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나라 어떤 국민입니까?

[주장] 우리를 대변해주는 정치인과 ‘우리나라’가 너무나 필요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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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회(joonghoe21)등록 2016.11.11 18:12

이 세상은 다 돈이야? 프랑스 지하철 10호선 'Duroc'역의 광고판에 누가 낙서를 해놨다. 원래 저 문구는 '다 예술이야?' 였지만, 빨간 마카로 '다 돈이야?'로 바뀌었다. ⓒ 김중회


"남의 나라 일에 뭐 그렇게까지 열을 내시고 그래요?"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한 기사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문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이렇게 답했다.

그 기사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했다. 그렇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완전한 의미에서 한국인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을 '남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 도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 사람들을 만난다.

프랑스에는 한국을 떠나, 타국의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나 역시 학업 때문에 파리에서 지내고 있다. 다만, 내가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고 사는 이들과 다른 것은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이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왜 파리에 정착한 한국 사람들은 한국을 떠나 언어도, 문화도 낯선 도시에서 계속 살기로 마음먹었을까? 아니, 그보다도 왜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지우고 사는 걸까?

"이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

나는 이러한 고민들과 현재의 혼잡한 시국에 대한 생각을 누군가가 한숨을 쉬며 내게 해준 이 질문에서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구성원 하나하나의 신체와 재산을 공동의 힘을 다하여 지킬 수 있는 결합 형식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저마다 모든 사람과 결합을 맺으며 자기 자신 이외에는 복종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울 것. 이것이야말로 사회 계약이 해결해 주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다시 말해 구성원 하나하나를 그 모든 권리와 더불어 공동체 전체에 대해 전면적으로 양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신체와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삼아 일반 의지의 최고 지도 아래에 둔다. 그리고 우리는 구성원 하나하나를 전체와 나누어질 수 없는 일부로서 받아들인다. 이 결합 행위는 곧바로 특정한 계약자 하나하나를 대신하여 하나의 정신적이고 집합적인 단체를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의 결합으로 형성되는 이 공적인 인격은, 예전에는 '도시국가'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공화국' 또는 '정치체'라고 불린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루소와 같은 이들의 생각은 시민들의 혁명을 이끌어냈고, 그리고 지금의 민주공화국을 만들었다.

왕과 일부 귀족에 의해 구성된 그 이전의 체제(ancien régime)는 일부 특권층에게만 허락된 사회의 '울타리'를 열어젖혀 스스로를 보호하고 '삶'을 찾고자하는 이들에 의해 무너졌으며, 그들 곧 '시민'의 정의와 구성은 점차 넓어졌다. 시민들에 의해 건설된 새로운 '사회'의 정의는 다양한 구성원들과 다양한 상황들에 의해 더 다양해지고 더 넓어졌다.

더 많은 관계들이 형성되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는 '사회의 연대책임'이라는 것이 부여되기 시작했다. 또한 그 책임에서 시작하는 권리와 '야생의 엄혹함'에서 보호해주는 울타리를 모두가 동등한 구성원들이 스스로 '보초'를 서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하기 위해, 그 이전과는 다른 나라를 세우는 데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결성으로 만들어진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은 이전의 체제가 했던 일도, 그리고 그 이전의 체제 바깥에 있거나 그 체제의 지배자들이 외면했던 일들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역할을 집행하는 정부는 비록 일부에 의해 움직였으나, 그 '일부'는 민주시민들의 권력에 의해 임명됨으로써 민주주의의 원칙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유지된 것이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역시 '헌법 1조'가 시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듯이 여타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민주공화국'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 전,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정부의 일들이 민주 시민들의 선거에 의해 당선되어 권력을 위임받은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 일반인에 의해 움직였다는 충격적인 '사건'이 밝혀지면서 많은 이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 어떤 경우에도 '세속적인' 원칙에 의해 운영되어야 할 정부가 최순실씨 등에 사유화되었다. 이 사회에 계속 벌어진 대참사들의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와 그 희생들이 묵살되었다. 이 뒤에서 조용히 동조한 여당과 그 주변인, 관료, '재벌'들의 커넥션은 대한민국의 위기를 보여준다.

