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기대했던 페미니스트 시국선언은 이미 끝나버려서 나는 청와대 방향 행진에 동참했다. 저녁 8시, 150만이 모인 촛불 집회의 공식 무대가 끝나자, 파도 같은 인파를 헤치고 동아일보 앞에서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얼싸안고 인사를 하는 옆에서는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종이컵을 들고 모여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정말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나와 집회를 하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는 사이, 친구는 아저씨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는 거리의 인파를 헤치고 아늑한 카페에 자리 잡았다. 페미니스트 시국 선언에서 받은 스티커를 건네며 친구는 그 자리에 성폭력 피해자의 발언을 포함해, 여러 참여자들의 자유 발언에 감동했다고 했다. 나는 발언을 한 여성들이 참 용감하다고 했고, 그들의 발언을 들을 기회를 놓쳐 아쉬웠다. 친구는 요즘 페미니즘에 빠져있다. 비단 내 친구에게만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아시다시피 2016년 한국을 관통하는 가장 뜨거운 이슈 중의 하나가 바로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이자, 어린 딸들을 키우는 나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적 성찰의 과제이며, 결혼하고 사는 일상속에서 자주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친구는 퇴진을 요구하는 대통령과 국정농단의 주인공이 여성인 점을 핑계로 여혐 발언이 남발되고 있다며 언론과 그 주체인 남성을 욕했다. 내 친구뿐 아니라, 지난주 참여했던 집회의 자유 발언대에서는 '아줌마'를 여혐 발언으로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한 젊은 여성도 있었다. 사실 나는 근래 '유행하는' 페미니즘에 경도된 그녀들의 주장과 태도에 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는 가시 같은 게 있음을 고백한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여성을 혐오하고 비하하는 표현일까? 나는 혹시 그녀들이 이 나라의 모든 남녀노소가 최신 유행 버전의 페미니즘 담론에 경도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스쳤다. 여성을 폄하하는 발언과 대놓고 하는 상스러운 욕에는 나도 발끈한다. 청와대 약품 구매 목록에 비아그라가 나오자 언론들, 특히 황색 언론들은 이 사건을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 심지어 야동 이야기까지 흘리며 대중의 눈과 귀를 선동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만약 대통령이 남자였다면 사태가 이런 방향으로 흘렀을까 싶으며, 섹스 비디오 유출로 고통을 겪었던 여성 연예인들의 눈물이 떠올랐다. 남자 대통령이었다면 나도 청와대 약품 목록의 비아그라를 한껏 조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여성인 나는 과연 그 비아그라가 60대 폐경기 여성인 대통령을 위한 것이었을까에 더욱 의문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 시각의 선정적 기사들에 나는 정말 토악질이 난다. 그러나 대통령을 '미스 박'이라 지칭하고, 최순실을 '강남 아줌마'라고 부르는 데는 강한 혐오감이 들지 않는다. '미스' 라는 영어 호칭이 미혼과 기혼을 구별함으로써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제2의 성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 동의하지만, 당장 국정 농단의 주연 배우들이 여성인 만큼 상투적인 표현인 '미스'가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줌마'란 표현은 더 선량하다. 아줌마는 중년 여성을 호칭하는 말이고, 아저씨라는 중년 남성을 호칭하는 말이다. 사실 나는 아줌마라는 호칭을 아주 좋아한다. 그 얼마나 널리 사용할 수 있는 간편한 호칭인가. 나보다 연배가 높은 타인을 부르기에 그보다 더 좋은 호칭은 없다. 아저씨 아줌마를 쓰지 않는다면, 나보다 연배가 높은 사람을 언니, 이모님, 어머님, 형, 형부, 아버님 등등으로 불러야 하는, 전 국민이 대가족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 나는 더 거부감을 느낀다. 선생님이나 샘이라고 부르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우리에게도 'you'라는 간편한 말과 군더더기 없이 이름을 부르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면 호칭할 때 정치적 올바름을 고려해야 하는 머리 아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게 대통령을 '미스 박'이라고 부르며 랩을 하려던 DJ DOC가 무대에 오르지 못한 것에 약간의 연민이 느껴졌다. 미스(Miss) 말고 미즈(Ms)라고 했다면 괜찮았을까?10년 전 직장을 다니던 나는 '미스 박'이라고 불린 적이 있다. 내가 담당했던 외주 업체의 부장이었고, 부산 토박이로 평생 물류업계에 종사한 50대 후반의 아저씨였다. 20대 이던 나는 '미스 박'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그 순간 잠시 거부감이 들었으나, '갑'의 회사에서 나온 젊은 여성 직원에게 회를 대접하며 두 손으로 소주를 따라주던 부장님은 '미스 박'을 존칭이라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외주 업체들의 간곡한(?) 청원에 힘입어 대리라는 직함이 얻었다) 호칭이란 그렇듯 누가 부르냐, 어느 지역이냐, 어떤 문화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내포하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솔직히 나는 DJ DOC가 박근혜를 미스 박이라고 한 데 대한 정확한 의도를 간파하기 힘들며, '미스 박'이 항상 "커피 좀 타와"라는 상황으로 연상되지도 않는다. 적어도 미스 박 시절을 살았던 나에게는 그렇다. 10년 전 나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다. 