛 마을터에 건립했다. 큰넓궤와 도엣궤는 11월 중순 이후 초토화작전이 시행된 이후 주민 120여 명이 2개월가량 집단 은신생활을 했던 용암동굴이다. 마을이 초토화된 후 토벌대에 의해 서귀포시 정방폭포에서 학살된 가족들이 시신 없이 헛 봉분으로 묘를 조성한 곳도 2군데 확인됐다.

무동이왓의 광신사숙 광신사숙은 1930년에 설립된 동광리 서당이 있던 자리이다.학생들은 식민지 치하에서 배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지역인중재를 양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학살당한 후 마을이 형성되지 않고 빈터만이 당시의 비극을 말하고 있다. ⓒ 신민구


다음 장소는 송악산 섯알 오름 탄약고터이다. 이곳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 후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할 때,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제주도 서부지역의 예비 검속자 132명을 학살한 장소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 거주하던 농민, 마을 유지, 교육자, 공무원, 우익단체장, 학생들이었다. 한림읍의 주민 시신 150구는 습지에 버렸기에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고, 대정읍 시신 60구는 마른 곳이어서 수습할 수가 있었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묵념 한국전쟁이 발발 후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예비 검속자 132명을 학살한 장소이다.당시 희생된 사람들은 농민,마을유지, 교육자,공무원,우익단체장들이었다. ⓒ 신민구


덧붙이는 글 해방정국에서 자주적 통일을 지향하는 독립운동세력과 외세에 빌붙어 분단을 지향하는 매국노세력 간의 한바탕의 전쟁이었다.중심에 분단을 저지하고 투쟁한 제주도민들의 큰 희생을 다시 답사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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