그렇다. 이 사건으로 우리의 '민주공화국'은 붕괴되었다. 4.19혁명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거쳐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만들어진 오롯하게 시민들이 직접 정치의 주체임을 천명한 '1987년'의 함성은 박근혜 정권의 '내부자들'에 의해 묻히고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세월호 사건 앞에서 침묵하고 유가족 앞에 완강했던 정부, 시민들과의 약속을 정반대로 거스르면서까지 고집을 부렸던 대통령, 기업의 편익을 위해 규제를 단두대로 보내버리자는 '그녀'의 광기어린 목소리와 여당의 독자적인 정치 앞에 드러누워 번번이 훼방을 놓으며 국회를 주무른 대통령의 불통과 아집에 의해 '민주공화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 정부는 도대체 위기 앞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

정부는 위기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박근혜 정권에서 '위기'라는 단어는 주로 시민들에게 사회가 처한 위기상황을 무마하려고 할 때마다 쓰였다. 분명 민주공화국은 시민들을 위해 존재함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박근혜 정권은 시민들은 그저 국가와 자유민주주의를 참칭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부 집단의 관철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이 나라는 누구의 나라였던 것일까. 최순실의 나라였던 것일까, 아니면 최씨 일가의 나라였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서도 일부는 숨어있을 '내부자들의 나라'였던 것일까, 아니면 육영수 여사에 빙의된 이와 유신 시대 망령에 의해 존재하는 나라였던 것일까.

아직 우리는 이 사건을 오롯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그림자'에 의해 그동안 이 나라가 정의롭지 못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시민들은 침묵했고 침묵하고 있다. 왜일까?

다 똑같은 놈들, 다 똑같은 정치, 그리고 비관

파리의 초등학교 이주민의 아이들도, 원래 이곳에 태어난 아이들도 그냥 다 한 데에 어울려서 재밌게 놀고 있는 모습이다. ⓒ 김중회


"우리가 바꿀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주인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그것은 모든 법의 밑바탕에 있는 헌법에 이미 쓰여 있다. 이 나라의 모든 것은 시민들의 '의지'와 그 방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봤자 우리가 바꿀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우리가 바꾸라고 이 나라가 존재하는 것 아니냐'고 대답을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당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사회의 문제들이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불신이 팽배한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문란이 밝혀지면서 이러한 시류는 더욱 거세졌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보수정당 후보였지만, '경제 민주화'와 복지를 전면에 내걸고 선거전에 임했다. 실제로도 복지 정책 일부에서는 상대 후보였던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보다 정책이 더 잘 짜여있었다는 평까지 받았다. 그러나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세상을 바꾸는 약속'은 알고 보니 '약속을 바꾸는 세상'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조롱만 남아있는 게 앙상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 그 존재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더 시민들은 실소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한다는 약속은 분명히 지킨다'는 박근혜 당시 후보의 말과 과거 그의 아버지가 이룬 '성과'라는 보증이 더해져 사람들은 그에게 신뢰를 보냈지만, 그도 이미 다른 정치인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4년 동안 점차 확신하게된 것이다.

제18대 대선 투표율은 75.8%였다. 분명히 전후의 선거와 비교할 때 높은 투표율이었다. '투표율이 높으면 보수정당 후보는 낙선한다'는 징크스가 깨진 날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선거들의 투표율은 60%를 넘기지 못했다.

그렇다. 투표장에 안 나오는 약 40%의 시민들은 박근혜 정권 4년 동안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약 절반에 못 미치는 국민들의 민의가 수렴되지 않는 정치가 진행되어 왔고, 그리고 그 절반은 이 사회의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그들 스스로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의 주권을 반납한 것이다.

그렇다. 이들은 분명 '투표하면 뭐? 국가가 뭐? 다 똑같은 니들이 알아서하지 왜?'라는 짜증 섞인 질문을 선거 때마다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너진 이 상황에서 정말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들이 피땀 흘리며 번 돈에서 걷어간 세금과 여러 가지 손해를 감수하며 감당한 의무가 고작 최순실이라는 사인을 위한 것이었냐는 회의감에 모두 땅을 치며 언론의 보도를 지켜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고 안 하고를 막론하고, 최근 정치 상황에 이토록 많은 관심을 가졌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당의 지지율'에는 큰 반향이 없었다. 왜일까? 도대체 왜 정부여당을 바꿀 수 있는 야당에는 새로 힘이 더해지지 않는 것일까?