그 무렵 여러 권의 페미니즘 책을 읽었는데, 인도의 페미니스트, 반다나 시바의 <에코 페미니즘>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제3 세계 출신인 반다나 시바는 '누구를 위한 페미니즘' 인가를 묻는다. <에코 페미니즘>에서 그녀는 제1 세계 여성들만의 페미니즘을 강렬히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제1 세계 페미니스트 운동이 과연 제3 세계 여성들을 아우르는 여성주의인가? 가령 제1 세계 여성의 사회 활동을 위한 제3 세계 여성의 저렴한 노동이 과연 여성주의적 측면에서 정당한 것인가? 합리적인 가격의 유기농 면을 구매하는 제1 세계 여성들은 면화 산업에 종사하는 인도 여성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알고 있나? 제1 세계 여성들의 페미니즘은 그들 삶의 방식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인지하는가? 최근 미국의 페미니스트, 빅토리아 로우는 <국가 폭력에 의존하여 가정 폭력을 해결하려는 방식이 가장 약자인 여성들에게 피해로 돌아가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녀에 따르면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벌여온 가정 폭력 방지 입법화 운동의 부작용으로 경찰의 합법적 폭력의 범위가 더욱 넓어지면서, 그것이 유색 인종, 이민자, 경제적 약자에게 남용되고 결국 제일 소외된 계층의 여성들이 가장 피해를 보는 상황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북미에 살지 않는 나는 그 논리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심각한 경찰 폭력이 주로 흑인과 유색인종에 집중되는 미국이란 나라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여성주의 연대의 기류를 엿볼 수 있었다.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특정 지역의 특정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를 아우르는, 성(性)과 인종과 계급을 넘어서 연대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 반다나 시바는 그렇게 주장했고, 그녀를 만난 후 나도 그렇게 주장한다. 2003년,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소제목을 달고 출판된 <오빠는 필요 없다>의 저자 전희경은 이렇게 썼다.중요한 것은 여성주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정의하는 것이나, 진정한 여성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라기보다, 여성주의자들 배후에 어떤 권력의 맥락이 놓여있는지 이해함으로써 억압에 대한 해석과 저항의 전략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견해든 특정 상황에 뿌리박은 것이며, 자신의 견해 또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특정한 상황에서 여성주의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나 대립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선이나 경계를 절대화하는 것은 대화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여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나면서, 동시에 그 '우리' 안팎을 나누는 경계가 다시 그어질 수 있으며, 모두 각자 변화하는 주체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행동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사용한 '말'을 가지고 꼬리를 잡는 것은 교조주의의 한 단면이다. 교리(敎理)나 교조(敎條)란 의미의 '도그마 Dogma'는 대놓고 독단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사상이나 운동이 교조주의에 빠지는 것은 심히 경계해야 한다. 교조주의는 극단을 낳는다. 이슬람 근본주의도, 배타적인 개신교도, 극우도, 박근혜를 우상숭배 한 친박도 도그마에 빠져 진실을 보는 데 눈먼 집단들이다. 종북과 애국의 프레임을 가지고 기사를 팔아온 보수언론들도 그와 한통속이다.2016년의 한창 유행인 한국의 페미니즘은 과연 편협한 교조주의로부터 자유로운가 묻고 싶다. 사실 페미니즘이란 정확한 개념을 잡고 경계 짓기가 불가능하다. 인류의 반인 여성들이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므로 어디까지가 맞고 어디까지는 아니라고 정의할 수 없다. 서울에 살던 20대 시절의 나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지만, 삶이 변해가듯 관심사도 변해간다. 농촌 지역에 사는 지금의 나는 트랙터 상경 투쟁에 실패한 농민의 일에, 변변한 연금 없이 홀로살아가는 소외된 노인들의 삶에 더 마음이 쓰인다. 관심의 대상이 달라지다 보니 그들의 입장이 이해가 된다. 사회의 다른 구석에 사는 사람들에게 "할아버지, 그건 여성을 대상화하는 표현입니다"라며 요즘 유행하는 페미니즘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가부장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나, 성과 인종, 나이와 국적, 경제적 계급을 초월한 연대가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에는 어려운 일이라는 거 안다. 그러나 최소한 150만이 모인 촛불 집회 이후 아저씨들의 소수 한잔의 뒤풀이를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나이마다 세대마다 노는 문화는 다르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서도 조금 관대해도 좋지 않을까. 그 호칭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역사를 갖고 있더라도,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그 호칭을 사용한 남자들을 다짜고짜 여성 혐오자로 몰고 가는 것은 너무 서슬이 퍼레서 솔직히 무섭다. 페미니즘의 이름을 걸고 결코 편협해 지지는 말았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나는 나대로 산다> 응모글 첨부파일 fem-is-humanism.jpg #페미니즘 #여성주의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