우리 국민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꿈꾸고 향유할 권리가 있다

모두의 손으로 협동하여 만들고 지키고 가꾸기 위해 이 나라는 존재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정치한다. 그러나 현실의 장벽이 있기에 다만 그 정치권력을 '정치인'들과 '정당'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나를 대변해달라'는 약속으로 투표하고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의무를 부담하는 이유다.

분명 '의무 없이 권리 없듯'이, '권리 없이 의무는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인 것은 우리는 얼핏 알고 있다. 국민의 의무는 국가를 지탱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국민들에게 국가가 필요한 이유가 구성원들에게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이들도 그 의무를 부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국가가 그 역할을 다하지 않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꾸준히 그 국가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당과 정치세력들에게도 질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질문에서 정치가 멀어질 때, 점점 시민들의 권리는 으스러지고 말 것이다. 이미 그러한 흐름은 꾸준히 있어왔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그간 우리나라의 국회는, 우리나라의 청와대는, 정부 부처는 국민들과 닮아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가까이 있었으며, 얼마나 국민의 손에 더 쉽게 잡힐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정당들은? 얼마나 소통하고 얼마나 민의를 수렴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대안을 가지고 있었을까? 진보정당에서 보수정당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대변하기 위해, 사회의 울타리 바깥의 사람들을 대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치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이 시기를 돌파하기 위해 이 정치의 구성에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함께 했는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치를 점검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이번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한 대목을 지켜보아야 한다.

민주사회가 무너지는 시대

우리는 지금 앞에서 나온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나온 구절을 다시 인용해야 할 것 같다. '저마다 모든 사람과 결합을 맺으며 자기 자신 이외에는 복종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울 것'이라는 '사회'에 대한 그의 이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에도 중요한 밑바탕으로 있다.

이 사회는 경제적으로 관계망이 엮인 것을 말할 수도, 지역적인 왕래를 말할 수도 있으며 수많은 형태로서 우리에게 존재를 보여준다.

다만, 우리가 그 관계에서 '자유롭고 평등'해야 함을 이 사회의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그 바탕에는 '연대'의 정신이 존재한다. 그리고 '구성원 하나하나를 그 모든 권리와 더불어 공동체 전체에 대해 전면적으로 양도하는 것'에서 정치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원칙들이 깨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정치를 무너진 소통으로 인해 '다른 시공간'의 것으로 인지하게 되고, 사회의 직무유기로 멀어진 것들은 대신 자본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요람부터 무덤까지' 책임져야할 나라의 역할은 이미 앞으로의 생존을 담보하는 돈과 스펙을 요구하고 가혹한 노동을 가져가는 기업들이 점하게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비롯한 경제 위기는 국가가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했다.

점점 청년들에게 '정치인의 약속'은 일부 스타 강사의 '자기계발서'로 대체되고 말았으며, 그 책들은 '나만 잘하면 된다'는 가치관을 주입함으로서 '연대의 가치'를 '배부른 소리' 취급했다. 그리고 원래라면 이 사회의 문제들은 역시 '그들의 문제'가 되어야 했지만, 그러한 가치관이 만연해짐과 동시에 그렇지 못했다. 사회의 책임이 상실되고 여러 가지 문제들과 빈곤은 그저 한 개인의 '부족함'으로 모든 문제가 설명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경쟁 사회'가 사실은 항상 패자를 만듦을 전제로 한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계발서'가 말해주는 인간 승리도, 반짝거리는 저 높은 곳의 자리들도 모두 경쟁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줌과 동시에 더 많은 것에 대한 욕구를 창출해낸다. 그리고 그 화려함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이것은 어느새 우리의 일상에서 꽤 많은 방식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모두 그 화려함에 취해있을 때 간과한 것이 있다.

승리는 무엇이 있을 때만 존재하는가? 바로 '루저'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루저'의 삶은 최저생계비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최저임금이 설명해주듯이 매우 엄혹하다.'루저'의 삶은 그 아무도 꿈꾸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이에 관심 역시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수의 국민들은 최순실 모녀 앞에 '루저'였으며, 루저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이야기였다.

'힐링' 코드가 유행하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이 경쟁에 지쳤다

그러나 '승리'의 화려함은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사회의 '루저'들은 아프다. 청춘이라서 아프기 보다는, 이 사회의 룰이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룰은 누가 정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이 사회의 주체는 우리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룰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며칠 전이었다.

미국 땅의 '루저'들은 결국 아픔을 호소하면서 미국의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를 뽑았다. 그들의 대안은 어떤 '배운 양반'의 '약자를 위한 올바름'도, '정의감'도 아니었다. 바로 '끝장을 보는 것'이었다.

사회가 파편화되면서 가장 야생의 상태에 놓인 것은 저학력 노동자, '레드넥'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과 경쟁해야하는 이주민들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사회가 정말 제대로 그 역할을 했다면 모두가 협의하고 소통하고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 더 고민했을 것이고, 모든 정당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원인을 분석하고 국민들에게 소상히 밝혔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 제대로 작동했다면, 사람들은 굳이 트럼프를 뽑지 않았을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과 미국의 리버럴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결코 그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들을 대변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포퓰리스트 트럼프의 승리를 통해 확인 사살 되었다.

진정으로 이 정치가 소외된 이들을 대변하고 사회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번에 민주당이 패배한 것에서는 바로 그 지점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다.

가장 큰 예시로 '정치적 올바름', 즉 'PC 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들이 구별 지었던 약자들과 '백인, 남성, 기독교도'의 기득권이라는 대립구도에서 후자의 언어와 인식들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역할에는 실존하는 그 기득권 내에서의 사각지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레드넥'의 마초적인 모습과 무식한 모습은 '정치적 올바름'을 정의한 이들의 규정에 의해 '올바르지 않은 것'이 되기에 십상이었고 그것을 정의한 이들은 주로 미국 사회에서 지식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압박과 차별은 더욱 더 큰 분노를 생산해냈다. 'PC 운동'과 대중의 관계에서의 권위적인 모습은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은 '민주적이지 못한' 이 관계에 경종을 다시 한 번 울렸다. 결국 진보를 말하는 이들마저 서민들을 대변하지 못했으며 그들 역시 기득권이라는 분노만 일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분노한 이들은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던 이 사회를 갈아엎을 정치인의 선봉으로 트럼프를 고르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전 세계로 뻗어 내가 있는 프랑스에도 상륙하여 그의 정치적 '동지' 포퓰리스트 마린 르 펜에 가세하게 되고 파리의 일부 시민들은 막대한 실업률과 이주민 문제로 병을 앓고 있는 프랑스 상황을 지켜보며 지금 공포에 빠져있다. 마린 르 펜은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 투표에 진출할 것으로 보이는 유력한 후보이다. 그리고 현재 대통령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보다 배를 웃도는 지지율을 가지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가 약속한 '사회'의 원칙들이 깨져가고 있다.

자, 이제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는 분열하고 있고, 정치는 민주권력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다.
사회가 분열하면 결국 그 사회가 책임지고 있는 이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될수록 약자들의 삶은 힘들어질 것이다.

우리의 사회를 다시 점검해볼 때가 되었다. 진정으로 우리 사회에 배제되었던 이들은 없었는지, 진정으로 이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 선 모든 시민들에 의해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던 진보정당들은 진정 약자의 시선에서 삶의 터전을 위한 대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렇게 점검을 함과 동시에 우리가 헌법이 약속한 우리의 나라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서로가 고민하면서 해결을 모색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지금 파편화된 사각지대를 따뜻한 양지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며 무엇보다도 민주에 의해 정의를 수호하는 국가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다는 희망과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다만, 그 동안 시민들이 나서지 않았을 뿐이다.
이 때 광장의 군중들이 모일 때, 우리는 더 많은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많은 경험을 해보았다.
지난 총선에서 청년들이 나서자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어 박근혜 정권의 폭정을 제압했다.
이번에 있을 집회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의 목적도 분명해졌다.
바로 대중과 괴리된 정치를 심판하고 그리고 공정한 민주공화국을 원하는 시민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책임을 지고 일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 외치고 민주공화국을 책임질 수 있는 정치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처한 문제들을 이 사회의 테이블에 놓고 모두가 고민하고 해결하는 '호혜공동체'를 복원하는 시민의식을 광장에서 공유하는 것이다.

이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정말 뿌듯한 심정으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수 있는 그 날을 꿈꾸어보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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